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교리비교 기획을 제공해온 본지가 창간 4주년을 맞아 새로운 연재기획 ‘목사님 성경이 궁금해요’를 선보입니다. 본 기획은 기독교인들에게 다양한 교리를 접할 기회를 제공하고자 마련되었습니다. 이번 기획에 선정된 질문들은 그간 독자들이 본지 종교부 기자에게 보내온 질문 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 질문을 선정했습니다. 각 교단에 공문을 발송해 협조를 구했으며, 성도들의 질문에 답한 목회자들의 답을 게재했습니다.

 

 

Q28. 생명나무와 선악나무는 무엇인가? 생명나무 과실을 먹으면 영생한다고 하셨다. 먹어 본 적이 있는가? 계시록에는 이 두 가지 나무가 있다. 선악과를 먹으면 죽는다고 하셨는데, 죽는 것은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이 아닌가?

[전 예장합동 이근호 목사]

살아있다고 여기면서 느끼는 죽음은 온전히 죽음을 안다고 할 수가 없다. 그저 육신으로 아는 정도이지만 그것은 악마의 사주에 의해서 파악한 죽음일 뿐이다. 하지만 진정한 죽음은 성령의 임재로만 파악되는 죽음인데 그것은 곧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다. 그 죽음에서 영원히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음이 죽음의 절정인 것인 사태인 것을 알 수 있다. 곧 지옥의 저주이다. 성령께서 성도로 하여금 늘 이 지옥의 저주를 맛보게 해서 (십자가 사건이 되풀이해서 터지게 해서) 오로지 예수님의 피 공로만 의지만 감사하고 즐거워하게 하신다.

따라서 생명나무 과실은 선악과로 따먹은 그 죄에 대해서 영원한 십자가 죽음 안에서 해결된 자에게만 제공되는 것이다. 이 말은 생명나무와 선악과 두 개의 열매 중, 하나를 따먹을 선택권이 우리 인간에게는 없다는 말이다. 생명나무와 선악과와 우리 인간의 관계를 알려면 아담이 생명나무 과실을 따먹지 못한 그 경위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선악과 나무에 대해서만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는 단서를 붙인다. 이것은 선악과 나무의 내막과 본질을 알아야지만 제대로 된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알지 못함’이 창조의 취지가 살아있는 흡족한 인간이 된다는 것이다. 인간에게 있어 무지無知의 영역이 에덴동산 한 가운데 포진해있다는 말은 에덴동산의 설치 이유가 결코 인간의 행복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말해주시는 것이다.

즉 인간이란 인간의 행복을 위해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신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도리어 인간으로 하여금 끼어들어서는 아니되는 영역을 따로 마련했다는 점은 인간됨의 조건은 인간 손에 달린 것이 아니라 창조주의 손에 달렸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선악과 과실로 인하여 인간은 파괴되게 되니 인간 창조 자체에 이미 파괴의 여지를 갖추고 있었음이 드러난다. 이것은 인간의 위한 인간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악마가 인간으로 하여금 선악과 과실을 따먹으라는 것은 곧 ‘인간은 어디까지나 인간을 위한 존재라야 당연하다’는 의식을 심어주기 위함이다. 즉 하나님이나 예수님이나 삼위일체 하나님이나 교회나 대자연이나 이웃이나 모두 인간을 사랑해서 인간에게 주어진 것이라는 분위기가 대세인 것도 이런 영향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은 달리 이야기하신다. 골로새서 1장 16~17절에 보면,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여기서 ‘그’란 하나님도 아니요 성령님도 아니다. 오직 예수님이다.

따라서 생명나무 과실을 우리 죽어가는 인간이 따먹을 자격이나 권리가 없다. 오로지 예수님이 주실 때만 먹을 수 있는데 그 먹는 방법은 요한복음 6장 53~57에 나온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즉 주안에서 죽는 것이다. 이 죽음은 인간이 자살한다고 성사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이 날마다 죽이시고 살리시는 방식이다.

참고로 요한계시록에서는 선악과 나무가 없다. 생명나무 밖에 없다. 그것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취지는 인간을 심판함으로서 십자가 사건이 관여된 그 역할과 기능을 다했기 때문이다.

[예장합동보수 최영백 목사]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 대해서는 언젠가도 한 번 질의에 답한 적이 있다. 오늘 우리시대에 “생명나무와 선악나무는 무엇인가?”라고 묻는 질문도 그렇고, 특히 생명나무 과실에 대해 “먹어본 적이 있는가?”라는 질문은 그야말로 말씀의 초보에도 이르지 못한 너무나도 말이 안 되는 질문임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에덴동산의 선악과 언약은 오직 아담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있었던 사안이지 어느 시대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언약이 아닌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고 그리되어야 하는 이유는 그 선악과 언약은 개인 개별적이 아니라 ‘연대언약’, 즉 ‘대표제의 언약’이기에 그러하다. 이에 대해 바울은 그렇게 진술한 바 있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

죄가 세상에 들어온 것, 즉 모든 인생들이 태어나면서부터 죄인의 신분으로 출생케 되고 또 사망에 이르게 되는 것은 ‘한 사람’ 곧 아담의 행위언약 실패 때문이었다는 지적이다. 그리고 그 이유는 아담과 하나님께서 맺었던 언약이 대표제였던 까닭이었다. 하나님께서 구원 언약을 이처럼 대표제로 정하신 이유에 대해서 바울은 다시 그렇게 설명하였다.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 5:19)’

구원 언약을 대표제로 정하심은 곧 그리스도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그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값없이 구원에 이르게 하시기 위함이었다는 설명이다. 그러기에 바울은 이어진 20절에서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나니”라고 보도하였다. 아담의 죄가 우리와 상관없이 우리에게 더해진 것이지만, 그러나 그 때문에 그리스도 한 사람의 의로 우리가 값없이 구원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이며, 그러기에 죄가 더해졌지만 은혜가 넘치게 되었다는 뜻이다.

즉 처음 에덴동산에서 맺은 구속언약이 대표제였기에 그리스도의 의의 승리 역시 모든 사람에게 그 효력을 미칠 수 있게 된 것이다. 때문에 아담과 그리스도를 비교하며 바울은 그렇게 설명하기도 하였다.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고전 15:45~47)’

왜 바울은 아담을 첫 사람으로, 그리스도에 대하여는 ‘마지막 아담’, 또는 ‘둘째 사람’이라고 표현한 것인가? 주님께서 육신을 입고 오신 것은 구원 언약과 관련하여 마지막 대표이며 두 번째 대표란 뜻의 표현에서인 것이다.

2천 년 전, 유대 땅에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주님의 피가 어떻게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죄를 사해 주고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있는가? 그것은 곧 구원언약이 대표제였기에 가능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오늘 우리가 죽는 것은 첫 사람 아담의 실패의 결과이지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이 아니다. 율법이 없으면 죄가 없다고 하였다(롬 5:13).

그럼에도 아담과 같은 죄를 범하지 않고 모세의 율법과 같은 율법이 없었던 아담에서 모세시대까지 살았던 사람들에게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던 것(롬 5:14)도 그러하고, 또 죄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영아나 유아가 죽는 것 역시 마찬가지 원리인 것이다. 아울러 계시록에 보도된 생명나무(2:7; 22:2, 14, 22)는 성도들의 영생과 관련한 하나의 비유지 실제 이 세상에서 생명나무 과실을 먹을 것이란 뜻에서 하신 말씀이 아니다. 이러한 질문에서 필자는 다음 말씀이 생각난다.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벧후 3:16)’

[SOSTV 생애의 빛]

먼저 우리는 생명나무와 선악나무의 영적인 의무를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초기 기독교 시대부터 많은 영지주의자들이 나타나서 자신이 생명나무요, 자신의 가르침(생명나무의 과실)을 받아먹어야만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사람들을 미혹해 왔다. 그 동일한 미혹이 현재 주님의 재림을 앞두고 있는 이 시기에도 하나님의 백성들을 현혹하고 있어 큰 문제가 되고 있다. 에덴동산의 생명나무와 선악나무는 그런 방법으로 해석되어져서는 안 된다. 그런 해석 방식을 통해 수많은 사교들이 등장해 왔다.

그렇다면 에덴동산의 생명나무와 선악나무가 상징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성경 주제의 양대 산맥인 복음과 율법 즉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가리키는 것이다. 성경은 창세기부터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인류에게 어떻게 조화롭게 제시되고 있는지를 에덴동산의 생명나무와 선악나무를 통하여 알려주고 있다.

에덴동산은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조화롭게 어울려 완전한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곳이었다. 에덴동산의 생명나무는 하나님의 사랑을, 선악나무는 하나님의 공의를 각각 나타낸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사랑을 상징하는 생명나무의 실과를 먹고 영생을 누릴 수 있었지만, 하나님의 공의를 상징하는 선악나무의 실과를 먹어버리면 영생이 취소되는 그런 환경 속에서 살고 있었다. 즉 복음으로 영생을 누릴 수 있었지만 율법을 저버리면 영생이 취소되는 그런 환경에 처해있던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아주 중요한 영적인 교훈을 시사하고 있다. 즉 성경이 말하는바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 인류에게 다시 세워진 생명나무를 가리키며 인류는 십자가(생명나무)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살과 피(생명나무의 실과)를 먹어야만 다시 영생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요 6:51)’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요 6:54)’

그렇다면 이 신약시대의 선악나무는 무엇을 가리키는가?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굳게 세워진 하나님의 도덕율법 십계명을 가리킨다.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롬 3:31)’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신약시대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의 에덴에 다시 한 번 생명나무(십자가)와 선악나무(율법)를 세우셨다. 그것을 예레미야 선지자는 아래와 같이 예언하고 있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세울 언약(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맺어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렘 31:33)’

결론적으로 창세기 에덴동산의 생명나무와 선악나무, 그리고 현재 그리스도인들의 마음 판에 심어진 십자가와 율법은 각각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나타낸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것들을 통해 우리 인류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 영생을 누릴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공의(율법)를 저버리면 영생을 잃게 될 것이라는 영적인 교훈을 알려주시고자 함이시다.

[한국기독교침례회 조예식 목사]

‘그 동산 가운데는 생명나무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게 하셨더라(창 2:9, kjv)’ 생명나무는 예수 그리스도이며 영생의 말씀이다. 계시록 2장 7절에 나온다. ‘이기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 가운데 있는 생명나무의 것에서 주워 먹게 하리라’

즉 에베소교회에게 하신 말씀이다. 에베소는 철학의 중심지였다. 다산의 여신 다이아나라는 여신을 섬겼다. 이 여신은 풍요와 증식력의 신이었다. 신전은 대리석과 은제품으로 되어있었다. 이것으로 돈을 벌고 있었던 자들은 바울의 복음 전파로 방해를 받아 수입이 적어질까봐 바울사도를 박해하였다.

오늘도 일부교회는 말씀은 예수를 말하지만 실제로는 돈이 목적이다. 돈이 들어오지 않으면 건물이 경매당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오직 생명에 관심이 있다. 한 생명이 구원을 받을 것인가에만 초점이 있다. 그러나 오늘날 거대주의와 성전 중심의 교회당은 생명과는 관심이 멀어지고 있다. 에베소인이 우상을 섬기듯 성장주의의 신앙관은 생명의 나무의 열매에서 나오는 것을 먹지 못한다. 다시 말하면 썩을 육신이 예수님을 통하여 변화 되었다는 사실이 복음보다 앞서 있다. 썩을 육신은 육신이다.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세상의 탐심과 명품주의 예배당을 선호함으로 창세기의 네 개의 생수의 강물을 마시지 못하고 있다. 생명나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말씀으로만 계셨던 그 분이 육신을 입고 오셨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변화이며 창조이다. 벌레들에 뭘 얼마나 바뀌겠다고 야단법석인지 모르겠다. ‘종’이 개과 이면 개인 것이다. 하나님을 믿었다고 개가 인간 되는 것 아니다. 오직 믿음으로 의인이 된 것이다. 개가 인간 되었다고 가르치는 종파는 생명나무이신 예수가 없다.

‘그 강은 도성의 거리 한 가운데로 흐르고, 그 강의 한 쪽 위에는 생명의 나무가 있어서 열두 종류의 열매들을 맺되, 달마다 열매를(계 22:2)’

이러한 작자들은 천국이신 예수 안에 들어가지 못한다. 이 땅위에 도성을 짓느라 난리다. 이 땅위에 지옥의 도성을 짓느라 교회들은 은행의 노예가 되어 있다. 교인들도 마찬가지다. 영원하신 도성에는 값없이 들어가는 것이다. 성전 세는 주님께서 이미 지불하셨다. ‘선악나무’는 잘못되었다. 도성의 모든 나무에서 나는 것은 모두 먹을 수 있지만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 나는 과실은 먹어서는 안 된다. 버섯에 독이 들어 있는지 알지 못하는 자가 독이 없는 줄 알고 먹었으면 먹은 사람이 잘못이다. 버섯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지성소에 들어가려면 피 없이 들어가면 즉사 하는 것이었다.

‘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들의 피를 가지고 성소 안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이 주님께서 자신을 자주 드려야 할 필요가 없으리니(히 9:25)’

예수 ‘피’ 없이 예수 안에 있는 자들은 이미 독사에 물린 자들이다. 독사에 물려서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살아가고 있다. 신이 된 것처럼 착각하고 살고 있다.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예수님이다. 선은 예수님의 피의 공로를 아는 것이며, 악은 피의 공로 없이 날뛰는 신앙이다. 독사의 독에 물렸으니 뛸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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