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전쟁은 생명을 건 투쟁이므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그러나 고대에는 낭만과 윤리도 있었다. BC 563년, 패권을 노리던 진(晋)과 초(楚) 사이의 전쟁이 벌어졌다. 초장 반당은 명궁 양유기와 함께 활을 쏘아 한 번에 갑옷 7벌을 꿰뚫고 공왕에게 자랑하며 걱정하지 말라고 큰소리쳤다. 공왕은 화를 내며 너희가 바로 나라의 수치이니, 내일 아침에 활을 쏘면 그것 때문에 죽을 것이라고 말했다. 진의 여기는 활로 달을 맞히고 진흙에 빠지는 꿈을 꾸었는데 해몽가가 초왕을 쏜 후에 너도 죽을 것이라고 말했다. 다
박종윤 소설가 한나라 유방이 보낸 수하는 구강왕 경포를 설득해 초나라에 반기를 들 것을 승낙 받았다. 수하는 초나라 사신이 머물고 있는 영빈관으로 찾아가 구강왕이 한나라에 귀순했다고 큰소리로 말하고 도망가는 사신을 잡아 죽였다. 경포가 초나라와 전쟁에서 불리하자 군대는 그 자리에 남겨 두고 한나라 유방에게 찾아가서 자리를 잡자 부하를 구강에 보냈다. 초나라는 경포의 군대를 이미 공격해 편입시켰고 경포의 아내와 자식들은 죽여 버린 뒤였다.유방이 진평을 불러 상의했다.“이 전란이 언제까지 끌 것 같소?”“초 항왕은 부하들을 사랑하고 겸
박종윤 소설가 한나라 사자로 파견된 수하는 회남의 구강왕 경포를 비밀리에 만나 강대한 초나라 항우와 현재는 약하지만 지리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고 제후들에게도 신뢰를 얻고 있는 한나라 유방과의 득과 실을 따져 끈기 있게 설득하고 있었다.“물론 대왕께서 회남의 병력을 동원하신다고 해도 그 힘이 초나라를 패주시키는 데에 충분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대왕께서 초나라에 반기만 드시면 항우는 신경이 쓰이는 일입니다. 앞으로 몇 달 동안만 항왕을 괴롭혀 주신다면 그동안 한나라는 천하를 얻을 수가 있습니다.원컨대 초나라보다 한왕의 뜻을 따르
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맹자의 대장부론은 사사로운 부귀에 연연하는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게 한다. 대장부론에 가장 부합했던 인물은 누구일까? 당의 이세적(李世勣)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고구려 멸망을 주도하여 우리와는 악연을 맺었다. 그러나 그의 삶은 치열하면서도 유쾌했다. 원명은 서세적(徐世勣)이었는데 당고조 이연이 이성을 하사했다. 나중에 태종 이세민의 피휘를 위해 이적으로 개명했다. 명장이 많이 난다는 산동성 출신으로 대단한 부호였다. 부친 서개도(徐蓋都)는 친소를 가리지 않고 수많은 빈민을 구제하여 덕을 쌓았다. 이적은 수말에
박종윤 소설가 항우는 초나라에 귀순해 온 진나라 병사 20만명을 신안 땅 남쪽에 생매장을 해 버렸다. 그런 다음 진나라로 진격해 함곡관에 이르렀으나 유방의 군사들에게 길이 막혔다. 유방이 벌써 함양을 함락시켰다는 보고를 받고 펄펄 뛰며 유방을 죽일 것을 결심하고 총공격 준비를 하고 있었다. 유방의 수하에 있는 장량에게 항우의 숙부 항백이 밤에 몰래 찾아와서 빨리 도망치라고 충고를 했다. 장량은 패공 유방과 의논하고 항백과 인척 관계의 서약을 하고 그에게 항우를 배신할 의사는 추후도 없었다며 그 뜻을 잘 전해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항
박종윤 소설가 진유현의 고양 땅에 역이기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는 글을 많이 읽었으나 벼슬에 나아가지도 못하여 생계조차 어렵게 지냈다. 그는 관문 지기로 일하며 겨우 배를 채웠다. 역이기는 각지에서 장수들이 진나라에 반기를 들고 일어나고 그들이 고양 땅을 지나갈 때마다 만나 보았으나 모두 허황된 꿈만 꾸었지 지신의 웅대한 이야기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어느 날 고양의 역사에 패공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역이기가 그를 만나러 갔다. 마침 유방은 여종들에게 다리를 뻗은 채 발을 씻기고 있으면서 역이기를 만나려 했다. 역이기가 도움
박종윤 소설가 초나라가 진나라에 참패하자 초회왕은 송의를 상장군에, 항우를 차장에 임명하여 조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떠났으나 상장군 송의는 46일이 지나도록 지체하고 있었다. 항우가 황하를 건너 진나라 군대를 공격하자고 건의했으나 송의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항우는 송의를 죽이고 초회왕에게 그 사실을 보고했다. 회왕은 항우를 정식으로 상장군에 임명했다. 송의가 죽은 뒤로 초나라 항우의 위세는 빠르게 높아지고 그의 이름은 제후들 사이에 크게 떨치고 있었다. 항우 휘하의 경포와 포 장군이 거느리는 2만의 군사는 황하를 건너 거록 땅에 갇혀
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BC 250년, 장평(長平)에서 진에게 패한 조는 45만의 군대를 잃었다. 대대로 조와 우방이던 연은 지원하지 않았다. 연왕은 율복(栗腹)을 조로 파견해 황금 500금을 바치며 조왕의 무병장수를 빌었다. 조의 내실을 탐지하려는 속셈이었다. 귀국한 율복은 조의 장정 대부분이 장평에서 죽었으므로 아이들이 자라기 전에 공격하면 쉽게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고했다. 그의 보고가 연왕의 야심을 자극했다. 악의(樂毅)의 아들 악간(樂間)은 반대했다.“조는 적국으로 둘러싸여 수많은 전쟁을 겪었습니다. 전쟁이라면 이골이
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오행에서 북쪽은 죽음을 상징한다. 장례를 치를 때는 북문으로 시신을 운반했다. 전쟁은 흉사이므로 군대는 북문으로 출전했다. 왕실 근위대도 북문밖에 주둔했다. 군주는 무릎을 꿇고 장군이 탄 수레바퀴를 민다. 군대를 신뢰한다는 최고의 이벤트이다. 장군은 전쟁에 관한 모든 권한을 지닌다. ‘손자 구변편’에서는 출전한 장군은 전장의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는 군주의 명령을 받지 않는다고 했다. 공격할 상황인데도 후퇴명령을 내리거나, 후퇴할 상황인데도 공격명령을 내린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러나 이는 이론적 원칙일
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삼국시대의 진등(陳登)은 광릉(廣陵) 출신으로 자를 원룡(元龍)이라고 했다. 충직한 마음, 고상한 인품, 진중한 대략을 지닌 그는 박학다식하고 다양한 기예까지 갖추었다. 25세에 효렴으로 추천돼 고향인 동양현(東陽縣)의 현장이 됐다. 몸을 상할 정도로 백성들을 돌보자 조조가 광릉태수로 발탁해 여포를 견제했다. 여포가 진등의 동생 3명을 인질로 화친을 요구했지만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더 강하게 압박했다. 여포의 부하 장홍(張弘)이 진등의 세 아우를 데리고 귀순했다. 여포를 제거한 후 복파장군이 된 진등은 강남의
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BC 681년, 제가 노를 격파했다. 노장공(魯莊公)이 영토할양을 조건으로 강화를 요청하자 제환공(齊桓公)도 수락했다. 양국 군주가 회맹을 체결했다. 노장공이 서약서를 읽으려고 할 때 조말(曹沫)이 비수로 제환공을 위협하면서 빼앗긴 땅을 돌려달라고 요구했다. 환공이 승낙하자 조말은 비수를 거두고 북쪽을 바라보며 신하의 자리에 섰다. 환공이 조말을 죽이려고 했다. 그러자 관중(管仲)은 신뢰를 잃지 말라고 말렸다. 소식을 들은 제후들은 제를 믿고 패주로 받들었다. 환공 23년, 산융(山戎)의 침공을 받은 연을 구
박상병 정치평론가 이런 일도 한두 번이지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반복되다 보면 비판이 아니라 분통을 터뜨리기 십상이다. 이번 북한의 지뢰도발 사건은 그 자체로도 충격이지만, 그 후의 정부 대응을 보면 “도대체 누구를 위한 정부냐?”는 원색적인 비판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 상식으로도 납득하기 어려운 일들이 권력 핵심부에서 벌어지고 있다면 어느 국민이 그 정부를 신뢰하겠는가. 더욱이 국가안보를 둘러싼 문제라면 상황은 더 고약해진다. 정부의 무능과 불신의 끝판을 보여주는 것과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군 당국, 언제까지 이럴 것인가비무장지대에
최상현 주필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왜군 침공 이틀 후인 1592년 4월 15일 경상우수사인 원균 측으로부터 침공 사실을 통보받았다. 원균은 새까맣게 쇄도하는 왜군의 규모와 기세에 주눅이 바짝 들어 대적을 포기한 상태였다. 그는 그의 관할 수역을 왜군에 고스란히 내주고 노량으로 물러나 있으면서 이순신에게 도와달라고 매달렸다. 그렇지만 이순신의 반응은 신중했다. 그는 즉각 움직이지 않았다. 왜군에 대한 충분한 연구와 그들 전술전기에 대한 면밀한 검토와 대응책을 마련한 후 전라우수사 이억기와 함께 5월 4일 새벽이 돼서야 85척의 전함을
안찬일 (사)세계북한연구센터 소장 현재 북한에는 김국기, 최춘길 씨 등 우리 국민 4명이 인질로 잡혀있다. 얼마 전 그들은 북한의 최고재판소로부터 무기 노동교화형을 언도받기까지 했다. 이런 가운데 최근 북한의 어민 5명이 동해상에서 구조되고 그중 3명이 귀순 의사를 밝히면서 인질논란이 대두되고 있다. 북한은 지난 4일 동해 상에서 구조된 선원들의 송환 및 귀순 문제를 놓고 아직 신경전을 이어가고 있다. 특히 북한은 현재 억류 중인 우리 국민 4명의 문제와 이를 연계시키려는 듯한 태도까지 보이며 남북 간 마찰음이 점차 커지는 모양새다
경색된 남북관계 개선의 물꼬가 트일 것인가. 김대중 전(前) 대통령의 부인인 이희호 여사가 8월 5~8일 평양을 방문하기로 예정돼 있어 남북관계 개선의 돌파구 역할을 할지 주목된다. 광복·분단 70주년을 맞아 남북관계 개선을 기대하는 목소리는 많지만, 지금 남북관계는 꽁꽁 얼어붙었다. 북한은 지난달 23일 서울 북한인권사무소 개소를 빌미로 대남 비방의 수위를 높이고 있다. 스포츠 교류의 장이 될 수 있는 광주 유니버시아드대회에도 불참했다. 광복 70주년 남북 공동기념행사와 관련해선 이렇다 할 반응이 없다. 이런 시점에서 이 여사가
최상현 주필 유럽이 아프리카와 중동 지역으로부터 쓰나미(Tsnami)처럼 몰려드는 난민(難民), 유랑민(流浪民)들로 몸살을 앓는다. 어쩌다 한 번씩 나타나는 난민선에는 기꺼이 자비(慈悲)의 손을 내밀던 유럽이다. 하지만 그 숫자가 갑자기 늘어나게 되자 난민선이 집중적으로 닿는 나라들에서 비명이 나온다. 이탈리아 그리스가 그 나라들이다. 이탈리아는 지중해 건너 아프리카에서, 그리스는 에개해 건너 중동 지역에서 난민들이 쇄도한다.그래봤자 연(年) 수만 명 규모지만 이들이 유럽 여러 나라로 분산되지 않고 두 나라에 집중됨으로써 고통스러워
김학수 한체대 스포츠 언론정보연구소장 몰랐던 사실이나 새로운 정보를 알게 될 때, 놀라기도 하면서 많은 도움을 얻는 경우가 있다. 지난주 그를 만나면서 가졌던 시간이 그런 순간들이 아니었을까 싶다.안찬일 (사)세계북한연구센터 소장과 같은 천지일보에 고정적인 칼럼을 쓰고 있다는 인연으로 함께 저녁식사를 하면서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지난 1979년 북한군 부소대장으로 근무하던 중 서부전선을 통해 귀순한 안찬일 소장은 남한 사회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탈북자 1호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고 교수까지 한 성공한 탈북자 출신이다. 스포
박종윤 소설가 학자들이 모여 서서 동방삭을 빈정대는 자리에 마침 그가 지나갔다. 학자들은 삭에게 말했다. 옛날에 언변으로 출세한 장의와 소진의 예를 들며 아직도 한직에 머물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 물었다. 동방삭이 대답했다. “시대가 변하면 사람의 이치도 변하는 법이며 어지러운 시대에는 지략이나 언변을 가진 자들이 출세를 했으나 평화롭고 화목한 시대에는 그런 사람들은 의식을 해결하기도 어렵다. 그러나 학문에 정진하고 밤낮으로 자신을 수양하고 있으면 언젠가는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 “오늘날 선비들 중에는 조금도 신념을 굽히
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정태(鄭泰)는 개봉(開封) 출신으로 자를 공업(公業)이라 했다. AD 189년, 대장군 하진(何進)이 동탁(董卓)을 끌어들여 환관들을 죽이려고 했을 때 적극적으로 반대했다. 동탁이 권력을 장악하자 저항군이 일어났다. 동탁은 대신들을 소집하여 무력진압을 위한 대책을 상의했다. 정태는 국가를 통치하려면 무력보다 덕치가 중요하다고 반대했다. 동탁은 군대의 역할을 무시한다고 거세게 반발했다. 정태는 침착하게 무력사용이 무익하다는 10가지 주장을 펼쳤다. 첫째, 효산(崤山) 동쪽에서 기병하려는 각 세력은 연합하느라고
박종윤 소설가 대대적인 흉노 토벌을 위해 천리길 사막으로 나갔던 위청의 군대는 선우의 군대와 우연히 마주쳐 격전을 벌인다. 열세인 것을 판단한 선우는 정예 기병 수백 기만 데리고 포위망을 뚫고 도주를 한다. 뒤늦게 선우의 도주 사실을 알고 위청의 군대가 추격하지만 그를 잡지 못한다. 적의 머리와 포로를 합쳐 1만 9천의 전과를 올린 위청이 장안으로 개선했다. 곽거병은 우북평군으로 출전하여 흉노의 좌왕 군대와 싸웠다. 그 전과는 위청을 훨씬 웃돌았다. 개선한 그들에게 무제가 조서를 내렸다. “표기 장군 곽거병은 군을 지휘함에 있어 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