법치국가를 표방하고 있음에도 법이 지켜지지 않는 나라, 많은 사람들이 인간으로서의 삶의 기본권을 누리지 못해 고통과 핍박 속에서 울부짖는 소리가 근래에 와서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그 원인을 찾아 들어가 보면 세상과 종교권력의 핵심에서부터 비롯되고 있음을 알게 한다. 얼마 전 소위 ‘10당 5락’이라는 신조어로 온 나라를 시끄럽게 했던 한기총 대표회장의 금권선거를 기억할 것이다. 이들이 사회에서도 없을 법한 상식을 벗어난 부정과 불법을 통해서라도 그렇게 대표회장에 당선되려 하는 데는 필시 연고가 있을 것이다. 첫 번째로 그 많은 돈을
이 시대를 보면서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기까지 견뎌왔던 수천 년의 역사가 얼마나 비통함을 느낄까 생각해 보게 된다. 지금 대한민국은 공의가 살아 있고 정도가 살아 있는 나라라고 볼 수 있을까. 질곡의 터널을 지나오면서 참기 어려운 고통과 아픔을 견뎌 온 이 민족이 보고 싶었던 오늘은 지금의 이 모습은 아니었을 것이다. 어렵고 힘이 들 때 허리띠를 졸라 매며 하나 되어 잘 살아보자고 외치던 때와는 사뭇 다른 요즘, 50년 전 5.16을 다시 조명해 보자는 움직임이 일어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으리라 봐진다. 이쯤에 “여수룬이 살찌매…
오늘날을 흔히 말세(末世) 혹은 말세지말(末世之末)이라고들 한다. 말세의 원론적 의미를 생각해보기도 전에 그저 말세라고들 하며 이를 부정하지도 않는다. 누가 언제부터 한 말이고 무슨 의미인지는 중요치 않다. 그저 말세라는 생각이 드는가보다. 그것은 말세에는 어떤 현상들이 나타날 것이라는 일치된 생각이 우리의 잠재의식 속에 내재돼 있다는 얘기도 된다. 즉, 말세의 징조가 있다는 뜻이며, 그러한 징조가 이 시대에 나타나고 있다는 얘기가 아니겠는가. 그 징조는 누구나가 느낄 수 있는 흔히 종말사상이라고 일컫는 혼탁한 생각에서 비롯된 온갖
세계는 지금 초강대국 내지는 연합국으로부터 나오는 힘의 쏠림현상이 둔화되고, 제각각 자구책 마련에 분주하다. 특히 알카에다의 지도자 빈 라덴의 사망으로 세계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미국은 9.11테러의 복수로 빈 라덴을 제거했다고 하지만,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낳고 있다. 알카에다와 탈레반은 아니 이슬람권은 더 큰 복수를 다짐하고 있으며, 알카에다의 보복은 미국은 물론 미국과 관련 있는 모든 나라에 긴장을 주고 있으며, 이미 그 움직임은 시작됐다. 약 한 세기(世紀)를 독주하다시피 해 온 미국은 이제 그 힘이 쇠퇴해 가고 있
오늘날 개신교의 금권선거를 위시해 각 종파에서 일어나는 부정과 타락의 정도는 이미 그 도를 넘어섰다. 사회적 부정과 시비의 원인을 찾아가 봐도 그 출발은 종교에서 기인됐음을 알 수 있다. 종교와 사회는 각기 그 목적을 위해 서로 순기능적 측면에서 필요충분의 조건에 있어야 함에도, 현실은 먹이사슬이 되어 타락의 악순환을 가져오는 연결고리가 돼 있다. 결국 오늘날 종교는 종교로서의 가치가 상실된 채, 타락의 원흉이 되어 사회적 혐오의 대상이 되고, 개혁의 대상이 되어 있다. 이에 본지는 사회는 물론 범종교지로서 또 계몽지로서 이 시대
5월 2일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 앞에선 이상한 시위가 있었다. 지금까지 세계문화를 선도해 왔던 유럽의 메카 프랑스, 그것도 그들 문화의 자존심인 루브르 박물관 앞 광장에서 프랑스인들은 물론 유럽의 한류팬 300여 명이 모여, ‘동방신기’ ‘샤이니’ 등 한국의 유명가수들의 노래와 춤으로 이색시위를 벌였다는 사실이다. SM엔터테인먼트 소속사 가수들의 공연티켓이 판매가 시작되고 15분 만에 인터넷으로 매진된 데 대한 항의로 ‘소녀시대’ 공연을 한 번 더 해 달라는 요구성 시위다. 이 시위가 관심이 가는 이유는 1866년 병인양요(丙寅洋擾
지난 4.27 재보선에서 한나라당이 참패한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뿌린 대로 거둔다’는 말이 있듯이 한나라당이 금번 참패라는 결과를 내기까지는 결과에 합당한 씨가 이미 뿌려졌기 때문이란 얘기다. 대선공약의 불이행으로 인한 무너진 신뢰, 즉흥적 정책결정과 변경에 이어 밀어붙이기식 국정 운영, 고물가에 전세난 등이 대표적으로 밭에 뿌려진 씨다. 설상가상으로 부산저축은행 사건이 터졌다. 은행의 대주주와 임원들은 사전에 돈을 빼가게 하고, 평생을 허리띠를 졸라매며 먹고 입고 쓰고픈 것들을 참아가며 맡긴 서민들의 생명과도 같은 예금에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난세마다 종교는 아니 종교 지도자는 당시의 암울한 시대의 등불이요 희망이요 길잡이였다. 그러나 지금은 종교가 어두운 시대의 원인이자 이유가 됐으며 근심이 됐다. 작금에 거리를 뒤덮고 있는 한국기독교총연합회의 해체운동은 오늘의 종교의 부패성과 불필요악임을 잘 대변하고 있다. 권력․명예․돈․성추문 등 온갖 부패와 타락의 원흉이 되어버린 종교, 개종(改宗)이란 미명하에 종교의 자유는 물론 사회악인 인권탄압의 선봉에서 비 인륜적 조직이 돼버린 종교, 그 뒤엔 종교의 탈은 썼으나 종교가 아니며 외려 불필요악인 소위 ‘한국
한 나라가 번영하고 존속할 수 있으려면 무엇보다 지도자의 역량이 중요하다 할 것이다. 그러나 백성 없는 나라는 존재할 수 없듯이 뛰어난 지략과 통솔력을 가진 지도자라 할지라도 백성과 소통하지 못하면 그 나라의 존속은 어려워질 것이다. 그렇다면 지도자가 어떻게 해야 백성을 잘 다스리고 나라를 부강하게 하며 오래토록 존속되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여기에 대한 답을 구하기 위해 사람들은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들의 리더십을 기록한 책을 교본으로 삼기도 하고, 옛 선조들의 삶과 철학에서 그 해답을 찾아보기도 한다. 그중에서도 동서양의 철학과
요즘 중동과 북아프리카 지역을 강타하고 있는 민주화 바람, 이 거센 바람은 아마 필연적 현상으로 다만 때가 되어 나타나고 있을 뿐이다. 이 작은 땅 한반도에는 51년 전 이미 민주화의 씨는 뿌려졌었다. 어쩌면 그 근원은 92년 전 일제 침략에 맞서 종교지도자들이 앞장서 분연히 일어섰던 3.1운동이었으며, 아니 태초부터 우리 민족에겐 부정과 부패와 거짓과 위력은 존재하지 않았었는지도 모른다. 51년 전 4월 19일 고귀한 젊은 피는 민주화의 홀씨가 되어 이 땅에 흩어지고 뿌려졌다. 그래서 4월은 유난히 아프다. 그리고 숭고하고 아름답
지난 13일과 14일, 우리 국민들에겐 하루 간격으로 문화대국 또는 문화강국의 국민으로 기쁨과 씁쓸함이 교차하는 묘한 날로 기억될 것이다. 먼저 기쁜 것은 조선왕실의궤 중 1866년 프랑스 군에 의해 강제 약탈됐던 297권 가운데 우선 유일본 8권을 포함한 75권이 오동나무상자에 보관되어 1차로 지난 14일 김포공항을 통해 들어와 국립중앙박물관 서책용 수장고에 입고됐다. ‘조선왕실의궤’라 함은 조선왕실의 의전과 주요행사가 있을 시 훗날 참고하기 위해 남기는 일종의 기록문서다. 이번에 프랑스로부터 환수된 조선왕실의궤는 5년 임대형식으
너무나 유치해서 이제 좀 외면하고 싶으나 그러지를 못하게 하는 진드기 같은 사태가 있다. 바로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 관련 소식들이다. 그동안 권력과 거짓에 가려져 있던 부패와 타락의 실상들이 자고나면 밝혀지고 있다. 종교, 그 중에서도 기독교의 비종교적 행태가 지금까지 얼마나 이 사회와 종교세상을 지배하고 좀먹어 왔는지를 실감나게 하는 요즘이다. 한기총의 자중지란(自中之亂) 즉, 합동(길자연 목사)과 통합(이광선 목사)의 권력싸움에서 비롯된 이광선 전 대표회장의 금권선거 관련 양심선언은 그 발로(發露)야 어찌됐든 수많은 목회자
중동은 익히 이스라엘과 종교적 대결구도로 인해 화약고라 불려 왔다. 얼마 전부터는 중동의 각 지역마다 나라마다 각기 다른 사연을 가지고 악화일로(惡化一路)를 치닫고 있다. 사막과 기름이 충만한 곳이기 때문인지 화약고라는 닉네임으로부터 벗어나기는 어려운 것 같다. 튀니지의 쟈스민 혁명으로부터 시작되어 독재에 맞서는 자발적 시민운동으로 이어지고, 급기야 종족의 싸움으로 비화된 리비아 내전은 수많은 인명살상과 함께 세계경제의 발목을 잡으며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이런 가운데 이번엔 이슬람권의 비난에 앞장서 온 미국의 존스 목사가 이슬람
우리는 가까운 이웃 일본과 늘 불필요한 소모전과 신경전을 치러야 했다. 섬나라 일본으로서 영토에 대한 지나친 집착이 이번 대지진 참사를 보면서 이해는 간다. 그러나 거기에는 분명한 이유와 진실이 있어야 한다. 억지논리로 주장한다는 것은 미개한 나라의 미개한 사람들이나 하는 처사라 봐진다. 쿠릴열도(북방영토)와 댜오이다오(센카쿠열도)의 영토문제로 주변국과 마찰을 빚고 있는 가운데, 이번엔 한국과의 독도문제를 놓고 다시금 분쟁을 노골화해 오고 있다. 독도분쟁을 다시금 노골화시키는 시점이 우리를 당혹스럽게 하고 있다. 지진피해로 고통 받
지난 일요일 아침 문득 종교방송을 보게 됐다. 사랑의 교회 오정현 목사가 많은 성도들 앞에서 거룩하게 설파하는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바벨탑이 무너지고 있다”고 현 기독교 현실을 질타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면서 세상교회의 부정과 타락을 나름의 성경지식을 활용해 가며 바벨탑의 실체가 작금의 타락한 종교 그 가운데서도 자신과 동류인 목회자들이 운영하는 현 교회를 지목하고 있었다. 어찌 들어보니 자신들의 모습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같이 느껴졌으나, 정작 자신은 그렇지 않음을 역설하는 것으로 보여 ‘혹시’가 ‘역시’가 되었다. 구약에 보
사망자와 피해규모에 대해 확인조차 불가할 정도의 참혹한 현실 앞에 이웃 일본은 이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진도 9.0의 강진은 쓰나미로 이어지고 다시 원자력발전소의 폭발로 이어지면서 모든 것을 다 앗아가고 있다. 더군다나 각국은 황급히 자국민들의 구출작전에 돌입하고, ‘즉시 일본을 떠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이럴 때 기아와 추위와 방사능 공포와 함께 남아 있는 일본인들의 심정은 어떠할까를 한번쯤 생각해 봐야 한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일본에는 마지막 보루(堡壘)가 있었다. 원전 복구를 위해 피폭을 무릎 쓰고 목숨을 건 181명
‘도쿄가 위험하다’ ‘2차 대전 이후 가장 힘든 시기를 맡고 있는 일본’ ‘최악으로 치닫는 원자로’ ‘식수 대신 시커먼 물 마셔’ 등은 시시각각 올라오는 이 시간 주요뉴스의 헤드다. 진도 9.0의 위력으로 동부지역에 다가온 대지진과 쓰나미 그리고 원자로 4차폭발로 이어지는 최악의 상황에 일본은 직면해 있다. 이 같은 상황에서 다시금 인류애를 깨닫게 한다는 기자들의 감동적 글이 인터넷을 연일 도배하고 있다. 기자들은 생사의 갈림길에 선 일본인들이 약탈과 다툼 대신 나보다 더 힘든 처지에 놓인 남을 배려하고, 고통과 슬픔을 참아내는 모
사람이 살아가는 이 세상은 사회와 종교의 측면에서 운행되어 가고 있다. 어떻게 보면 사회는 다시 종교의 보이지 않는 지배를 받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한 대표적인 예가 지난번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 길자연 목사와 대통령의 무릎기도건과 같은 해프닝이 아닌가 싶다. 오늘날 참으로 많은 종교가 제각기 나름의 종교관을 앞세워 이 사회의 구성원이기도 한 신도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으며, 신도들은 또 그것을 좋게 여기며 따라가고 있다. 그래서 종교가 살아야 사회와 나라가 산다는 말이 있는가 보다. 그런 가운데서도 유별난 종교가 있으니 바로
얼마 전 언론(세계)을 통해 발표된 주요국 인식도 조사에서 한국은 조사 대상 27개국 중 끝에서 6번째로, 각국으로부터 좋지 않은 인식을 받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유구한 역사와 찬란한 문화를 자랑하는 민족으로서 또 G20(주요 20개국) 정상회의를 개최한 나라로서 심히 고민해 봐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조사결과가 이처럼 나오게 된 원인은 과연 뭘까. 이 나라의 최고 책임자는 물론 정치․종교지도자들의 개념 없는 의식과 가치관이 바로 가장 근본 된 원인으로 분석되고 있다. 어찌 보면 그들만의 잘못이라기보다 그렇게 만든 우리의 잘못
지난달 28일부터 이달 10일까지 국지전과 전면전 그리고 북의 급변사태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한 대비태세를 총괄적으로 점검하기 위해 키 리졸브 훈련이 진행되고 있다. 미본토로부터의 실병력 기동훈련인 독수리훈련은 다음달 30일까지 계획돼 있다. 북 또한 이에 질세라 핵 시설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고 최첨단 장비를 전방으로 전진 배치시키고 있으며, 군고위급의 최전방 순시를 통해 병사들의 전의를 다지고 있다. 한편으론 이 같은 분위기를 호기로 삼아 김정은 세습과 식량난 그리고 독재 권력을 무너뜨리기 위해 중동으로부터 불어오는 시민혁명 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