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백은영 사진제공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

 

칠패(七牌)시장 (제공: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 ⓒ천지일보 2020.1.23
칠패(七牌)시장 (제공: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 ⓒ천지일보 2020.1.23

물건을 지고 메고 쌓을 수 있다면 그 어디나 시장이 되었다. 한 두 사람이 모여 사고 팔 수 있다면 그곳이 시장이고 그곳이 가게였다. 100여 년 전, 우리네 삶은 풍요롭진 않았지만 삶을 이어가기 위한 노력과 열정은 남달랐다. 제 몸집만한 짐을 어깨에 멘 어린아이부터 혼자서는 도저히 질 수 없을 것만 같은 짐을 한가득 지게에 짊어진 어른들에 이르기까지, 생계를 위한 것에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다.

이번에 소개되는 사진 중에는 숭례문과 소의문 사이에 형성돼 조선 후기 종루, 이현과 더불어 서울의 3대 시장으로 급부상했던 칠패(七牌)시장의 모습도 있다. 칠패시장은 특히 어물의 거래가 활발했다.

당시 시장에서 없어서는 안 될 이들이 있었으니 바로 짐꾼이었다. 그들에겐 지게가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지게꾼들은 제 몸보다 훨씬 크고 무거운 짐을 져야 했고, 당시 조선에 방문한 외국인들에게 이 모습은 너무도 놀라운 일이었다.

미국의 소설가이자 사회평론가인 잭 런던이 조선을 방문하고 기록한 ‘잭 런던의 조선사람 엿보기-1904년 러일전쟁 종군기’에는 조선인들의 ‘짐을 지는 능력’을 보고 놀라워하는 내용이 서술돼 있다.

과거의 아픈 역사이기도 한 ‘조선박람회’ 때의 사진도 볼 수 있다. ‘조선박람회’는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20년간의 통치 실적을 일본 본국에 보여 조선 산업에 대한 일본인들의 투자를 이끌어내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었다. 이외에도 청계천 만물상점, 짚신장수, 피륙장수 등의 모습을 만나볼 수 있다.

 

칠패(七牌)시장 (제공: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 ⓒ천지일보 2020.1.23
칠패(七牌)시장 (제공: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 ⓒ천지일보 2020.1.23

칠패(七牌)시장

칠패(七牌)시장은 숭례문(남대문)과 소의문(서소문) 사이에 형성된 시장으로 사진은 19세기 말의 모습이다. 칠패는 어영청의 7패 순찰대의 초소가 있었던 데서 유래된 명칭이다. 이곳은 남대문에서 무악재를 넘어 평양 의주로 가는 의주대로와 아현을 넘어 마포로 가는 길 그리고 용산에서 올라오는 길 모두가 만나는 곳이었다. 이러한 교통요지로 인해 칠패는 종루, 이현과 더불어 조선 후기 서울의 3대 시장으로 급부상했다. 주로 미곡, 포목, 어물 등을 거래했으며, 특히 어물 거래가 활발해 동부채(東部菜) 칠패어(七牌魚)라는 말이 생길 정도였다. 당시 칠패시장에서 거래된 어물의 종류는 '한양가'에도 잘 나타나 있다. 민어, 석어, 수석어, 도미, 준치, 고등어, 낙지, 소라, 오징어, 조개, 새우, 전어 등이 '한양가'에 언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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