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소헌왕후의 여주 영릉②

세종 부부, 정과 서로의 역할 출중
세종, 배려와 성과 중시하며 덕치
최고의 왕비 ‘소헌왕후’ 온화‧엄정
왕과 왕비 덕망이 백성에 신뢰 줘

이의준 왕릉답사가
이의준 왕릉답사가

글ㆍ사진 이의준 왕릉답사가 

세종대왕 부부는 조선 왕실 처음 합장릉에 자리했다. 부부의 정과 서로의 역할도 출중했다. 세종의 처세는 달랐다. 인간적인 배려와 제도적 성과를 중시하며 덕치를 펼쳤다. 왕은 성실하고 꼼꼼하며 창의적이었다. 부왕이 추천한 인사를 끝까지 믿고 ‘의논’하며 정사를 돌봤다. 소헌왕후 또한 최고의 왕비로 평가되고 있다. 시아버지에 의해 친정아버지가 처형되고 어머니와 동생이 노비로 전락했으며 자신도 폐비가 될 뻔했지만 왕비의 자리를 굳건히 지키며 본분을 다했다. 왕과 왕비의 인품과 덕망이 궁내외의 백성에게 신뢰와 화평을 가져다 줬다.  

◆화평 돋보인 세종대왕 부부 

1450년 세종이 세상을 떴다. 4년 전 먼저 떠난 왕후의 곁에 모셔졌다. 서로 존중하고 화목한 부부였다. 왕후는 성격이 부드럽고 온화했으며 기강은 엄정했다. 왕비의 친정이 멸문당했으나 남편 세종을 성군으로 만들고 자신도 조선 왕비의 ‘롤 모델(role model)’로서 존경받았다. 세종은 9명의 후궁이 있었다. 왕후는 세종이 총애하는 후궁을 잘해줬다. 또한 질투하지 않아 시아버지 태종은 물론 남편 세종도 칭송했다고 한다. 후궁들을 믿고 자신의 자녀들의 양육을 맡기기도 했다. 막내 영응대군은 신빈에게, 6남 금성대군은 태종 후궁 의빈에게, 손녀 경혜공주와 손자 단종은 혜빈에게 맡겼다. 

세종대왕과 소헌왕후의 여주 ‘영릉’. 하나의 봉분 앞에 두 개의 혼유석이 나란히 놓여 있어 왕과 왕비가 함께 잠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곳의 석물은 여주로 천장하면서 새로이 만들어 세운 것이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2.28.
세종대왕과 소헌왕후의 여주 ‘영릉’. 하나의 봉분 앞에 두 개의 혼유석이 나란히 놓여 있어 왕과 왕비가 함께 잠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곳의 석물은 여주로 천장하면서 새로이 만들어 세운 것이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2.28.

하지만 엄한 면도 있었다. 세종 21(1439)년 넷째 임영대군이 궁녀들과 사통한 사건이 발각되자 세종이 관련자들을 벌주고 임영대군의 직첩도 빼앗도록 했다. 맏아들(문종)의 세자빈 휘빈 김씨와 순빈 봉씨의 잘못된 행동도 왕후에 보고돼 폐출됐다. 상황판단도 뛰어났다. 세종 8년 2월 15일 세종이 바깥에 나간 사이 불이 났다. 실록에는 “한성부 남쪽에서 불이 나 경시서(시장을 관리하는 관서) 및 행랑 1백 16간과 인가 2170호가 불탔고 32명이 죽었다. 중궁(왕비)은 궁궐 내 대신과 백관에게 ‘돈과 식량 창고는 포기해도 종묘와 창덕궁은 힘을 다하여 구하라’고 했다”고 기록돼 있다. 이로써 종묘는 보전됐다. 왕비로서 발만 구르기보다 상황 파악과 대처방안을 명확히 한 것이다. 

영릉 입구에는 세종대왕 동상과 각종 발명품이 전시돼 있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2.28.
영릉 입구에는 세종대왕 동상과 각종 발명품이 전시돼 있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2.28.

◆소헌왕후, 모두가 극찬한 ‘최고의 왕비’ 

1444년 그토록 의지하던 왕후의 친정어머니 안씨가 세상을 떴고, 1445년 한해에 5남 광평대군과 7남 평원대군이 각각 20세와 17세의 나이에 연이어 죽었다. 왕후는 크게 슬퍼했다. 왕후도 건강이 악화돼 이듬해 1446년 세상을 뜨고 말았다. 모두가 애통해했다. 6월 6일 예조 판서 정인지의 영릉지문은 “후는 인자하고 검소하다. 엄숙하고 뜻이 맞고 정다운 아름다움을 이루었다. 왕후가 나아오고 물러갈 때에 전하께서 반드시 일어서시니, 공경하고 예로 대하였다”고 했다. 또한 “전하께서 지극한 덕과 다스림으로 문왕(주나라)의 뒤를 따랐는데, 왕후께서 이 같은 덕과 행실이 있으니, 참으로 하늘이 지은 배합이 되어서 문왕의 후비가 예전에 아름다움을 독차지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여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자격루(물시계)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2.28.
자격루(물시계)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2.28.

◆세종, 다방면에서 업적 남겨

세종은 권한을 나누고 갈등이나 분쟁을 잠재웠다. 왕 직속의 육조를 의정부가 관리하는 의정부서사제로 바꿨다. 또한 세자(문종)가 서무를 결재하도록 했다. 집현전 학자를 양성하고 소장학자들에게 사가독서제(학문에 몰두하도록 휴가)를 시행했고 오례와 관혼상제의 정리를 추진했다. 1443년 훈민정음을 창제했고 세종이 친히 집현전에 편집하도록 하여 ‘훈민정음 해례본’을 만들었다. 최초의 천체관측기 혼천의, 앙부일구 등 해시계와 각종 물시계도 제작했다. 측우기의 발명과 도량형제도의 확립, 금속활자와 인쇄술의 완성, 4군 6진의 개척과 왜구진압, 화포의 개량과 발명, 농업서 ‘농사직설’과 의약서 ‘의방유취’ 등도 편찬했다. 직접 무형문화재 1호인 ‘정대업’ 등을 창제했다. 또한 역사, 유교, 윤리, 의례, 법률, 문학, 정치, 지리, 천문, 농서 등 다양한 분야의 편찬과 개발사업이 진행됐다. 세종은 매사에 아이디어뿐만 아니라 직접 참여했다. 그리고 사회 곳곳의 작은 부분도 제도적으로 살피기 시작했다. 

영릉의 재실. 영릉은 2014년부터 무려 6년에 걸쳐 세종대왕역사문화관과 향·어로 및 어구 정비, 재실 복원, 수목 식재 등 대대적인 작업을 완료해 원형을 회복했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2.28.
영릉의 재실. 영릉은 2014년부터 무려 6년에 걸쳐 세종대왕역사문화관과 향·어로 및 어구 정비, 재실 복원, 수목 식재 등 대대적인 작업을 완료해 원형을 회복했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2.28.

◆애민정신, 정책과 제도로 말하다

세종은 특히 백성을 살폈다. 법 적용을 신중히 하고 과한 형벌을 금했으며 고문할 때 등허리를 때리거나 사망하지 않도록 했고 사형은 삼심을 거치도록 했다. 어린이와 노인은 살인·강도죄만 옥에 가두고, 10세 이하 80세 이상인 자는 이조차 금했다. 부모가 70세 이상인 노비 등 죄인은 부모 인근에 복역하도록 했다. 세쌍둥이를 낳은 사람에게 쌀 7석(약 1000킬로그램)을 하사했다. 세종 치세에 세쌍둥이를 낳은 일이 6번이나 있었다. 52년간 재위한 영조 때와 같았다. 100세 이상 노인에게 특별히 쌀 10석과 옷감을 내리기도 했다. 실록은 “충청도 덕산에 사는 1백살 된 노인 이사민에게 쌀과 술·고기를 내려 주었다”고 하며 세종 27년 3월 14일 “이어소 부근에 사는 60세 이상의 늙은 백성 6인에게 날마다 한 끼를 먹여주고, 5일마다 쌀과 간장과 어물을 하사하였다”고 돼 있다. 

영릉의 ‘구 재실’. 새로운 재실을 건립하면서 방문객을 위한 ‘작은 책방’으로 꾸며졌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2.28.
영릉의 ‘구 재실’. 새로운 재실을 건립하면서 방문객을 위한 ‘작은 책방’으로 꾸며졌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2.28.

◆일 잘하는 신료는 좀처럼 바꾸지 않아 

세종은 왕도정치를 실현하려 한 왕이다. 왕도정치는 임금과 신하가 조화를 이뤄 도덕과 순리로 다스리는 정치이다. 세종은 국정파트너를 매우 중히 여겼다. 누구라도 능력이 있으면 중히 쓰되 결코 가벼이 버리지 않았다. 세종은 공부와 일의 중독자와 같았다. 이러한 세종으로부터 벗어나려 안간힘을 쓴 영의정 이직과 황희의 이야기는 유명하다. 1425년 12월 10일 이직이 “신이 노쇠하여 우둔하니 젊고 덕 있는 자를 쓰소서”하니, 세종이 “바삐 뛰어다니고 체력이 요하지 않고 앉아서 도리를 논하는 일에 경이 아닌 누가 있겠소. 나를 근심하게 하지 말라”며 거절했다. 오히려 일이 많은 좌의정에 임명하기도 했다. 1427년 다시 “귀에 소리가 나고 막혀 잘 들리지 않고, 정신이 혼매하여 망각하고, 여러 병이 발작하여, 약도 효험이 없습니다”라고 하니 세종은 “듣기가 어렵지 다른 병은 없으니 일하라”며 윤허하지 않았다. 세종은 이직에게 날마다 소젖을 보내도록 했다. 

보물 제 1805호인 ‘세종 영릉 신도비 세종의 업적을 기리고자 1452(문종2)년에 세운 비석이다. 정인지가 짓고 이용이 글씨를 썼다. 옛 영릉 터에서 발견해 세종대왕기념관 야외에 비각을 지어 옮겼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2.28.
보물 제 1805호인 ‘세종 영릉 신도비 세종의 업적을 기리고자 1452(문종2)년에 세운 비석이다. 정인지가 짓고 이용이 글씨를 썼다. 옛 영릉 터에서 발견해 세종대왕기념관 야외에 비각을 지어 옮겼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2.28.

◆14번 사직 청한 정승에 “더 일하라”

황희는 18년 영의정에 있었으며 무려 14차례나 사직을 청했다. 처음에는 “귀 눈이 어둡고 제가 인원수만 채우고 있습니다” “허리 아프고 다리가 안 따르고 걸음마다 쓰러지려 합니다”라 했다. 세종은 윤허하지 않았다. 1436년 6월 2일에는 “오랜 종기로 피가 멎지 않고, 어지럼증이 더하여 생각이 흐리멍덩합니다”라고 했다. 그러나 세종은 오히려 “일 잘하고 업적도 잘 내고 있다. 내가 누구를 의지하겠는가. 경은 아직 80, 90세도 아니다. 병도 치료하고 약을 쓰면 될 것이다. 부족한 나를 도와 달라”고 했다. 결국 건강이 안 좋던 세종이 먼저 세상을 뜨고 말았다. 

‘구 영릉의 석물’은 무덤 자리에 묻혀 있었다. 545년이 지나 동대문구의 세종대왕기념관으로 이전해 보전하고 있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2.28.
‘구 영릉의 석물’은 무덤 자리에 묻혀 있었다. 545년이 지나 동대문구의 세종대왕기념관으로 이전해 보전하고 있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2.28.

세종의 인사 스타일은 종묘배향공신(조선시대 종묘에 종사된 공신)과 영의정 임명에도 나타난다. 세종은 임기 32년 동안 불과 6명의 영의정을 뒀다. 아버지 태종이 추천한 심온과 유정현을 제외한 세종의 실질적 임명은 4명에 불과했다. 30년 이상 오래 재위한 왕들의 영의정은 15~42명에 달한다. 하지만 종묘배향공신은 7명으로 가장 많다. 역성혁명을 일으킨 태조와 반정과 전쟁을 겪은 인조의 7명과 같다. 그만큼 세종을 위해 헌신한 신료가 많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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