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백은영 사진제공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 성 바실리 대성당과 붉은 광장19세기의 성 바실리 대성당과 붉은 광장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사진이다. 붉은 광장(Krasnaya Ploshchad, Red Square)은 러시아 연방 모스크바의 중앙부, 크렘린 성벽의 북동쪽에 접한 광장으로 다갈색의 포석(鋪石)이 깔려 있다. 성 바실리 대성당과 크렘린 쪽의 레닌 묘, 북서단의 역사박물관 등 아름답기로 유명한 역사적인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15세기 말부터 크렘린 정면의 광장이 됐으며, 차르(러시아나 불가리아 등 정교회 슬라브족
[천지일보=백은영 기자] 이번에는 세계 각국의 역사와 문화를 들여다보는 시간을 마련했다. 러시아를 시작으로 12개국의 19세기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흔치 않은 시간. 그 과거로의 여행에 여러분들을 초대한다. ‘100년 전 세계문화기행’의 첫 번째 주자는 ‘러시아’다. 러시아는 일본과 중국 못지않게 우리나라의 근현대사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는 나라다. 을미사변 이후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과 왕세자가 1896(건양 1)년 2월 11일부터 약 1년 간 왕궁을 떠나 러시아 공관(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 ‘아관파천’이 그중 하나다. 당시
글 백은영 사진제공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 건어물 창고부산에 있는 건어물창고에서 지게에 건어물을 싣고 있는 모습이다. 닭장수닭을 어리에 넣고 짊어지고 팔러 다니는 닭장수의 모습이다. 어리에 닭을 집어넣고 이 마을, 저 마을 다니는 것보다 더욱 힘든 것은 닭벼룩으로 인한 가려움증이다. 특히 곰박사리(외부기생충)로 인한 가려움증은 그 고통이 상당했다고 한다.
글 백은영 사진제공: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 화목상인의 배화목(火木: 땔감으로 쓸 나무)을 실어 나르는 화목상인의 배로 앞쪽에 항아리처럼 보이는 것은 식수를 담은 통이다. 명태 장수1903년 당시 지금의 부산 데파트 인근에 있던 낭화여관 주변에 형성된 건어물시장. 낭화여관 앞에 지게와 노상에 명태 등의 건어물을 펼쳐놓은 노점상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남포동 건어물상가의 오랜 역사를 잘 보여주고 있는 사진이다.
글 백은영 사진제공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 인력 궤도차수압식철도(手押式鐵道)는 사람이 객차나 화차를 미는 방식으로 된 철도를 말한다. 인차철도(人車鐵道) 또는 인차궤도(人車軌道)라고도 부르며, 사람의 힘으로 밀어야 하기 때문에 객차의 정원은 많아야 4명이었다. 당나귀를 탄 비숍 여사영국 잉글랜드 출신의 19세기 여행가이며, 지리학자이자 작가인 이사벨라 버드 비숍(Isabella Bird Bishop)은 1894년 처음 한국에 방문, 이후 3년 동안 조선과 중국을 자주 방문하면서 고종과 명성황후를 알현했다. 비숍 여사는
글 백은영 사진제공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 땔감장수구한말 땔감을 장에 팔러 가는 땔감장수의 모습이다. 황소가 힘이 좋다고는 하지만 정말 많은 양의 땔감을 지고 있는 모습이 애처롭게 느껴진다. 나무장수산에서 나무를 해다 파는 사람을 일컬어 나무장수라고 한다. 아직 연탄이 보급되기 전인 6.25전쟁 직후까지만 해도 나무장수를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주로 밥을 짓거나 방을 따뜻하게 하기 위해 나무를 사용했는데, 땔감으로 사용된 나무로는 솔잎만을 모아 두부모 자르듯 반듯하게 자른 솔가리, 솔가지, 통나무를 쪼갠 장작, 말라
글 백은영 사진제공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 마포나루 황포돛배, 마포나루 소금집산지 (1910)예로부터 마포나루터(현재 서울 마포동과 용강동 일대)는 소금과 새우젓 집산지로 유명했다. 조선시대 경기도 일대 소금과 젓갈은 모두 이 마포나루에 집결돼 ‘마포염’이라는 말도 생길 정도였다. 염전 하나 없는 마포였지만 마포의 소금은 유명했으며, 나루터에는 창고를 지어 소금, 젓갈, 생선 등을 위탁 판매하거나 중개했다.황포돛배는 바로 이렇게 각종 물물교역을 담당하는 고유의 배로서 그 역할을 톡톡히 했다. 상인들은 한강의 수로를 이
글 백은영 사진제공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 물장수물장수는 아침, 저녁으로 각 가정에 물을 배달하는 사람을 이르는 말로 당시 서울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직업 중 하나였다. 1910년대 서울 시내의 우물 수는 총 1만 1410개였지만 이 중 9911개가 식수로 사용하기에는 부적당했다고 하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물장수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특히 수질이 좋기로 소문난 우물(정동제일교회에 있던 우물도 그중 하나)은 인기가 좋았는데, 수질이 좋은 곳의 물은 주로 부유층들이 거래했다. 물
글 백은영 사진제공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 목재 운반다섯 명의 사람이 자기 몸집보다 훨씬 크고 무거운 목재를 운반하는 모습으로 이들 중 두 명은 앞을 볼 수 없는 사람들이다. 사진을 잘 보면 손에 밧줄을 쥐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는 서로에게 신호를 보내기 위한 것으로 이를 통해 앞을 보지 못해도 일에 동참할 수 있었다. 물장수꽁꽁 언 한강의 얼음을 깨고 물을 긷는 물장수의 모습이다. 그 앞으로 어린 소녀가 동생을 안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물장수가 처음 등장한 시기는 대략 1800년 전후로 잡는데, 여기에
글 백은영 사진제공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 나룻배마포나루나 토진나루, 강창나루 등 당시 강을 건너기 위해서는 많은 나룻배들이 필요했다.당시 나룻배는 사람뿐 아니라 소와 같은 가축도 함께 운반하는 수단으로 널리 사용됐다.특히 낙동강 700리 중 상주 낙동강에는 크고 작은 나루가 12개나 존재했다고 하니 각 나루마다 운행되던 나룻배의 수도 많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가마조선시대 가마는 그 종류도 다양했지만 사람을 태워 이동하는 수단이라는 점에서는 그 맥을 같이 한다. 사진 속에 보이는 가마는 여인들이 타던 것으로 벽면에
글 백은영 사진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 아이 장사꾼수십 켤레의 짚신 옆으로 제 몸집만한 짐을 짊어진 아이 장사꾼의 모습이 보인다. 과거에는 짐을 나르고 일을 하는 데 있어서 어른, 아이의 구분이 없었다고 볼 수 있다. 비교적 물품의 무게가 적게 나가는 경우 사진에서 보이는 것처럼 아이 장사꾼도 적지 않았다. 짚신장수짚신을 동그랗게 엮어 여러 개의 짚신을 한번에 들고 갈 수 있게 만들었다. 짚신장수 역시 곰방대를 물고 있는 모습에서 당시 곰방대가 유행했음을 알 수 있다. 전차 대기실 음식점(1910년)당시 음식점에도 친
글 백은영 사진제공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 청계천의 만물상점없는 게 없다는 만물상점의 모습이다. 사진 속에서 보이는 물품만 해도 그 개수가 다양하다. 짚신 가게당시 짚으로 엮어 만든 짚신은 서민들에게는 중요한 필수품이었다. 햇살에 눈이 부셨는지 얼굴을 살짝 찌푸린 아낙과 마루에 앉아 곰방대를 물고 있는 갓을 쓴 할아버지의 모습이 대조적이다.
글 백은영 사진제공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 소쿠리장수돗자리, 소쿠리 등 대나무로 만든 각종 생필품을 파는 가게의 모습을 담았다. 피륙장수행상을 하지 않고 전에 내고 파는 피륙장수의 모습이다. 내다 파는 상품의 종류도 다양하다.
글 백은영 사진제공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 대동간변의 항아리들대동강변에 쌓아 놓은 항아리의 수를 헤아리기 어렵다. 당시만 해도 항아리, 장독이 없는 생활은 거의 불가능했다. 식품을 저장하는 주요 수단이었기에 그만큼 생활하는 데 있어 없어서는 안 될 생필품이었다. 엿장수당시 비교적 어린 아이들 중에는 엿장수가 많았다. 부피나 크기도 그리 크지 않고 무게도 많이 나가지 않아 휴대하기가 다른 장사꾼들에 비해 용이했다.
글 백은영 사진제공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 지게꾼들100여년 전 한국을 방문한 외국인들의 눈에는 많은 것들이 생경하게 보였다. 흰옷을 즐겨 입는 모습조차 신기해했다. 미국의 소설가이자 사회평론가인 잭 런던은 조선에 4개월 정도 체류하면서 자신이 본 조선의 모습을 기록했다. 그의 기록은 냉소적이었으며, 냉혹했다. 그의 기록 중 하나를 소개한다.“이 행렬 중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색깔이라고 할 수 있는데, 짐꾼들이 조선 풍습에 따라 입은 옷은 엉뚱하게도 흰색이었다. 마치 커다란 눈덩이들이 시커먼 강 위를 떠다니는 것 같
글 백은영 사진제공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 지게꾼들100여년 전 한국을 방문한 외국인들의 눈에는 많은 것들이 생경하게 보였다. 흰옷을 즐겨 입는 모습조차 신기해했다. 미국의 소설가이자 사회평론가인 잭 런던은 조선에 4개월 정도 체류하면서 자신이 본 조선의 모습을 기록했다. 그의 기록은 냉소적이었으며 냉혹했다. 그의 기록 중 하나를 소개한다.“이 행렬 중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색깔이라고 할 수 있는데, 짐꾼들이 조선 풍습에 따라 입은 옷은 엉뚱하게도 흰색이었다. 마치 커다란 눈덩이들이 시커먼 강 위를 떠다니는 것 같았
글 백은영 사진제공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 짐꾼들의 모습(1910년대)1910년대 서울 거리에서 일거리를 기다리는 짐꾼들의 모습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여전히 흰옷을 즐겨 입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직 일거리를 받지 않은 상태이지만 지게를 지고 기다리고 있는 모습 속에서 삶의 고달픔이 묻어나는 것만 같다. 비록 가난하고 고달픈 삶을 살았지만, 가난하다고해서 삶의 의지마저 가난하지 않았던 우리네 많은 민중들의 모습이 아닌가 한다. 닭 시장닭과 달걀을 파는 닭 시장의 모습이다. 남녀노소 불문 없이 닭 시장에 나와 손님을
글 백은영 사진제공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 박람회는 농·상·공업에 관한 각종 물품을 모아 놓고 판매선전 우열 심사를 하면서 생산물의 개량·발전 및 산업의 진흥을 꾀한 행사다. 1851년 영국에서 시작된 이래 산업의 전신이자 ‘제국’의 전시로 각지에서 개최됐다. 일본도 대한제국을 식민지로 삼은 이후 몇 차례의 대규모 박람회를 개최했다. 1929년 9월 경복궁에 마련된 조선박람회도 그중 하나다.또한 조선박람회는 조선총독부가 20년간의 통치 실적을 일본 본국에 보임으로써 조선 산업에 대한 일본인들의 투자를 이끌어내기 위한
글 백은영 사진제공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 물건을 지고 메고 쌓을 수 있다면 그 어디나 시장이 되었다. 한 두 사람이 모여 사고 팔 수 있다면 그곳이 시장이고 그곳이 가게였다. 100여 년 전, 우리네 삶은 풍요롭진 않았지만 삶을 이어가기 위한 노력과 열정은 남달랐다. 제 몸집만한 짐을 어깨에 멘 어린아이부터 혼자서는 도저히 질 수 없을 것만 같은 짐을 한가득 지게에 짊어진 어른들에 이르기까지, 생계를 위한 것에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다.이번에 소개되는 사진 중에는 숭례문과 소의문 사이에 형성돼 조선 후기 종루, 이현
글 백은영 사진제공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 맷돌 갈기밀이나 메밀 같은 곡물과 물에 불린 콩 등을 가는 데 쓰는 농기구다. 일종의 수동식 믹서기라고 할 수 있다. 위와 아래 두 짝으로 구성되며, 아래짝 가운데에는 중쇠(숫쇠)를, 위짝에는 암쇠를 박아 끼워서 서로 벗어나지 않게 한다. 위짝에는 곡식을 집어넣는 구멍이 있으며, 아래짝 위에는 곡물이 잘 갈리도록 판 구멍이 있다. 맷돌을 돌리는 손잡이를 어처구니라고 한다. 매통 돌리기매통은 벼의 껍질을 벗길 때 쓰는 농기구로 목마(木磨), 나무매, 매, 통매로도 부른다.매통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