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운주사④] 편에 이어서만약 운주사의 석탑들이 밤하늘의 별자리를 땅에 구현해 놓은 하나의 천문도였다는 주장이 맞아떨어졌다면 이는 정말 우리나라의 역사, 문화, 종교사에 경종을 울릴만한 대 발견이었을 것이다. 예부터 하늘을 이 지상으로 항상 가까이 내리려고했던 우리 선조들의 민족성이 또 한 번 증명되는 일이 되니까 말이다.그런데 우리 선조들은 왜 그토록 하늘에 관심이 많았을까. ‘하늘의 별따기’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 ‘하늘 높은 줄 모른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하늘이 높고 말이 살찐다’ ‘하늘이
▶ [운주사③] 편에 이어서“옳고 그름보다 문화현상을 이해하는 맥락이 중요”운주사의 석탑들이 밤하늘의 별자리를 땅에 구현해놓은 하나의 천문도라는 주장이 제기되어 일대 파장을 몰고 온 적이 있었다. 1999년 4월에 방영된 KBS 역사스페셜 ‘새롭게 밝혀지는 운주사 천불천탑의 비밀’에서 운주사의 탑 배치가 일등성 별의 배치와 닮아있다는 주장을 펼쳤던 것이다. 이 같은 주장이 방송을 통해 알려진 후 운주사를 찾는 주말 관광객은 2천여 명에 달했고, 광주 전남 언론들이 앞 다투어 재차 보도할 만큼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하지만 같은 해 7
▶ [운주사③]편에 이어서신세계의 염원을 가득 담고 있는 와불을 만나려면 먼저 와불보다 10m 아래쯤에 우두커니 서있는 시위불(머슴불)을 만나야 한다. 지그시 눈을 감고 정숙을 엄하게 알리는 이 돌부처는 도선 국사 설화에서 새벽닭 우는 소리를 낸 동자승이 벌을 받아 변한 불상이란 설화를 가지고 있다. 또 와불에서 떼어낸 바위의 일부로 만들어졌다고도 한다.999번째, 1000번째 불상으로 번호매김이 된 이 와불은 남불 12.7m, 여불 10.3m의 높이로 암반에서 떼어내어 세웠다면 엄청난 높이를 자랑했을 것이다. 와불의 본 의미는 ‘
▶ [운주사①] 편에 이어서운주사는 황석영의 소설 ‘장길산’에서 길산이 새 세상을 꿈꾸며 천불천탑을 세우려다 실패한 장소로 묘사되며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그 후에도 수많은 소설과 시에서 새 세상의 염원을 간직한 장소로 그려왔다. 실제 1980년 5월 광주민주항쟁 직후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운주사에서 울분을 삭이기도 했다. 운주사의 돌부처들은 불평등하고 좌절된 현실에서 고통받는 이들을 말없이 위로해주었다.역사문헌에서는 운주사를 어떻게 기록하고 있을까. 조선 중종 25년(1530년)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천불산은 능성현
종교 특히 기독교와 문화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명화가 그러하고, 클래식과 같은 고전음악이나 오페라도 무관하지 않다. 르네상스시대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천재적 미술가이자 과학자인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이나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는 기독교의 경서인 성경에서 그 모티브를 따온 것으로 당시의 시대상이나 문화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당대의 내로라하는 예술가들이 한 번쯤은 담아내고 싶은 기독교의 역사. 여기 성경 속 인물과 사건을 다룬 작가들의 작품
발해가 아닌 대진이라고? 우리는 고구려 후예였던 대조영이 고구려의 맥을 이어 발해를 세운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발해라는 국호는 당에서 내린 칭호요, 대조영은 이 칭호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국호에 대해 조금 더 알아보자. 사실 대진의 역사가 다양하게 해석되고 국호가 명확하게 정립되지 못한 이유는 대진이 남긴 기록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다만 중국과 러시아, 일본이 각각 자국을 중심으로 정리한 대진사가 우리에게 알려졌을 뿐이다. 심지어 중국에서는 ‘발해’라는 국호를 당으로부터 받았고 이뿐만이 아니라 발해는 당나라의 지방정권이라고
태백일사는 우리나라의 시원부터 고려까지 많은 분량의 역사를 담고 있다. 특히 삼국 가운데 백제와 신라보다 고구려사를 중점적으로 소개한 것이 특징이다. 이는 (고)조선의 명맥을 이은 적통 국가임을 알리고 싶은 저자의 바람이 아닐까. 이번 ‘태백일사2’에서는 지난 호에 이어 태백일사 중 고구려국본기, 대진국본기를 소개하고자 한다. 고주몽의 아버지는 해모수가 맞다, 아니다? 이는 우리가 알고 있는 고구려 건국 이야기다. 그러나 환단고기의 북부여기와 고구려국본기에 따르면 고주몽의 아버지는 해모수가 아닌 불리지다.다만, 고주몽의 조상이 해모
음력 4월 8일(양력 5월 17일), 석가탄신일 2557돌을 맞아 거리 곳곳에 형형색색의 연등이 걸려 있다. 다종교 국가인 대한민국에서 불교는 전통문화에 고스란히 담겼다. 하나의 종교이자, 한국을 대표하는 전통문화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21세기 불교가 어떻게 대중과 호흡하는지 그 모습을 살펴보자.이제 더는 템플스테이가 낯설지 않다. 푸른 눈의 서양인이 공양드리는 모습도 새롭지 않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이 열린 해에 생긴 템플스테이가 널리 알려지면서, 사찰 체험문화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다른 종교에서 신앙하는 이들에게도 템플스
삼국사기는 다른 사서와 다르다. 이 역사서엔 가뭄, 기상, 지각변동, 지진, 홍수 등의 자연현상과 지역 특산물까지 모두 기술되어 있다. 지역에서 보이는 별자리까지 기록돼 그 세밀함에 혀를 내두른다.오재성 선생은 “삼국사기에 기록된 민속으로 현재 우리나라부터 중앙아시아까지 설명할 수 있다. 아니 그 시대의 지역을 가늠해볼 수 있다”며 “음력 8월 15일이 우리에겐 한가위이지만 이와 비슷한 개념인 명절이 아시아 전 지역에 퍼졌다. 이는 과연 무엇을 뜻하는가”라고 의문을 제기했다.그는 “지각변동과 관련해 한반도 내에선 신라와 백제가 같은
◆이 시대의 멘토가 되다“옛날에는 강연을 정말 많이 했어요. 갓피플 조한상 대표가 저와 이야기를 몇 번 나누더니 젊은이들에게 멘토가 되어달라는 거예요. 그래서 3시간 씩 5일을 강의했어요. 50명 정도 되는 청년들을 매끼 밥을 사주면서 말이죠. 1박 2일은 MT를 갔어요. 그곳에서 아이들과 진솔한 대화를 나누게 됐죠. 이 과정에서 나온 게 라는 책이에요. 그 책으로 제가 기독교 쪽에서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어요.”목사에서 카페 마담이 된 그의 독특한 이력과 기독교 정신을 근간으로 세워진 카페 민들
물, 산 그리고 인심이 맑아 3청(淸)의 고장이라 불리는 청도는 지명이 가진 의미처럼 수천 년의 역사 속에서 정신문화의 뿌리 역할을 감당해온 곳이기도 하다.맑을 청(淸)에 길 도(道)를 써서 ‘맑은 길’이라 불리는 청도의 지명에서도 중요한 통로 역할을 했던 고장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그것이 물건이었는지, 정신이었는지, 아니면 둘 다인지는 역사가 말해줄 터.김경우 풍수지리가는 풍수지리학적으로 청도를 ‘정신문화의 시작점’이라 말한다.“청도의 상황과 이 지역이 갖고 있는 기운을 보자면 ‘청’은 아무 색깔이 없는 ‘처음, 시작’을 의미하고
◆ “청도가 좋은 걸 어찌합니까” 국내에 이런 곳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신기한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도로를 따라, 밭두렁에도, 나지막한 언덕 끝까지 울퉁불퉁 못생긴 나무들이 분홍빛 하얀빛 꽃들을 피우고 있다.경상북도 최남단 청도의 가로수에는 은행나무도 아니고 플라타너스도 아닌 과실나무가 많이 쓰인다.완연한 가을에 우연히 이곳을 지나다 청도의 매력에 빠져 정착하게 됐다는 배명식 목사는 “탐스럽게 익은 주홍빛 감이 지천을 물들인 청도의 모습은 ‘무릉도원’이 따로 없었다”고 말한다. 청도 출신 이승무 (사)한국미술협회 청도지부장은 “
4월 12일(음력 3월 3일)은 강남(동남아)에서 겨울을 보낸 제비들이 찾아온다고 하는 삼월삼짇날이다. 추운 겨울을 보낸 사람들의 눈에 지지배배 거리며 훨, 훨 날아다니는 제비는 얼마나 반가울 것인가? 하지만 우리 조상들은 제비가 봄을 부르는 길조(吉鳥)임에도 불구하고 그해에 제비를 처음 볼 때 ‘제비다’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우선 ‘문둥이’ ‘연자(燕子) 새끼’ 등의 비속어(卑俗語)로 부르며 일단 경계를 하였는데(일명 제비보고 말하기), 그 밑바탕에는 좋은 것에는 액운(厄運)이 따라올 수 있다는 생각이 있었다. 호사다마(好事多魔)
◆한민족의 문화는 머리에서부터“우리 한민족(韓民族)은 머리에서부터 모든 문화가 이뤄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여. 일생을 살아가면서 공식적으로 바뀌는 머리가 세 번이야. 미혼일 때 댕기머리, 혼인하면 상투 틀고 쪽머리를 하잖아. 저승 갈 때 또 머리가 바뀌어. 염할 때 머리를 풀잖아. 그렇게 저승 가는 머리가 따로 있다는 거지.”이 명인은 한민족에게서 두발문화를 빼고 나면 다른 문화가 없다며, 머리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했다.“일제가 우리 민족을 일본화하려고 애썼지만 정신까지는 잘 안 됐잖아. 그래서 가만히 보니까 한국은 ‘상투만 자르면
예로부터 우리네 선조들은 머리카락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신체발부수지부모(身體髮膚受之父母)’라 하여 부모님께 물려받은 몸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 효도의 시작이기도 하거니와 머리를 보호해야 할 소중한 곳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상투를 틀고 갓을 쓴다든가, 머리를 곱게 땋아 댕기를 묶고, 정갈하게 틀어 올려 쪽진 머리를 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볼 수 있다.무형문화재 제42호 목소장(木梳匠) 치산(治山) 이상근 명인은 전통 얼레빗을 만드는 장인이다. 대수로 따지면 공조집안에서 7대째이자 얼레빗만으로는 3대째 가업을 이어오고 있는 이상근
평화는 어떻게 오는 것인가오늘도 그 답을 찾아 떠난다동족상잔의 비극은 남북한뿐 아니라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UN 16개국 590만여 명 모두에게 고스란히 안겨줬다. 다른 민족 역시 이별, 이산, 전쟁의 트라우마의 고통 속에서 살아갔던 것이다. 이 작가는 사진을 통해 이같이 잊혀져가는 참전용사들의 역사를 남기고 싶었다.쉬운 일은 아니지만, 포기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무엇보다 부모님께 못 다한 효를 대신한다는 마음으로 참전용사 한 분 한 분을 대하는 그의 태도가 그를 더욱 이 일에 매진하게 한다.누구보다 전쟁의 상처를 생생하게 보고
에티오피아로, 터키로“찾아와줘서 고맙다”는 말의 무게감2007년 이 작가는 10년 동안 참전용사들의 사진을 찍겠노라고 결심했다. 우리나라에서 일어나는 일만이 아니라 외부에도 가치 있고, 은혜를 갚아야 하는 대상이 있을 것이란 확신이 들어서였다. 그래서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21개국 중 먼저 에티오피아와 터키를 방문하게 됐다.에티오피아는 6·25전쟁이 발발하기 전부터 한국의 자유와 평화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던 나라다. 에티오피아 정부가 이탈리아의 무력 침공을 받아 국제사회에 구원 요청을 했을 때 외면을 당했던 아픔을 겪었던지라 자국의
특별한 사진작가를 만났다. 인터뷰를 하러 처음 만났을 때부터 심상치가 않았다. 옆집 아저씨 같은 친근한 이미지를 풍기면서도 몸빼바지 같기도 하고 한복바지 같기도 한 특이한 바지를 입고 있었기 때문.“한복을 즐겨 입으세요?”라고 물었더니 “돌아가신 어머니 바지예요. 엄마 바지를 입고 있으면 조금이나 엄마의 체취를 느낄 수 있을 것 같아서요”라는 뜻밖의 답변이 돌아왔다.작가는 ‘개인, 가족 그리고 생이별의 슬픔’과 같은 보편적인 가치에 대해 관심이 많다. 마치 모친의 숨결을 잊지 못해 그녀의 바지를 입고 있었던 것처럼.그런 그의 마음에
언제부터일까. 1990년대 말 남성 듀오 클론이 ‘쿵따리 샤바라’로 대만에서 큰 인기를 얻은 이후 H.O.T., 젝스키스, 신화 등 아이돌 그룹 중심으로 중국과 일본 대중음악계에 한류바람이 불었다. 이때만 하더라도 제이팝(J-POP, 일본 대중음악) 시장이 미국 다음으로 컸기 때문에 갑작스레 수직 상승한 한국 대중음악-당시 ‘케이팝’이란 단어는 생소했다-의 인기는 얼떨떨했다.하지만 그와 동시에 해외진출은 곧 불어닥칠 음반시장의 불황을 극복하는 방책으로 떠올랐다. 그래서 대형기획사들 중심으로 해외진출을 염두에 둔 가수들이 양성됐다.
통섭이야말로 걸작이다역사와 만난 작품, 127만여 세계인의 마음속으로이종상 교수는 작품을 완성하기까지 끊임없이 그 작품에 빠져든다. 그림 대상과 물아일체가 되어야지만 작품이 오롯이 가치를 발한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는 그다. 오죽하면 원효대사를 그리기 위해 기신론까지 공부했을까. 이를 인연으로 급기야 동국대학교 동양철학과에 학사로 편입한 뒤 박사 학위까지 받았다. 현상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근원과 원리를 알아내는 습관이 배어있는 이 교수였기에 가능한 것이다.“미시적인 것은 거시적인 것과 하나입니다. 마치 나무 한 그루가 숲의 일부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