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삼국시대의 진등(陳登)은 광릉(廣陵) 출신으로 자를 원룡(元龍)이라고 했다. 충직한 마음, 고상한 인품, 진중한 대략을 지닌 그는 박학다식하고 다양한 기예까지 갖추었다. 25세에 효렴으로 추천돼 고향인 동양현(東陽縣)의 현장이 됐다. 몸을 상할 정도로 백성들을 돌보자 조조가 광릉태수로 발탁해 여포를 견제했다. 여포가 진등의 동생 3명을 인질로 화친을 요구했지만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더 강하게 압박했다. 여포의 부하 장홍(張弘)이 진등의 세 아우를 데리고 귀순했다. 여포를 제거한 후 복파장군이 된 진등은 강남의 호랑이 손책(孫策)을 넘보았다. 진등은 두 차례나 손책의 강공을 막아냈다. 진등이 임지로 돌아갈 때 그에게 감복한 백성들은 노약자를 업고 뒤따라왔다. 진등은 그들을 타일러 돌려보냈다.

진등은 39세에 죽었다. 어느날 갑자기 얼굴이 붉어지며 가슴에 통증이 생겨 음식을 먹지 못했다. 명의 화타(華陀)가 맥을 짚어보더니 위장에 벌레가 생겼다고 진단했다. 화타가 탕약 2되를 달여서 1되씩 마시게 했다. 잠시 후 3되나 되는 벌레를 토했다. 기생충에 감염됐던 것 같다. 진등은 고통스러워하다 곧 치유됐다. 화타는 20여일 후에 재발될 것이나 좋은 의사를 만나면 치료될 것이라고 말했다. 과연 진등의 병이 재발했으나 화타가 죽고 난 후라서 진등도 죽고 말았다. 손권이 동오를 차지하자 조조는 양자강을 바라보며 진등의 계책을 사용하지 않아 멧돼지에게 발톱과 이빨을 기르게 했다고 한탄했다. 조비는 진등의 공을 기려 그의 아들 진숙(陳肅)을 낭중으로 삼았다. 삼국지의 저자 진수(陳壽)는 영웅의 기개와 장사의 절개를 지닌 진등이 원대한 뜻을 실현하지 못했다고 한탄했다.

나중에 허사(許汜)와 유비(劉備)가 형주목 유표(劉表)와 함께 천하의 인물들을 품평했다. 허사가 말했다.
“진원룡은 강호를 넘나들던 사람으로 호기(豪氣)를 완전히 떨치지는 못했습니다.”

유비가 유표에게 허사의 견해가 옳은지 옳지 않은지 물었다. 유표가 말했다.

“그르다고 하자니 허사는 이름난 사람이라 헛된 말은 하지 않았을 것이고, 옳다고 하자니 진원룡의 명성이 천하에 자자하다네.”

유비가 허사에게 진등이 호기를 부렸다고 했는데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물었다. 허사가 눈치를 살피다가 대답했다.

“예전에 전란을 만나 하비를 지나가다 진원룡을 만났습니다. 그는 주인과 빈객의 예를 지키지 않았습니다. 오랫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기는 커다란 침대에 누워있었고, 저는 그 아래에 앉아 있었습니다.”
유비가 허사를 보며 한심한 것처럼 말했다.

“자네는 국사(國士)라는 명성을 얻은 사람이네. 지금 천하에 대란이 일어나 제왕은 거처할 곳이 없어서 떠돌고 있네. 국사라는 자네라면 집안일은 잊고 나라를 걱정하며 세상을 구할 뜻을 세워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도 전답이나 기웃거리고 집이나 사려고 다니며 사사로운 이익에 전념하지 않는가? 진등은 이렇다 할 견해도 없는 자네를 꺼렸을 뿐이네. 진등이 자네와 무슨 말을 하겠는가? 나 같으면 1백 척 누각에서 누워있고, 자네는 땅바닥에 앉혀놓았을 것이네. 침상의 위와 아래는 그래도 대접한 것이라네.”

유표가 크게 웃자 유비가 진원룡처럼 문무와 담략을 갖춘 인물은 하루아침에 구할 수 없다고 말했다. ‘구전문사’란 요즈음 말로 부동산 투기일 것이다. 삼국시대에 허씨 일족은 월단평으로 유명한 허소(許劭)와 허정(許靖) 등 인물품평으로 인기를 끈 명사들을 배출했다. 그러나 안목은 높았지만 행실은 옳지 않았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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