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전쟁은 생명을 건 투쟁이므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그러나 고대에는 낭만과 윤리도 있었다. BC 563년, 패권을 노리던 진(晋)과 초(楚) 사이의 전쟁이 벌어졌다. 초장 반당은 명궁 양유기와 함께 활을 쏘아 한 번에 갑옷 7벌을 꿰뚫고 공왕에게 자랑하며 걱정하지 말라고 큰소리쳤다. 공왕은 화를 내며 너희가 바로 나라의 수치이니, 내일 아침에 활을 쏘면 그것 때문에 죽을 것이라고 말했다. 진의 여기는 활로 달을 맞히고 진흙에 빠지는 꿈을 꾸었는데 해몽가가 초왕을 쏜 후에 너도 죽을 것이라고 말했다. 다음날 과연 여기가 공왕의 눈을 쏘아 맞혔다. 공왕이 양유기에게 화살 둘을 주어 여기를 쏘게 했다. 여기는 목에 활을 맞고 즉사했다. 양유기는 남은 화살을 들고 복명했다.

진장 극지는 3차례나 초왕을 보자마자 모두 투구를 벗고 도망쳤다. 초왕은 극지에게 활을 보내면서 극지의 부상을 염려했다. 극지는 초왕의 사신을 만나자 투구를 벗고 예를 올리며 군주의 명을 받들고 출전했으니 화살을 받을 수 없다고 사양했다. 한궐은 정백을 추격했지만 두 번이나 한 나라의 군주를 욕되게 하지는 못한다고 느슨하게 따라갔다. 부하가 정백을 사로잡겠다고 하자 군주의 몸에 상처를 입히지 말라고 말렸다. 당구는 정백의 전차병 석수에게 나보다 당신이 우수하니 군주와 함께 도망치라고 권한 후 전사했다. 양유기는 공왕의 말을 듣고 활을 쏘지 않았다. 숙산염이 양유기에게 나라를 위해서는 활을 쏘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양유기는 활 두 발을 쏘아 모두 적에게 적중시켰다. 진군은 추격을 멈추었다. 진의 난침은 초의 영윤 자중과 안면이 있었다. 난침은 군주의 허락을 받고 자중에게 술을 보냈다. 자중은 난침이 보낸 술을 마시고, 사신을 돌려보낸 후에 진격 명령을 내렸다.
이상의 사례에서 적에게도 군례를 지키는 무장들의 기풍을 엿볼 수 있다. 맹자는 진심장구 하에서 춘추시대에 의로운 전쟁은 없었지만, 동기나 결과가 조금 옳았던 경우는 있었다고 말했다. 정벌은 천자가 제후를 토벌하는 것을 가리킨다. 대등한 제후끼리는 정벌이라고 할 수 없다. 맹자가 말한 ‘정(征)’은 ‘정(正)’과 같은 뜻으로 ‘사(邪)’와 상대적인 개념이다. 구양수(歐陽脩)는 어느 한 쪽이 다른 한 쪽을 공격할 경우의 용어에 대해 이렇게 규정했다. ‘정’은 왕의 군대가 정의롭지 못한 세력을 공격한다는 의미이다. 춘추시대에는 제후들이 왕호를 사용할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왕사는 주왕실의 군대뿐이고 정의로운 전쟁은 주왕실의 통치질서를 어지럽힌 제후들을 응징하기 위해 일으킨 경우만을 가리킨다. 당연히 ‘정’이란 말도 제후가 사용할 수 없다. ‘벌(伐)’은 중앙정부가 지방을 응징하는 경우를 가리킨다. ‘토(討)’는 상대의 죄를 묻는다는 뜻이다. 유가의 질서관념에 따르면 ‘정’, ‘벌’, ‘토’는 정의라는 명분을 확보한 쪽이 그렇지 못한 쪽을 상대로 일으킨 군사작전을 가리킨다.

대치관계에서 벌어지는 여러 가지 용어도 다르다. ‘취(取)’는 공격하여 쉽게 얻은 경우, ‘극(克)’ 또는 ‘극(剋)’은 어렵게 얻은 경우를 가리킨다. 또 직접 항복한 경우는 ‘항(降)’이라 하고, 자신의 관할 지역을 들어서 항복하는 경우는 ‘부(附)’라고 한다. 배반하고 적에게 귀순하는 것은 ‘반(叛)’이라 하고, 하극상은 ‘반(反)’이라고 한다. 죽음에 대한 용어도 다르다. 나라와 공적인 일을 위해 죽는 것은 ‘사(死)’이고 사에 이르지 못한 죽음은 ‘살(殺)’이다. 또 큰 죄를 지고 죽는 것은 ‘주(誅)’라고 한다. 맹자가 춘추시대에 정의의 전쟁이 없었다고 한 말은 명분과 목적이라는 측면에서는 타당성이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이상의 사례처럼 전쟁 과정에서 예의를 준수한 것으로 미루어 반드시 옳다고 할 수는 없다. 이러한 전쟁에서의 예의는 오늘날의 시각에서 볼 때 유혈이 낭자한 한바탕의 희극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낭만과 예의가 사라져 이전투구를 펼치는 우리의 정치투쟁보다는 흐뭇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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