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역사에 가정이 없다고는 하지만 만약에 이러한 제안이 수용돼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성직자(聖職者)를 동행해 귀국(歸國)했다면 인조(仁祖)를 비롯한 조정(朝廷)에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을 것이며, 이는 실로 역사적인 대사건이라 아니할 수 없는데 이것은 조선에 천주교회(天主敎會)가 공식적으로 조직되기 139년 전에 있었던 일이었다.

그래서 아담 샬 신부가 성직자 동행 대신 신자 출신의 환관((宦官)과 궁녀(宮女)들을 파견하기에 이르렀는데 안타깝게도 소현세자가 귀국한 지 불과 2개월만에 창경궁(昌慶宮) 환경전(歡慶殿)에서 향년(享年) 34세를 일기(一期)로 급서(急逝)함으로써 천주교에 대한 소현세자의 계획이 좌절됐으니, 수백년의 세월이 지난 오늘날에 뒤돌아 봐도 참으로 안타까운 순간이었다.

소현세자가 정상적으로 왕위를 계승했다면 당시 조선의 정세뿐만 아니라 천주교에도 중대한 분수령(分水嶺)이 됐을 것으로 생각되나, 소현세자가 그 웅대한 포부를 펼치지 못한 채 급서하면서 그의 모든 꿈은 좌절되고 말았다.

현재 소현세자의 생애를 자세히 알 수 있는 공식적인 기록은 택당(澤堂) 이식(李植)이 후세에 남긴 ‘묘지(墓誌)’가 유일하다고 볼 수 있다.

필자(筆者)는 사실 한 나라의 왕세자(王世子)였던 고귀한 신분이었기에 행장(行狀)이 남아 있지 않을까? 짐작하고 자료조사를 하였으나 끝내 찾지를 못하였으나 그나마 ‘묘지(墓誌)’라도 찾아서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른다.

소현세자는 강빈(姜嬪)과의 사이에 3남 5녀를 두었으나 2명의 군주(郡主)는 요절(夭折)했는데, 구체적으로 장남(長男)이 경선군(慶善君), 차남(次男)이 경완군(慶完君), 삼남(三男)이 경안군(慶安君)이다.

또한 장녀(長女) 경숙군주(慶淑郡主)는 능창부위(綾昌副尉) 구봉장(具鳳章), 차녀(次女) 경녕군주(慶寧郡主)는 금창부위(錦昌副尉) 박태정(朴泰定), 삼녀(三女) 경순군주(慶順郡主)는 황창부위(黃昌副尉) 변광보(邊光輔)에게 각각 하가(下嫁)했다.

이와 관련해 경선군을 비롯한 3형제는 1646(인조 24)년 강빈이 사사(賜死)된 이후 연좌(連坐)돼 제주도로 유배(流配)됐는데, 경선군과 경완군은 배소(配所)에서 세상을 떠났으나 경안군은 효종(孝宗)이 즉위(卽位)한 이후 강화도로 배소(配所)를 이배(移配)했다가 그 이후 해배(解配)되면서 소현세자의 대(代)가 단절되지 않았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른다.

그러나 소현세자의 증손(曾孫) 밀풍군(密豊君)이 1728(영조 4)년에 발생한 무신란(戊申亂) 때 왕(王)으로 추대(推戴)된 일로 인해 결국 세상을 떠나는 불행을 겪었으며, 그 이후에도 후손(後孫)들이 여러 사건에 연루되어 화(禍)를 입는 등 불행이 계속됐다.

그러한 영향으로 소현세자의 후손들이 번창(繁昌)하지 못했지만, 그 명맥(命脈)이나마 유지되고 있는 것을 위안으로 삼는다.

이상과 같이 소현세자의 생애(生涯)를 7회에 걸쳐서 연재했는데, 본 칼럼을 통해 소현세자가 널리 알려지고 그 후손들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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