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리 동구릉 휘릉, 제16대 인조의 장렬왕후 능
인조, 끝내 아버지를 추존 왕으로
병자호란으로 청에 무릎을 꿇어
장남 소현세자와 일가의 죽음
​​​​​​​후궁 조씨에 밀려난 장렬왕후

글·사진 이의준 왕릉답사가 

구리시 동구릉의 휘릉은 조선 16대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 조씨의 능이다. 첫 왕비 인열왕후가 1635년 김포 장릉에 묻히고 인조가 1645년에 승하하니 함께 합장했다. 인조는 병자호란이 끝나고 1637년 12살의 장렬왕후 조씨(양주인 한원부원군 조창원과 완산부부인 최씨의 딸)를 계비로 맞이했다. 29세나 어린 왕후였다. 그러나 장렬왕후는 자식이 없었고 후궁 조씨에 밀려 별다른 존재감이 없었다. 인조에서 숙종까지 4대에 걸쳐 왕후, 대비와 대왕대비를 지냈고 1688(숙종 14)년에 세상을 뜨니 동구릉 휘릉에 홀로 묻혔다. 왕의 사랑을 얻지 못한 왕후이자 실권 없는 대비였다. 죽어서도 남편 인조는 서쪽 장릉에, 장렬왕후는 동쪽 끝에 떨어져 있다. 늦가을의 쓸쓸함이 짙어지는 휘릉을 찾아가 본다.       

휘릉은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의 단릉이다. 동구릉 9개 중 가장 먼저 조성된 왕후의 능이다. 이후 경종 단의왕후의 혜릉이 들어섰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12.03.
휘릉은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의 단릉이다. 동구릉 9개 중 가장 먼저 조성된 왕후의 능이다. 이후 경종 단의왕후의 혜릉이 들어섰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12.03.

◆후금, 청나라로 이름 바꾸고 조선침략

인열왕후가 세상을 뜨고 두 달 후 1636년 2월 후금 사신이 태종의 존호를 알리고, 왕후의 문상을 하러 조선에 왔다. 사신은 군신의 예를 요구했고 조정은 “사신들을 가두어 배척하는 뜻을 보이라”는 상소를 올렸다. 사신이 화를 내고 돌아가자 29일 윤방이 아뢰기를 “사신이 성을 내고 갔으니, 오랑캐의 침략을 당할 것입니다”라고 했다. 인조는 철저한 전쟁대비를 명했다. 3월 7일 평안 감사에게 보내는 글을 후금 측이 가로챘는데 “화친을 끊고 오랑캐를 방비한다”는 내용이었다. 후금은 조선의 태도에 분노했다. 4월 후금은 ‘청’으로 이름을 바꾸고 11월 조선에 왕자와 대신 및 척화론 주장자를 압송하라 했다. 조선은 거부했다. 그러자 1636(병자)년 12월 1일 청이 쳐들어 왔다. ‘병자호란(丙子胡亂)’이다. 12월 13일 도원수 김자점이 “적병이 안주에 이르렀다”고 치계하고 적이 송도를 지나니 세자부부와 왕자들이 강화도로 피했다. 인조와 세자는 남한산성으로 갔다. 해가 바뀌어 1637년 1월 1일 청 태종의 20만의 군사가 남한산성을 포위했다. 40여일이 지나니 성안은 참혹했고 명나라 구원병도 오지 않았다. 결국 주화파와 주전파가 논쟁한 끝에 강화하기로 했다. 강화도도 함락됐으니 인조는 어쩔 수 없었다. 청과 군신관계로 전환하고 명과 관계를 끊으며 왕자를 볼모로 보내는 등 11조문에 합의했다. 1월 30일 인조는 세자와 함께 삼전도에서 청 황제에게 ‘삼배구고두례(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땅에 닿는 인사)’를 하며 충성을 표하고 궁궐로 돌아왔다.

휘릉은 홍살문에서 정자각으로 진입하는 향로와 어로의 양쪽에 제관이 걷는 변로(邊路)가 있다.(제공:이의준 왕릉답사가)ⓒ천지일보 2023.12.03.
휘릉은 홍살문에서 정자각으로 진입하는 향로와 어로의 양쪽에 제관이 걷는 변로(邊路)가 있다.(제공:이의준 왕릉답사가)ⓒ천지일보 2023.12.03.

◆허울뿐인 왕후의 외로운 나날

병자호란이 있기 전 인조의 정비인 인열왕후가 1635년 12월 9일 대군을 낳았으나 아기는 죽었고 왕후 또한 산실에서 별세하고 말았다. 4명의 왕자를 낳고 12년 왕비의 자리에 있었다. 상이 국장 도감에 하교했다. “인열왕후는 온순하고 정결하며, 정성과 효성이 지극했고 집을 다스리는 데 법도와 여훈(女訓)을 준행하였다. 내가 병들면 앉은 채로 밤을 새웠다. 정사에 간여하려 않고 친정의 일을 사사로이 말하지 않았다. 화려한 꾸밈새와 재산 모으기를 기뻐하지 않았다. 숙의 장씨를 예로써 대우하여 많은 물품을 내려주니 모두가 칭송하였다”고 하였다. 왕후가 죽고 내명부에는 후궁 조씨가 있었다. 1638(인조 16)년 8월 숙의 장씨가, 12월 계비로써 한원부원군 조창원의 딸 조씨(장렬왕후, 1624~1688)가 책봉됐다. 인조는 12월 4일 가례를 올리며 “덕망 있는 가문의 좋은 짝을 택하였다. 조씨를 책봉하여 왕비를 삼노라”고 했다. 하지만 장렬왕후는 자식이 없었고 건강도 안 좋았다. 후궁 조씨에 밀려 존재감이 없었다. 1645(인조 23)년 10월 9일 인조는 왕후를 경덕궁에 보내 지내도록 했다. 승지가 “하교가 뜻밖이니 모두 의혹을 가질 것입니다”라고 했으나 인조는 일축했다. 실록은 “왕후가 풍병을 앓았는데 후궁 조씨의 이간질로 왕과 별거했었다. 몰래 경덕궁 단명전을 수리하더니 임금이 이런 명을 내렸다”고 했다.

다른 왕릉과 달리 정자각의 정전 좌우로 3개의 기둥과 별도 공간인 ‘익랑’을 추가했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12.03.
다른 왕릉과 달리 정자각의 정전 좌우로 3개의 기둥과 별도 공간인 ‘익랑’을 추가했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12.03.

◆장남, 맏며느리, 그리고 손자들의 죽음

1645(인조 23)년 1월 소현세자가 청나라 인질에서 풀려나 돌아왔다. 그러나 4월 26일 갑자기 급서하고 말았다. 6월 27일 소현 세자의 졸곡제(卒哭祭)에 이르기를 “세자는 병이 난 지 수일 만에 죽었는데, 온 몸이 검었고 이목구비 일곱 구멍에서 선혈이 흘러, 멱목(얼굴덮개)을 반쯤 덮었으나 얼굴빛을 몰라보니 마치 독물로 죽은 사람 같았다”라고 했다. 1645년 윤6월 4일 봉림대군이 세자로 정해졌다. 이전부터 소현세자 부부와 후궁 조씨는 사이가 안 좋았다. 10월 2일 실록은 “숙원 조씨를 소의로 삼았다. 중전 및 장 숙의가 모두 사랑받지 못하고 소의만이 더더욱 총애를 받았다. 성품이 엉큼하고 교사스러워서 남을 모함하니 모두가 두려워했다. 소현세자 빈을 미워하여 참소와 이간질이 심했다”고 했다. 세자빈이 인조의 음식에 독을 넣었다고 모함하니 1646(인조 24)년 2월 3일 인조가 여전히 세자빈을 의심하고  처벌코자 했다. 최명길이 말렸으나 거절했고 결국 3월 강빈이 사사됐다. 형제들은 유배지로 보내졌다. 5월 13일 어린 손자 석철·석린·석견도 제주에 유배하니 이들은 12세, 8세, 4세였다. 1648년 9월 18일 큰 아들 석철이 죽었다. 인조는 소현세자의 곁에 묻어주라 했다. 사신은 “어린 아이들을 제주도로 귀양 보내어 죽게 하니, 그 유골을 아버지 곁에 장사지낸들 무슨 도움이 있겠는가. 슬플 뿐이다”라고 했다. 석 달 후 둘째가 병사했다. 셋째 석견은 홀로 남겨져 나중에 유배에서 풀려났고 결혼해 자식 둘을 낳았으나 21세에 죽고 말았다.

휘릉 능침이다. 병풍석은 생략하고 난간석이 설치돼 있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12.03.
휘릉 능침이다. 병풍석은 생략하고 난간석이 설치돼 있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12.03.

◆귀인 조씨의 득세와 종말

인조의 후궁 4명 중 조씨가 유일하게 자식(2남 1녀)을 낳았다. 조씨는 1630(인조 8)년에 궁녀로 들어와 척신 김자점과 함께 인조의 총애를 받으며 득세했다. 인열왕후 사후 숙의 장씨와 장렬왕후가 입궁했지만 힘이 없었다. 조씨는 1637년 12월 숙원(종4품), 1638년 소원(정4품), 1640년 소용(정3품), 1645년 소의(정2품)으로 승승장구했다. 인조는 소현세자 일가가 죽어가는 즈음 1648년 윤3월 21일 창경궁 경춘전에 나아가 숭선군 이징을 위해 처녀를 간택했고 8월 16일 딸 효명 옹주를 낙성위 김세룡(김자점의 손자)에게 시집보냈는데 극히 풍족하고 사치스러웠다. 모두 조씨가 낳은 자식들이었다. 1649년 2월 19일 조씨는 귀인(종1품)에 올랐다. 몇 달 후 5월 8일 인조는 창덕궁에서 승하했다. 그리고 5월13일 효종이 즉위하니 상황이 바뀌었다. 김상헌·송준길 등 청서파가 집권했다. 1651(효종 2)년 김자점이 청나라 내통과 손자(조씨의 사위)의 왕위옹립 협의로 처형됐다. 이때 귀인 조씨도 왕세자(훗날 현종) 저주 혐의를 받았다. 1651년 11월 23일 관련자를 문초하니 “조 귀인이 사람 뼈 가루를 옹주에게 전하여 저주에 쓰게 했습니다”라고 했다. 1651년 12월 14일 효종은 조씨를 자진하도록 명했다. 스스로 목숨을 끊게 한 것이다.

봉분과 장명등 사이 ‘혼유석’은 5개의 고석이 받치고 있다.(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12.03.
봉분과 장명등 사이 ‘혼유석’은 5개의 고석이 받치고 있다.(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12.03.

◆사랑도 왕비자리도 못 얻은 후궁 장씨

인조의 두 번째 후궁 귀인 장씨(1619~1671)는 운명이 기구했다. 1635(인조 13)년 8월 인조는 숙의 간택령을 내리고 생원 장류의 딸을 택했으니 24세 연하였다. 이현궁에서 한 달간 머물다가 인조가 친영(신부 집에 가서 맞아오는 예)하고 왕후의 예우로 입궐했다. 그런데 12월 9일 인열 왕후가 세상을 뜨니 장씨가 계비가 될 수 있는 기회였다. 하지만 1637년 3월, 인조는 ‘계비는 예로부터 해독은 있으나 유익함은 없었다’며 계비를 세우지 않겠다고 했다. 그러더니 느닷없이 계비 간택령을 내리고 장렬왕후를 맞아 책봉했다. 귀인 장씨에게 왕비의 기회는 사라지고 말았다. 인조의 사랑도 받지 못한채 쓸쓸히 지냈다. 1671(현종 12)년 52세에 세상을 떴다. 왕의 사랑은 귀인 조씨가, 왕비 자리는 장렬왕후가 차지했으니 장씨의 종1품 벼슬은 그저 허울뿐이었다.

‘삼전도비’는 인조가 청나라에 항복을 한 이후 1639년에 청나라 황제의 공덕을 기리고자 세운 전승비이자 송덕비이다. 대청황제공덕비라고 불리운다. 서울 송파구 잠실동 석촌호수변에 있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12.03.
‘삼전도비’는 인조가 청나라에 항복을 한 이후 1639년에 청나라 황제의 공덕을 기리고자 세운 전승비이자 송덕비이다. 대청황제공덕비라고 불리운다. 서울 송파구 잠실동 석촌호수변에 있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12.03.

◆손자부터 왕위계승의 정통성 이어져

인조는 숙부를 치고 왕이 됐으나 국내외적으로 편치 않은 세월을 보냈다. 맏아들 소현세자와 며느리의 죽음도 석연찮았다. 자신을 보필하는 이렇다 할 측근도 마땅치 않았다. 인조는 어찌됐든 국가의 위기를 넘겼다. 아들 효종과 후대의 현종, 숙종에 이르기까지 적장자에게 왕위를 승계하면서 정통성을 이어갔다. 1634년 양전(토지조사)을 실시해 토지제도를 시정했으며, 연등9분법으로 세제를 합리화했다. 난국 속에서도 군제를 정비해 총융청·수어청 등을 신설했으며, 북변 방위와 연해 방위를 위해 여러 진을 신설했다. 마니산사고를 설치하고 동전을 유통시켰으며 황극경세서 동사보편통재(송나라 소옹의 ‘황극경세서’에 국사를 더한 역사서)등의 서적도 간행됐고, 송시열·송준길 등의 대학자·대정치가가 배출되기도 했다. 나라와 가정에 풍파가 끊이지 않았던 그의 삶은 조선 왕 평균수명 46세를 훨씬 넘기고 1649년 55세의 나이로 마감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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