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사진 이의준 왕릉답사가경기도 화성의 융건릉에는 두 개의 합장릉이 있는데 추존 장조(사도세자)·헌경왕후(혜경궁)의 ‘융릉’과, 아들 정조·효의왕후의 ‘건릉’이다. 영조의 첫아들 효장세자가 9살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떴고 7년이 지나 영빈 이씨가 사도세자를 낳았다. 왕실의 경사였다. 세자 또한 아들을 보니 정조였다. 그러나 세자는 1762년 윤5월 임오화변으로 27세에 아버지에 의해 뒤주에 갇혀 죽고 말았다. 영조는 사도세자라 칭했고 배봉산(현 서울 동대문구)에 묘를 조성하고 수은묘(垂恩墓)라 했다. 1776년 정조가 즉위해 아버지
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북송 흠종 시기에 금군이 남하하여 동경 개봉부를 포위했다. 조구는 인질이 되어 금군의 병영으로 갔다. 여진인들은 그가 진짜 왕이라고 믿지 않았다.당연히 그를 돌려보내고 인질을 바꾸라고 요구했다. 강왕은 잽싸게 도망쳤다. 언제 여진인의 생각이 바뀔지 모른다. 다급하게 도망치던 그는 길가에서 주인이 없는 말을 발견했다. 말을 타고 강을 건너려고 하는데 말이 움직이지 않았다. 자세히 보니 진흙으로 만든 가짜 말이었다. 강왕이 진흙으로 만든 말을 타고 강을 건넜다는 전설은 관이 비었다는 전설과 잘 어울리는 황당한 스토
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이종의 영목릉이 가장 먼저 도굴되었다. 도굴꾼은 봉토를 허물고 지하궁을 파헤쳤다. 관곽을 끌어내어 뚜껑을 여는 순간 하얀 기운이 하늘로 치솟았다. 오랜 세월 묻혔던 주옥이 빛을 발휘한 것이다. 물론 과장된 소문일 것이다. 그러나 더 믿을 수 없는 것은 이종 조윤의 시신이 눈을 감고 잠자는 것과 같았다는 소문이다.베개는 칠보로 장식했고, 침상에는 호피(虎皮)가 깔려 있었다고 한다. 다리 곁에는 당(唐)의 경국지색 양귀비가 연주하던 천운금(穿雲琴)도 있었다. 연주하면 구름이 몰려와 휘감는다는 명품이다. 관의 네 모
글·사진 이의준 왕릉답사가고양 서오릉은 숙종과 그 부인, 며느리들이 함께 묻혀있다. 숙종과 인현왕후, 인원왕후(명릉), 인경왕후(익릉), 희빈 장씨(대빈묘)와 두 며느리 영조의 정비 정성왕후(홍릉), 영조의 후궁이자 사도세자의 사친 정빈 이씨(수경원)가 능역에 자리하고 있다. 이처럼 동일구역 왕릉에 4명의 부인과 더불어 며느리까지 모여 있는 경우는 유일하다. 숙종은 4명의 왕비, 46년 재위, 초강력 왕권, 왕비와 집권세력 교체 등 다양한 모습을 가진 왕이다. 왕비를 폐하고 죽이고, 송시열과 같은 거물들을 일거에 처형하는 등 조변석
글·사진 이의준 왕릉답사가 구리 동구릉에 들어서면 왼쪽 끝자락에 조선 제18대 현종과 명성왕후 김씨의 숭릉이 있다. 1674년 현종의 숭릉이 조성됐고 1684년 명성왕후가 옆에 묻혀 쌍릉이 됐다. 현종은 1641(인조 19)년 아버지 봉림대군(훗날 효종)과 어머니 장씨(훗날 인선왕후) 사이에서 태어난 외아들이다. 아버지 효종이 청나라에 볼모로 가있을 때 심양관사에서 태어나 조선왕 유일한 외국 태생이다. 명성왕후 김씨(고종은 명성왕후 민씨)와 결혼했으며 계비나 후궁이 없는 유일한 왕이었다. 조선의 가장 정통성을 지닌 왕이 되어 15년
글·사진 이의준 왕릉답사가 구리시 동구릉의 휘릉은 조선 16대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 조씨의 능이다. 첫 왕비 인열왕후가 1635년 김포 장릉에 묻히고 인조가 1645년에 승하하니 함께 합장했다. 인조는 병자호란이 끝나고 1637년 12살의 장렬왕후 조씨(양주인 한원부원군 조창원과 완산부부인 최씨의 딸)를 계비로 맞이했다. 29세나 어린 왕후였다. 그러나 장렬왕후는 자식이 없었고 후궁 조씨에 밀려 별다른 존재감이 없었다. 인조에서 숙종까지 4대에 걸쳐 왕후, 대비와 대왕대비를 지냈고 1688(숙종 14)년에 세상을 뜨니 동구릉 휘릉에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고종황제와 명성황후의 생활공간이던 경복궁 건청궁이 특별 개방된다.14일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는 15일부터 9월 18일까지 경복궁 내 건청궁을 특별 개방하고 당시의 궁중 생활상을 볼 수 있는 전시회도 함께 개최한다.건청궁은 1873(고종 10)년에 사대부 주택 양식으로 건립됐고, 1887년 대한민국 최초로 전기를 생산해 전등을 밝힌 곳이다. 1885년부터 1896년까지 고종과 명성황후의 생활공간이자 조선의 여러 정책이 결정되는 중요한 장소로 사용됐다. 명성황후가 일본군에 의해 시해된 을미사변이 일어난 장소이기
글ㆍ사진 이의준 왕릉답사가연산군묘는 비각이나 공덕비조차 없는 백성의 묘와 다르지 않다. 연산군은 외롭고 의지할 곳 없는 황량한 벌판에 서야 했다. 왕비인 어머니가 사사된 왕실 최대의 비극을 안고 자랐다. 왕세자 신분이지만 따뜻한 칭찬이나 위로를 받지 못했다. 이러한 ‘결손’이 훗날 큰 화근이 될 줄 누가 알았던 가. 연산군은 1506년 폐위되자 강화로 유배돼 3개월 만에 죽었다. 일반 묘에 묻혀 제대로 돌보는 사람조차 없었으니 10년이 지나 부인 신씨가 청해 외할아버지 임영대군(세종의 4남)의 땅으로 옮겨졌다. 1537년 군부인 신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조선시대 한양 여성들의 일과 삶을 담은 전시가 마련됐다. 5일 서울역사박물관은 서울역사문화특별전 ‘한양 여성, 문 밖을 나서다-일하는 여성들’을 이날부터 10월 3일까지 기획전시실에서 개최한다고 밝혔다. 이번 전시는 조선시대 한양도성 안팎에서 활동한 왕비부터 궁녀, 의녀, 무녀까지 다양한 계층 여성의 일과 삶에 대해 살펴볼 수 있는 전시이다.전시는 한양 여성의 활동 공간에 따라 3개로 구분했다. ‘1부 규문 안에서’ ‘2부, 도성 안에서 일하다’ ‘3부, 염원하다’로 구성돼 있으며, 각 공간은 대문과 성문
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역사에 가정이 없다고는 하지만 만약에 이러한 제안이 수용돼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성직자(聖職者)를 동행해 귀국(歸國)했다면 인조(仁祖)를 비롯한 조정(朝廷)에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을 것이며, 이는 실로 역사적인 대사건이라 아니할 수 없는데 이것은 조선에 천주교회(天主敎會)가 공식적으로 조직되기 139년 전에 있었던 일이었다.그래서 아담 샬 신부가 성직자 동행 대신 신자 출신의 환관((宦官)과 궁녀(宮女)들을 파견하기에 이르렀는데 안타깝게도 소현세자가 귀국한 지 불과 2개월만에 창경궁(昌慶宮) 환경전(歡慶殿)
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1644(인조 22)년 베이징(北京)에는 독일인 출신 예수회 사제 아담 샬 신부가 남천주당(南天主堂)에 머물면서 포교활동(布敎活動)을 하고 있었다.이러한 상황에서 베이징(北京)의 관소(館所)인 문연각(文淵閣)에 머물고 있던 소현세자는 남천주당에 있던 아담 샬 신부(神父)를 만나게 됐다.그런데 이러한 만남이 소현세자가 서구문물(西歐文物)을 비롯해 천주교(天主敎)를 접할 수 있는 새로운 계기가 됐다는 점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사실 기간으로 볼 때 소현세자와 아담 샬 신부와의 만남은 불과 2개월 정도밖에 되지
글ㆍ사진 이의준 왕릉답사가 강원도 영월의 장릉은 조선 제6대 단종 대왕의 무덤이다. 서울 경복궁에서 500리 떨어진 영월에 어찌 왕의 무덤이 있는가. 왕릉은 궁궐에서 반나절 행차의 거리에 조성한다. 그러니 장릉은 애초 왕릉 자리가 아니었다. 단종이 왕위를 빼앗기고 영월 유배에서 죽음에 이르렀지만, 시신조차 거두지 않았다. 영월의 호장 엄홍도가 몰래 아들들과 단종의 시신을 거둬 땅에 묻었다. 그리고 오랜 세월 내팽개쳐졌다. 241년이 지난 1698년 숙종 24년에 이르러 ‘장릉’이라는 능호를 정하자 비로소 왕릉이 됐다. 장릉은 조선왕
글ㆍ사진 이의준 왕릉답사가 현릉은 제5대 문종과 현덕왕후의 동원이강릉(같은 능역에 하나의 정자각을 두고 서로 다른 언덕에 각자 봉분을 둠)이다. 경기도 구리 동구릉에 태조 건원릉 이후 46년 만에 들어선 두 번째 능이다. 원래 문종 혼자 있었는데 나중에 왕후가 옮겨왔다. 1441년 세자빈 권씨(현덕왕후)가 아들(단종)을 낳고 이튿날 세상을 뜨자 경기 안산에 묻혔다. 그러나 문종은 1452년 승하해 현릉에 자리했다. 1456년 세조가 단종의 복위에 가담한 현덕왕후의 친정을 멸하고, 왕후도 폐한 후 무덤도 파헤쳐 버렸다. 그렇게 세월이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지금까지 알려진 가장 오래된 한글편지이자 훈민정음 반포의 실상을 알려주는 ‘나신걸 한글편지(羅臣傑 한글便紙)’가 보물로 지정됐다.9일 문화재청에 따르면 보물 ‘나신걸 한글편지’는 조선 초기 군관(軍官) 나신걸(羅臣傑, 1461~1524)이 아내 신창맹씨(新昌孟氏)에게 한글로 써서 보낸 편지 2장이다. 2011년 대전시 유성구 금고동에 있던 조선 시대 신창맹씨 묘안 피장자의 머리맡에서 여러 번 접힌 상태로 발견됐다.편지의 제작 시기는 내용 중 1470~1498년 동안 쓰인 함경도의 옛 지명인 ‘영안도(永安道)
글ㆍ사진 이의준 왕릉답사가 세종대왕 부부는 조선 왕실 처음 합장릉에 자리했다. 부부의 정과 서로의 역할도 출중했다. 세종의 처세는 달랐다. 인간적인 배려와 제도적 성과를 중시하며 덕치를 펼쳤다. 왕은 성실하고 꼼꼼하며 창의적이었다. 부왕이 추천한 인사를 끝까지 믿고 ‘의논’하며 정사를 돌봤다. 소헌왕후 또한 최고의 왕비로 평가되고 있다. 시아버지에 의해 친정아버지가 처형되고 어머니와 동생이 노비로 전락했으며 자신도 폐비가 될 뻔했지만 왕비의 자리를 굳건히 지키며 본분을 다했다. 왕과 왕비의 인품과 덕망이 궁내외의 백성에게 신뢰와 화
이호규 대중문화평론가(동아예술전문학교 예술학부 교수) 최근 한국영상자료원이 운영하는 ‘한국고전영화극장’ 유튜브 채널이 누적 조회수 3억회를 돌파했다. 영상자료원은 한국고전영화에 대한 문턱을 낮추고 가치를 재조명하기 위해 한국고전영화극장 채널을 개설하고 TV나 IPTV, OTT에서 보기 힘든 한국고전영화를 무료로 서비스하고 있다. 현재 공개된 영화는 200여편이며, 이미 구독자 80만명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이미 10여년 전에 한 포털사이트에서도 한국영상자료원과 공동으로 ‘트로이카 특별전’ 등을 상영하며 고전영화에 목마른 관객들을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훈민정음 반포의 생생한 실상이 담긴 ‘나신걸 한글편지’가 보불로 지정 예고됐다. 29일 문화재청은 지금까지 알려진 가장 오래된 한글편지이자 훈민정음 반포의 실상을 알려주는 ‘나신걸 한글편지’를 비롯해 ‘창녕 관룡사 목조지장보살삼존상 및 시왕상 일괄’ ‘서울 청룡사 비로자나불 삼신괘불도’ 등 조선 시대 불상과 불화를 포함한 총 3건에 대해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 예고했다고 밝혔다. ‘나신걸 한글편지’는 조선 초기 군관(軍官) 나신걸(羅臣傑, 1461~1524)이 아내 신창맹씨(新昌孟氏)에게 한글로 써서 보
42기의 조선왕릉 중 2기(제릉, 후릉)는 북한 개성에 있다. 이성계의 첫 부인 신의왕후 한씨와 2남 정종 부부의 무덤이다. 한씨는 남편(이성계)을 내조해 6남 2녀의 자식들과 인고의 세월을 보냈다. 젊은 경처 강씨의 뒷전에서 묵묵히 조강지처의 역할을 다했다. 아들 정종은 권력에 욕심을 부린 왕이 아니었다. 아버지 이성계를 따라 전투에 나서고 효성과 형제애를 보였다. 이처럼 나라와 가정의 초석을 세운 모자이지만 신의왕후는 신덕왕후에, 정종은 태종 이방원에 가려져 있었다. 하지만 세상은 뿌린 대로 거두는 법이다. 이들이 잠든 북한 개
김영복 전통식생활문화연구원 원장 우리 속담에 ‘떡 줄 사람은 꿈도 안 꾸는데 김칫국부터 마신다’는 말이 있다. 이 외에도 ‘떡방아 소리 듣고 김칫국 찾는다’ ‘앞집 떡 치는 소리 듣고 김칫국부터 마신다’라는 말도 있다.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 데, 지레 입맛 다시고 있는 것을 빗댄 말이다. 이 속담에서의 김칫국은 동치미의 국물을 뜻한다. 예전에는 떡이나 고구마 같은 물기가 없는 퍽퍽한 음식을 먹을 때는 동치미의 국물을 먹었던 것에서 나온 속담이다. ‘김칫국’은 가능성 없는 일에 품는 기대감, ‘김칫국 마시다’를 그런 기대감을 품는
식생활문화연구가 김영복 병(餠) 중에 찐 것을 증병(蒸餠), 구운 것을 소병(燒餠), 기름에 튀긴 것을 유병(油餠), 국물에 삶은 것을 탕병(湯餠)이라고 불렀다. 증병(蒸餠)은 취병(炊餠)으로 부르기도 했다. 송(宋)대 조언위(趙彦衛)는 ‘운록만초(雲麓漫抄)’ 권2에 “이여인종어명동음(以與仁宗御名同音) 인종(仁宗)의 이름과 발음이 같았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송 인종의 이름은 조정(趙禎)이다. ‘청상잡기(靑箱雜記)’ 권2에는 “인종의 묘휘(廟諱)인 ‘정(禎)’을 자칫 잘못 발음하면 증(蒸)과 비슷해 지금 내정(內庭)의 상하에서 모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