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 서오릉의 ‘명릉’
조선 제 19대 왕 숙종ᆞ인현왕후·인원왕후 능

현직 왕과 왕비에게서 태어나
당시 46년 최장기 재위 기록
의사결정 과감, 두 번 왕비 교체
강력한 왕으로 환국을 주도해

글·사진 이의준 왕릉답사가

고양 서오릉은 숙종과 그 부인, 며느리들이 함께 묻혀있다. 숙종과 인현왕후, 인원왕후(명릉), 인경왕후(익릉), 희빈 장씨(대빈묘)와 두 며느리 영조의 정비 정성왕후(홍릉), 영조의 후궁이자 사도세자의 사친 정빈 이씨(수경원)가 능역에 자리하고 있다. 이처럼 동일구역 왕릉에 4명의 부인과 더불어 며느리까지 모여 있는 경우는 유일하다. 숙종은 4명의 왕비, 46년 재위, 초강력 왕권, 왕비와 집권세력 교체 등 다양한 모습을 가진 왕이다. 왕비를 폐하고 죽이고, 송시열과 같은 거물들을 일거에 처형하는 등 조변석개의 왕으로서 거칠게 없이 환국을 주도했다. 아마 조선 최고의 정통성을 지닌 왕으로 시작해 신하를 두려워하지 않고 과감한 의사결정을 한 왕이기에 가능한 것이었을 것이다. 숙종과 왕후들의 능과 더불어 사극의 주인공으로서 널리 알려진 장희빈의 묘까지 찾아가 본다.

서오릉 명릉. 조선 제19대 왕 숙종과 인현왕후 민씨의 쌍릉, 인원왕후 김씨의 단릉이 하나의 정자각 좌우의 서로 다른 언덕에 조성된 '동원이강릉'이다. 선조의 목릉과 같은 형태이다. (제공: 궁능유적본부) ⓒ천지일보 2024.01.29.
서오릉 명릉. 조선 제19대 왕 숙종과 인현왕후 민씨의 쌍릉, 인원왕후 김씨의 단릉이 하나의 정자각 좌우의 서로 다른 언덕에 조성된 '동원이강릉'이다. 선조의 목릉과 같은 형태이다. (출처: 궁능유적본부) ⓒ천지일보 2024.01.29.

◆정통성과 권세로 정국 주도

제19대 숙종(1661~1720, 재위 1674∼1720) 이순(焞)은 현종과 명성왕후의 외아들이다. 그는 1661년 8월 15일 경덕궁 회상전에서 태어나 1667년 정월 7세에 왕세자에, 14세인 1674년 8월 23일 창덕궁 인정전에서 왕위에 올랐다. 총명하고 영특해 수렴청정을 받지 않았다. 재위기간이 46년으로 아들 영조(52년)에 이어 두 번째로 오래 재위했다. 숙종은 강력하고 정통성을 지닌 군주였다. 왕실에서 권력계승 1순위의 적장자였다. 적장자는 문종이 최초였고 이어 단종, 연산군, 인종, 현종, 숙종, 그리고 순종의 7명이었다. 문종과 단종은 즉위 2년여 만에 승하했고 연산군은 폐위됐다. 그나마 아버지 현종이 15년간 재위했다. 이중에서도 현직 왕과 왕비의 왕자로 태어난 왕은 인종, 숙종, 순종의 3명뿐이며 인종은 재위 7개월 만에 세상을 떴고 순종은 즉위 3년 만에 나라를 잃고 물러났다. 그만큼 숙종은 왕실계보에서 최고의 정통성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장기 재위한 왕이었다. 숙종은 인경왕후·인현왕후·인원왕후의 세 왕비가 있었으나 왕자를 얻지 못했다. 후궁인 희빈 장씨가 처음 아들(훗날 경종)을 낳고 왕비에 올랐으며 숙빈 최씨에서 영조가 탄생했다. 숙종의 첫 왕비인 인경왕후는 본관이 광산인 광성부원군 김만기와 한씨의 딸로 1661(현종 2)년에 태어났다. 1671(현종 12)년에 왕세자빈으로, 1674년에 숙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로 책봉됐다. 두 공주를 낳았으나 일찍 죽었고 본인도 1680(숙종 6)년 왕비가 된지 6년 만인 20세에 천연두로 세상을 떠났다. 두 번째 왕비 인현왕후 민씨(1667~1701)는 인경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이듬해 1681(숙종 7)년에 왕비로 책봉됐다. 본관이 여흥인 여양부원군 민유중과 군부인 송씨의 딸이자 송준길의 외손녀로서 1667(현종 8)년에 반송동 사저에서 태어났다. 숙종의 어머니 명성왕후와 송시열의 추천으로 왕비에 봉해졌으나 자식이 없었다. 1689(숙종 15)년 음력 5월 폐비됐다가 5년 만에 다시 왕비로 등극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명릉 정자각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4.01.29.
명릉 정자각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4.01.29.

◆인현왕후와 희빈 장씨

1688년 후궁 장씨가 왕자(이윤, 훗날 경종)를 낳으니 원자책봉의 문제가 불거졌다. 희빈 장씨(장희빈, 장옥정, 옥산부대빈, 1659~1701)는 옥산부원군 장형의 딸로서 숙종대의 대왕대비 장렬왕후(인조의 계비)를 모시는 궁녀로 입궁했다. 그녀는 숙종의 총애를 받았고 1686(숙종 12)년에 숙원(종4품)이, 그 후 소의가 되어 1688(숙종 14)년에 숙종에게 첫아들을 안겨줬고 희빈으로 올려졌다. 이듬해 기사년에 숙종은 장씨의 아들을 원자로 삼으려 했고 서인은 이에 반대했다. 숙종은 서인을 내치고 인현왕후를 폐위 출궁시켰으며 남인의 편을 들어주고 희빈을 왕비로 책봉했다. 조정은 노론과 소론으로 갈렸고 숙종의 총애를 받던 숙빈 최씨가 왕자를 낳으니 훗날 영조였다.

숙종은 1694(숙종 20)년 갑술년 인현왕후를 다시 왕비로 봉했다. 인현왕후는 1701(숙종 27)년에 35세로 세상을 떠났는데 2개월 후 인현왕후를 저주한 죄로 무고의 옥이 발생하니 희빈 장씨가 사사되고 말았다. 이에 앞서 1701(숙종 27)년 9월 23일 숙종은 대행왕비(죽은 왕비)를 무고한 죄인 장희재를 처형하라는 비망기를 내렸다. 밤에 임금이 이르기를 “대행왕비가 병에 걸린 2년 동안 희빈 장씨는 한 번도 문병하지 않았고 ‘중궁전’이라 않고 ‘민씨’라 일컬었다. 취선당 서쪽에 몰래 신당을 설치하고, 비복들과 저주했다. 이것을 참을 수가 없는 것이다. 우선 제주에 유배시킨 죄인 장희재(장희빈 오빠)를 먼저 처형하여 빨리 나라의 형벌을 바로잡으라”고 했다.

숙종과 인현왕후의 능인 명릉. 숙종이 죽기 전에 미리 정한 자리였는데 1701(숙종 27)년 인현왕후가 먼저 세상을 뜨니 숙종은 허우(오른쪽 자리를 비워둠)를 뒀고 1720년 옆에 묻혔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4.01.29.
숙종과 인현왕후의 능인 명릉. 숙종이 죽기 전에 미리 정한 자리였는데 1701(숙종 27)년 인현왕후가 먼저 세상을 뜨니 숙종은 허우(오른쪽 자리를 비워둠)를 뒀고 1720년 옆에 묻혔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4.01.29.

◆후궁·왕비·폐비 그리고 사사

또한 대행왕비가 하교하기를 “1694년 내가 복위한 뒤 조정의 의논이 세자의 사친(희빈 장씨)을 봉공하자고 운운하면서 ‘마땅히 (희빈을) 여러 빈어들과 구별해야 한다’고 했는데, 이때부터 궁중의 사람들이 모두 희빈에게 기울어졌다. 희빈의 시녀들은 항상 나의 침전에 왕래하고 심지어 창구멍을 내어 엿보기까지 했다. 그러나 감히 꾸짖어 금하지 못하니, 한심했지만 어찌할 수가 없었다. 어떤 사람이 주상께 감히 고하여 이것을 알게 하겠는가? 나는 갖은 고초를 받았으나, 병이 난 2년 사이에 소원은 오직 빨리 죽는 데 있으나, 병이 낫지 아니하여 괴롭다”고 했고 눈물을 줄줄 흘렸다. 이때에 이르러 무고의 사건이 발각되니, 외간에서는 “숙빈 최씨가 평상시에 왕비가 베푼 은혜를 추모하여, 임금에게 몰래 고하였다”고 했다. 10월 8일 숙종은 “희빈 장씨를 내전을 질투하여 모해하려 한 죄로 자진하게 하라”고 하교했다. 숙종이 승정원에 하교하기를 “희빈 장씨가 왕비를 질투하고 원망하여 신당을 궁궐 안팎에 설치하고 밤낮 기도하며 흉악하고 더러운 물건을 묻었다. 하늘과 땅이 분개하는 바이다. 그대로 둔다면, 후일 국가의 근심이 형언하기 어려울 것이다. 나는 종사와 세자를 위하고자 한다. 희빈을 자진(스스로 목숨을 거둠)하게 하라”고 했다. 또한 숙종은 하교하기를 “지금부터 기록하여 나라의 제도로 만들되 빈어(임금의 첩)가 왕비에 오르지 못하도록 하라”고 했다.

숙종과 인현왕후의 능을 둘러싼 난간석의 연결 부분.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4.01.29.
숙종과 인현왕후의 능을 둘러싼 난간석의 연결 부분.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4.01.29.

인현왕후와 희빈이 세상을 뜨고 이듬해 1702(숙종 28)년 숙종은 네 번째 왕비 인원왕후 김씨(1687~1757)를 맞았다. 숙종보다 26세 어렸으며 경주의 경은부원군 김주신과 조씨의 딸이었다. 인원왕후도 역시 아들이 없었다. 1720년에 경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대비가 됐고 1721(경종 1)년에 연잉군(훗날 영조)을 왕세제로 책봉해 양자로 삼았다. 그녀는 영조가 왕이 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1724년에 영조가 왕이 되자 대왕대비가 되어 각별한 효도를 받았다. 그 후 1757(영조 33)년에 창덕궁 영모당에서 71세로 세상을 떠났다. 인원왕후의 궁중일기인 ‘선군유사(아버지 이야기)’와 ‘선비유사(어머니 이야기)’가 있는데 인원왕후는 기록에서 “어머니가 잠든 내 방 앞에서 기다리시다 들어오시라 해도 황망해 하면 사양하셨다”고 했고 “아버지는 내가 15세까지 무릎에 두시고 이마를 어루만지셨는데 이제는 가까이 옮겨가려 해도 물러나시며 사양하시니 사사로운 정을 펴지 못했다”며 부모님과 정을 나누지 못함을 안타까워했다.

명릉 인원왕후 능이다. 숙종과 인현왕후의 명릉이 조성된 후 37년이 지난 1757(영조 33)년 인원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명릉과 익릉사이에 봉분을 조성했다. 명칭은 명릉으로 했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4.01.29.
명릉 인원왕후 능이다. 숙종과 인현왕후의 명릉이 조성된 후 37년이 지난 1757(영조 33)년 인원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명릉과 익릉사이에 봉분을 조성했다. 명칭은 명릉으로 했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4.01.29.

◆세 차례 환국, 왕권 강화

숙종은 환국(換局: 국면의 전환)으로 왕권을 강화하고 왕비와 당파권력을 교체했다. 숙종 대에 세 차례의 환국이 벌어졌으니 경신환국(1680년, 숙종 6), 기사환국(1689년, 숙종 15), 갑술환국(1694년, 숙종 20)이다. 경신환국은 남인이 축출되고 서인이 등용된 사건이었다. 1674(현종 15)년의 갑인예송에서 남인이 승리한 해 숙종이 즉위했다. 당시 진주 유생들과 성균관 유생들이 송시열의 예론을 놓고 반목을 하고 있었다. 숙종은 송시열을 관직삭탈하고 덕원에 유배하였다. 병조판서 김석주 등 외척을 중용하고 인조의 3남 인평대군의 세 아들 ‘삼복(복창군·복선군·복평군)’을 가까이 했다. 남인의 영수 영의정 허적이 정국운영의 주축이었다. 재위 6(1680)년 경신년 3월 허적의 유악사건이 벌어졌다. 허적은 조부 허잠이 시호(국가나 왕이 죽은 중요인물에 내리는 이름)를 받으니 이를 기념하는 잔치를 열었는데, 비가 내리자 왕이 용봉차일(왕궁의 유악, 유악은 기름먹인 천막)을 내 주겠다 했다. 이미 허적이 무단으로 가져간 후였다. 왕은 진노했다. 숙종은 병권을 서인에게 넘겼다. 국구(왕의 장인) 김만기를 훈련대장에 임명하는 등 관직을 교체했다. 이틀 뒤 남인과 종친이 연루된 ‘삼복의 변’이 벌어졌다. 허적의 서자인 허견이 복선군 등과 역모를 꾸미고 있다는 고변이 접수됐다. 4월 복선군과 허견은 사형에, 복창군은 사사, 복평군은 유배됐다. 5월에는 남인의 핵심인물인 허적과 윤휴가 사사되고 송시열이 석방됐다. 남인은 제거되고 서인이 등용됐다. 왕은 서인의 영수 송시열을 예우했다. 같은 달 인경왕후가 별세하고 다음해 5월 서인 가문 민유중의 딸을 계비(인현왕후)로 맞았다. 서인은 남인 숙청을 둘러싸고 강경파인 노론과 온건파인 소론으로 나뉘어졌다. 1687년 12월 숙종은 탕평책을 준수할 것을 명했다.

인원왕후의 능에서 본 숙종과 인현왕후의 능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4.01.29.
인원왕후의 능에서 본 숙종과 인현왕후의 능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4.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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