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리 동구릉 숭릉, 현종·명성왕후 김씨 능
청나라서 태어나고 자란 외국 태생
원손, 왕세손, 왕세자 거친 정통성
두 차례 예송논쟁과 천재지변 겪어
15년 내실 있게 나라 통치해나가

글·사진 이의준 왕릉답사가

구리 동구릉에 들어서면 왼쪽 끝자락에 조선 제18대 현종과 명성왕후 김씨의 숭릉이 있다.  1674년 현종의 숭릉이 조성됐고 1684년 명성왕후가 옆에 묻혀 쌍릉이 됐다. 현종은 1641(인조 19)년 아버지 봉림대군(훗날 효종)과 어머니 장씨(훗날 인선왕후) 사이에서 태어난 외아들이다. 아버지 효종이 청나라에 볼모로 가있을 때 심양관사에서 태어나 조선왕 유일한 외국 태생이다. 명성왕후 김씨(고종은 명성왕후 민씨)와 결혼했으며 계비나 후궁이 없는 유일한 왕이었다. 조선의 가장 정통성을 지닌 왕이 되어 15년을 통치했는데 조선 초기 문종, 단종, 인종도 적장자였으나 즉위 1~3년 만에 승하했다. 현종 초와 말에 대비인 장렬왕후가 아들 효종과 며느리 인선왕후의 장례에 상복 입는 기간을 두고 조정이 혼란스러웠다. 또한 임기 말 경신기근으로 혹독한 피해를 입었다. 그럼에도 효종은 소신을 가지고 나라의 안정과 발전을 꾀했으나 안타깝게도 35세에 승하하니 숭릉에 자리했다. 조선왕릉 유일하게 정자각이 팔작지붕으로 돼있는 숭릉을 찾아본다.

숭릉 전경으로, 현종과 명성왕후 김씨의 쌍릉이다. 현종은 조선 왕으로써 유일하게 외국에서 탄생했고, 왕후 외에 계비나 후궁이 없었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4.01.14.
숭릉 전경으로, 현종과 명성왕후 김씨의 쌍릉이다. 현종은 조선 왕으로써 유일하게 외국에서 탄생했고, 왕후 외에 계비나 후궁이 없었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4.01.14.

◆조선 최고의 정통성 지녀

현종(이원→이연, 1641~1674)은 청나라 심양에 볼모로 잡혀가있던 봉림대군(효종)과 풍안부부인(인선왕후 장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외국에서 태어난 최초의 왕이다. 1645년 아버지 봉림대군이 왕세자가 되면서 원손이 됐고 1649년 2월 18일 왕세손으로 책봉됐으니 제6대 단종이 왕세손(1448년)이 된 이후 200년 만이었다. 1649년 효종이 즉위하니 왕세자가 됐고 1651년 청풍부원군 김우명의 딸(훗날 명성왕후 김씨)을 세자빈으로 맞아 결혼했으며 1659년 제18대 조선국왕에 즉위했다.

현종(재위 1659~1674년)은 조선왕으로써 유일하게 계비나 후궁을 두지 않았다. 부인 명성왕후의 아버지는 김우명이고 할아버지는 인조와 효종 때에 영의정이자 대동법을 추진한 김육이다. 왕후는 머리가 좋고 성격이 매우 강했다. 명성왕후는 아들 숙종의 조정에 관여했다가 비판을 받았고 당파성이 강해 남인세력의 장희빈을 내치는데 나서기도 했다. 제2차 예송논쟁으로 정권을 잡은 남인이 인평대군(효종의 동생)의 세 아들 복창군, 복평군, 복선군(삼복)과 가까이하니 서인들은 큰 위협을 느꼈다. 그러던 중 홍수(궁녀)의 변이 일어났다. 명성왕후와 그녀의 아버지 김우명은 삼복이 궁녀들과 불륜관계라며 단죄하자 주장했는데 숙종은 세 사람을 가두고 심문하니 무죄로 기울었고 오히려 무고한 김우명이 처벌될 지경이었다. 조정에서 한밤중 회의가 열렸는데 갑자기 대비 명성왕후가 통곡하는 소리가 났다. 이 사태로 남인들의 상소가 빗발쳤고 숙종이 무마해 끝냈다. 허나 현종과 명성왕후 사이는 원만해서 아들 숙종(1661년)과 두 살 위 누나와 여동생 둘을 낳았다. 딸 둘은 10대에 죽었고 막내 명안공주만 결혼까지 했으나 23세에 죽고 말았다.

하나의 곡장이 왕과 왕후의 봉분을 둘러싸고 있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4.01.14.
하나의 곡장이 왕과 왕후의 봉분을 둘러싸고 있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4.01.14.

◆두 차례의 예송논쟁을 정리

1659(기해년)년 효종이 승하하니 대비(장렬왕후)가 상복을 입는 기간을 두고 갈등이 생겼으니 1차(기해) 예송이었다. 효종은 둘째아들이었고 맏아들 소현세자의 3남이 살아있었다. 윤휴와 허목 등 남인은 왕위를 이은 효종을 장남으로 보고 참최복(3년)을, 송시열 등 서인은 왕이라 해도 차남이므로 기년복(만 1년)을 주장했다. 기년의 주장은 효종이 적통이 아니라는 논리와 같았다. 결국 효종은 스승이자 총신 송시열의 주장대로 기년을 택했다. 붕당은 심해졌다. 1667년 7월 20일 현종이 경고하기를 “이후로 파당을 일삼는 자를 함께 공격하여 서로 가다듬기 바란다. 않으면 죄를 받을 것이다”라고 했다. 15년 후 1674년 효종비 인선왕후가 승하하자 2차(갑인) 예송이 발생했다. 다시 자의대비의 상복이 문제가 됐다. 주자의 가례에서는 맏며느리는 기년, 둘째며느리는 대공(大功=9개월)이라고 돼 있었다. 송시열의 서인은 인선왕후가 둘째며느리이므로 대공을 주장했고 남인은 왕비이니 맏며느리로 보고 기년을 주장했다. 결국 왕이 나서서 “대왕대비께 기년복으로 고쳐 입는다고 고하고 거행하라”했으며 8월 1일 기년복으로 성복해 마무리됐다. 2차 예송에서 승리한 남인은 송시열 등의 처형을 두고 과격파 ‘청남’과 온건파 ‘탁남’으로 갈렸다. 예송논쟁은 숙종 때의 환국과 경신대출척, ‘현종실록’에도 영향을 끼쳤다. ‘현종실록’은 숙종 1(1675)년에 편찬을 시작해 1677년에 완성됐는데 남인이 관여했기에 서인이 다시 고치자고 나섰다. 1680년 서인이 정권을 잡은 뒤 작업해 1683년에 28권의 ‘현종개수실록’이 완성됐다.

조선왕릉 유일하게 정자각이 팔작지붕으로 돼 있다. 보물 제1742호로 지정돼 있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4.01.14.
조선왕릉 유일하게 정자각이 팔작지붕으로 돼 있다. 보물 제1742호로 지정돼 있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4.01.14.

◆대동법 등 다양한 정책 펼쳐

2차례의 예송논쟁에도 국왕인 현종은 백성의 생활에 밀접한 정책을 펼치려 노력했다. 서인과 남인을 등용하며 홍명하, 정태화, 허적 등 영의정과 함께 했고, 종묘배향공신으로써 명성왕후의 백부 김좌명과 그의 아들 김석주 그리고 김수항, 김만기 등의 측면 지원을 받았다.  두만강 주변의 여진족을 몰아내고 주변 고을을 승격시켰다. 북벌정책을 중단하고 군사력을 강화코자 훈련별대를 만들었고 양민의 승려진출을 제한했다. 1662(현종 3)년 호남지방에 대동법을 시행했다. 1666년에는 제주도에 표류해 온 하멜 등 8명이 14년 억류에서 탈출했다. 이들은 나중에 ‘하멜표류기’와 ‘조선국기’를 저술했다. 1668년 10여만 자의 동철활자를 주조하고 혼천의를 만들어 천문과 역법을 촉진했다. 지방관의 상피법(연고지 근무를 금함)을 제정했고, 1669년 송시열의 건의로 동성통혼을 금지했다. 또한 태조 비 신덕왕후를 복원했다. 1670년에는 산간지방 유민을 호적에 편성하고 오가작통사목(5가구를 한통으로 삼음)을 제정했다. 재정난 해소를 위해 영직첩(명예직 벼슬)과 공명첩(무기명 관직임명장)을 발급하니 이는 신분제도의 변화를 가져왔다.

세종의 영릉에 있는 정자각은 조선왕릉의 전형적인 맞배지붕으로 돼 있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4.01.14.
세종의 영릉에 있는 정자각은 조선왕릉의 전형적인 맞배지붕으로 돼 있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4.01.14.

◆경신기근의 극복에 사력 다해

현종말기에 1670(경술)년과 1671(신해)년에 전대미문의 가뭄과 지진, 서리, 우박, 물난리, 전염병이 극성을 부렸다. 1670(현종 11)년 2월 충청도에서 염병으로 80명이 죽고 함경도에서도 전염병으로 200명이 죽었다. 전국에서 지진이 났고 강풍과 홍수에 물에 빠져 죽은 자가 200여명에 이렀다. 함경도에 우박이 내렸는데 달걀 또는 새알만하니 농작물이 모두 망가졌다. 8월 10일 실록은 “백성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죽은 시체가 길에 널렸는데, 방목하는 소와 말을 대낮에 잡아먹었다”고 했다. 경상도와 전라도의 피해가 컸다. 경상도의 소 6806마리 등 1만 마리가 전염병으로 죽었다. 조정은 산사람에게 죽을 나눠줬다. 1671년 3월 굶주린 자가 경상도 11만 5천명, 전라도 17만 2천명, 충청도와 경기도 10만 명에 달했다.

조선왕릉에는 봉분의 정면을 제외한 좌우에 각각 두쌍의 석양과 석호가 세워져 있다. 능을 수호하는 역할을 하며 양의 온순함과 호랑이의 사나움이 음과 양의 조화를 이루는 의미이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4.01.14.
조선왕릉에는 봉분의 정면을 제외한 좌우에 각각 두쌍의 석양과 석호가 세워져 있다. 능을 수호하는 역할을 하며 양의 온순함과 호랑이의 사나움이 음과 양의 조화를 이루는 의미이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4.01.14.

현종은 세금을 감해주고 진휼청을 설치해 강도와 남한산성, 관서의 5만석(1석=2가마)을 백성에게 나눠 줬다. 쌀 가격은 1석에 은 3냥에서 몇 달 만에 은 8냥으로 뛰었으나 구할 수가 없었다. 신료와 군인들의 급여도 바닥나고 사대부들도 굶어죽었으며 간원은 병약해 근무조차 못할 지경이었다. 굶주린 백성이 아이를 길가나 개천에 버리니 임금이 듣고 슬퍼하며 “아들이든 종이든 삼아 거두게 하라”고 했다. 도성의 77가구에는 뼈만 남은 가족의 시체가 방치됐다. 5월 20일 실록은 “사방 십리 시체가 언덕을 이루고, 빗물이 넘치니 주검이 잇따라 떠내려갔다”고 했다. 각도에서 죽은 이가 10만 4천명이 넘었는데 실제는 10배나 많다고도 했다. 1669년의 516만 명이던 인구는 3년 만에 469만 명으로 줄었다. 1672년 4월이 돼 재난은 잠잠해졌다. 나라의 재정은 고갈되고 백성은 겨우 목숨을 부지했다. 현종은 “재난은 나의 부덕 때문”이라며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왕은 온갖 스트레스로 종기가 악화되니 건강을 크게 잃고 있었다.

숭릉의 망주석은 17~18세기 초의 전형으로 꽃무늬가 새겨져 있고 ‘세호’라는 상상의 동물이 새겨져 나쁜 기운을 막거나 몰아내는 역할을 한다. 망주석은 좌우 두 개이며 하나는 올라가는 세호, 또 하나는 내려가는 세로의 형상이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4.01.14.
숭릉의 망주석은 17~18세기 초의 전형으로 꽃무늬가 새겨져 있고 ‘세호’라는 상상의 동물이 새겨져 나쁜 기운을 막거나 몰아내는 역할을 한다. 망주석은 좌우 두 개이며 하나는 올라가는 세호, 또 하나는 내려가는 세로의 형상이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4.01.14.

◆종기 악화로 35세에 세상 떠

1660(현종 1)년 현종의 머리 오른쪽, 다리, 오른쪽 턱밑, 가슴 위쪽에 종기가 성하니 뜸과 침을 맡기를 거듭했다. 1669(현종 10)년 11월 17일 왕이 “머리가 지끈거리고 정수리에 통증이 있다”고 하니 신하들이 어쩔 줄 몰라 했다. 왕이 서두르니 침을 놓았는데 고름이 한 되나 나왔다. 왕이 “종기를 따버리니 아주 시원하다”고 하니 신하들이 기뻐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기근을 거쳐 1674년 여름에 이르니 병세는 악화됐다. 8월 7일에는 몸을 가누지 못했고 다음날은 온 몸이 불덩이 같았고 밤새 괴로워했다. 시약청(임금의 병이 위중하면 약 제조)을 설치했고 15일 하루만 6~7번을 왕의 병세를 살폈다. 영상 허적이 왕세자에게 기도하라 했고 대비는 자리를 옮기자고 했으나 결국 18일 숨을 거뒀다. 불과 35세였다. 숭릉에 모셔졌고 9년이 지난 1683(숙종 9)년 명성왕후 김씨가 세상을 떠나자 다음 해 쌍릉(하나의 곡장 안에 봉분을 나란히 배치)으로 조성했다.

혼령이 능침에서 내려와 정자각으로 건너가도록 ‘신로’가 놓여져 있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4.01.14.
혼령이 능침에서 내려와 정자각으로 건너가도록 ‘신로’가 놓여져 있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4.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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