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호익 동북아공동체ICT포럼회장/한국디지털융합진흥원장정부는 2030년까지 민관 합동으로 기후테크 산업에 145조원을 투자해 유니콘(기업가치 1조원 기업)을 10개 육성하고 수출 100조원을 달성하며 신규 일자리 10만개를 창출하기로 했다. 세계 각국이 탄소중립을 이행하기 위해 막대한 투자를 하는 상황을 활용해 국내 기후테크 산업을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키우기로 한 것이다.기후테크는 기후(Climate)와 기술(Technology)의 합성어로 탄소 감축과 기후 변화에 대응하는 혁신 기술을 말한다. 탄소중립녹색성장위원회는 기후테크를 크
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조선왕조(朝鮮王朝) 역대 국왕들중에서 가장 오랜 기간 재위한 국왕이 영조(英祖)였는데 52년동안 재위(在位)하였으며, 향년(享年) 83세를 일기(一期)로 승하(昇遐)했다. 인열왕후(仁烈王后)가 42세라는 젊은 연령(年齡)에 승하한 사실을 생각하면서 정조(正祖)가 동궁(東宮) 시절 여러차례에 걸친 생존의 위협을 느끼는 상황에서도 영조라는 든든한 버팀목이 있었기에 결국 왕위를 계승하였듯이 인열왕후가 좀더 오래 살았다면 소현세자(昭顯世子)와 강빈(姜嬪)에게 큰 버팀목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한다.한편 인열왕후가 승하
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1627(인조 5)년 1월 후금(後金)은 아민이 3만명의 군대를 이끌고 광해군(光海君)이 폐위(廢位)된 것에 대한 복수를 한다는 명분으로 조선을 침략했다. 압록강을 건너 의주를 점령한 후금의 주력부대는 용천, 선천을 거쳐 안주성 방면으로 남하했으며 일부 병력은 가도의 모문룡(毛文龍)을 공격하였다.이러한 후금의 침략에 대응하여 조선군(朝鮮軍)은 곽산의 능한산성(凌漢山城)을 비롯하여 곳곳에서 후금의 주력부대(主力部隊)를 막으려 했지만 실패하였으며 가도의 모문룡도 신미도로 패주(敗走)하게 되었다. 후금의 침략이
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흔히 ‘역사는 반복된다’고 하는데 이는 과거의 역사에서 뼈저린 교훈을 얻지 못하면 그러한 역사는 다시 반복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난 2012년은 소현세자(昭顯世子) 탄생 400주년이었는데, 브레이크뉴스에 “병자호란과 소현세자의 역사적 교훈 잊지 말자” 제하의 칼럼을 기고하였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시점에서 시대를 앞서갔으나 그 웅장한 포부를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소현세자의 생애를 재조명한다.소현세자는 1612(광해 4)년 한성부 회현방 사저(私邸)에서 인조(당시는 능양군)와 인열왕후(仁烈王
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윤문거(尹文擧)가 31세가 되는 1636(인조 14)년에 발생한 병자호란(丙子胡亂)의 시대적 배경에 대하여 살펴본다. 거슬러 올라가서 광해군(光海君)이 서인세력에 의하여 1623(인조 1)년 폐위된 이후 불과 4년 만에 전쟁이 발생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정묘호란(丁卯胡亂)이었다. 이와 관련해 정묘호란 당시 청나라는 후금(後金)이라는 국가명(國家名)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본래 후금은 건주 여진족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며 누르하치가 1616(광해 8)년 이러한 여진족을 통일하면서 세운 나라가 바로 후금이었다. 이러
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윤문거(尹文擧)는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난 해인 1623(인조 1)년에 평창이문(平昌李門)의 후손으로서 선교랑(宣敎郞)의 품계(品階)를 가지고 있었던 이전(李瑑)의 딸과 혼인하였는데 그로부터 4년 이후에 정묘호란(丁卯胡亂)이 발생하였다. 정묘호란은 병자호란(丙子胡亂)의 전주곡(前奏曲)이라 할 수 있는 전쟁이었는데 후금(後金)이 3만의 군사를 이끌고 조선을 침략하여 당시 인조(仁祖)는 강화도로 피신하고 소현세자(昭顯世子)는 전주로 피신하는 등 위기가 고조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결국 강화도에서 협상을 하
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1631(인조 9)년 인조(仁祖)가 승지(承旨) 강홍중(姜弘重)을 통하여 이원익(李元翼)의 집이 초가집 두서너 칸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고 깊은 감동을 받아서 새로운 집을 하사(下賜)하였다. 그러나 이원익은 극구 사양하였지만 인조의 의지가 강력하다는 사실을 알고 결국 살게 되었다고 하며 바로 이것이 현재 경기 광명시 오리로 347번길 5-6(소화동)에 위치하고 있는 관감당(觀感堂)이다.이원익은 1634(인조 12)년 1월 29일 향년(享年) 88세를 일기(一期)로 90 평생의 생애를 마쳤는데 청렴(淸廉)한
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정묘호란(丁卯胡亂)으로 인해 인조(仁祖)가 강화도로 피난하고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전주로 피난한 상황에서 후금(後金)이 강화 의사를 밝히자 조선(朝鮮)도 이를 수용하였다.이에 따라 조선은 후금과 형제(兄弟)의 맹약(盟約)을 맺는 대신에 후금의 군대는 철수하고 양국 사이의 경계를 압록강으로 하기로 하는 등의 화약(和約)이 체결(締結)되었다.그래서 그 결과 조선은 후금과의 전쟁을 종식 시킬 수 있었으며 후금과의 강화 조약(講和條約) 이후에도 명나라와 관계를 지속할 수 있었다.그러나 일단 전쟁을 종식하기는 했지만
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1627(인조 5)년 1월 후금(後金)은 아민이 3만명의 군대를 이끌고 광해군(光海君)이 폐위된 것에 대한 복수를 한다는 명분으로 조선을 침략하였다. 압록강을 건너 의주를 점령한 후금의 주력부대는 용천, 선천을 거쳐 안주성 방면으로 남하를 하였고 일부 병력은 가도의 모문룡(毛文龍)을 공격하였다.이러한 후금의 침략에 대응하여 조선군(朝鮮軍)은 곽산의 능한산성(凌漢山城)을 비롯하여 곳곳에서 후금의 주력부대(主力部隊)를 막으려 했지만 실패를 하였으며 가도의 모문룡도 신미도로 패주(敗走)를 하게 되었다.한편 후금의
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봉건제도가 무너지고 중앙집권이 확립되자, 제후를 봉하는 대신 공신이라는 명예와 관직을 주는 제도가 확립됐다. 논공행상은 더욱 중요한 문제로 대두됐다. 우리 역사에도 논공행상의 실패로 국가의 존립이 위태로웠던 사례가 있다. 이괄(李适)의 난이 그 사례이다. 이괄은 본관이 고성(固城)으로 무과에 급제해 선조 때 형조좌랑을 역임하고 광해군 12년에는 함경도 병마절도사로 임명됐다. 신경유(申景裕)의 협박에 가까운 권유로 인조반정에 참여한 그는 임진왜란 때 신립과 함께 탄금대에서 전사한 김여물(金汝岉)의 아들 김류(金瑬
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제국의 마지막은 언제나 처량하다. 대원제국을 몰아내고 한족의 정권을 세운 대명제국도 예외가 아니었다. 명의 마지막 황제 숭정제 주유검(朱由檢)은 천계제 주유교(朱由校)의 아우로 권력을 전횡하던 환관 위충현이 옹립했다. 초기에 그는 제법 성실하게 국정을 처리했다. 사서에 따르면 20대에 이미 머리카락이 백발로 변했고, 눈가에는 주름이 생길 정도로 스트레스가 심했다고 한다. 닭이 울면 자리에서 일어나 늦은 밤까지 정무를 처리하며 잠자리에 들지 않았고 노심초사하다가 과로로 병에 걸리기도 했으며, 궁중에서 화려한 잔치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이 하수상하니 올동말동 하여라”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라는 난세에 또 다른 축의 최명길(주화파)과 달리 명과의 의리를 지키고 청과 항전할 것을 굽히지 않았던 주전파의 대부 김상헌이 청나라 심양으로 끌려가면서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며 읊은 시조다.시대는 달라도 선조와 광해 그리고 인조의 정치외교사를 통해 오늘날 처해 있는 현실을 조명해 볼 수도 있다. 사색당파 즉, 동인과 서인, 남인들의 틈바구니에서 무능의 극치를 보여줬던 선조는 임진왜란이라는 치욕을 겪어야 했고, 이
평창올림픽 시계는 후반부를 가리키며 남북 및 북미 관계로 쏠리기 시작한다. 이는 이미 올림픽 시작 전 예측가능한 일이었으므로 모두가 준비하고 대비해 왔다. 하지만 이현령비현령이란 말처럼, 진영논리에 맞춰 예측과 주장만 난무할 뿐 뾰족한 답을 기대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북한의 비핵화 의지 없이는 특사니 정상회담이니 하는 것은 결국 북한 정권을 공고화시키는 데 일조할 따름이다. 6.15, 8.15 등 날짜를 특정하는 것도 어불성설이다. 북한의 입장 변화 없이는 대화의 의미는 없다. 혹자는 대화를 통해 북한의 변화를 이끈다는 논리로
1592년 왜(倭)는 대륙으로 나아가는 데 길을 내라며 조선을 침략하니 7년 전쟁 임진왜란이다. 이순신 장군은 ‘생즉사 사즉생’의 정신으로 싸웠고, 한편으론 명나라의 도움으로 왜적을 몰아낼 수 있었다. 조선과 명이 일본과 싸우는 혼란을 틈타 북방 여진족은 힘을 키웠고, 드디어 후금을 세워 명을 공격하기에 이른다. 위험에 처한 명은 조선에 지원군을 요청했으나 당시 임진왜란을 경험한 광해군은 이에 응하지 않고 대북파와 함께 명과 후금 사이에서 등거리 외교(중립 외교)로 어느 편에도 서지 않으며 실리를 쫓았다. 오늘날 사학자들이 광해를
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대부분 만주족의 청이 한족의 명을 멸망시켰다고 생각하지만, 명의 숨통은 농민반란을 주도한 이자성(李自成)이 끊었다. 이자성이 북경을 점령하자 명의 마지막 황제 숭정제(崇禎帝)는 매산(煤山)으로 올라가 자살했다. 시원찮은 황제였지만 반란군에게 치욕은 당하지는 않았다. 훗날 청왕조에 반항하던 한족은 그의 죽음을 대단한 것으로 묘사했다. 이자성은 국호를 순(順)로 정하고 칭제했다. 훗날 중국공산당은 이자성을 위대한 농민혁명가로 받들었다. 그러나 그의 군대는 북경 곳곳에 있던 대신들의 저택에 불을 지르고 창고에서 진
한병권 논설위원 80만 대군을 앞세운 거란의 1차 침입으로 고려가 누란의 위기에 처한 993년. 적장 소손녕은 고려 국왕이 거란 군영 앞에 와 항복하라고 종용했다. 고려 조정에서는 전세가 불리하니 투항하자는 안과 서둘러 서경 이북을 거란에 할양하고 강화하자는 안으로 갈려있었다. 이 때 목숨을 걸고 나선 이가 서희이다. 문신 출신인 불세출의 외교가 서희 장군은 치욕적인 강화안을 물리치고 자청해 국서를 들고 달려가 적장 소손녕과 담판을 벌였다. 거란의 침략은 고려와 송 관계를 단절시키는 것이 목적이었고, 전쟁 중인 송나라도 ‘내 코가
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누르하치는 평생 수많은 전투에서 거의 패하지 않았다. 그러나 영원에서 명의 원숭환(袁崇煥)에게 참패했다. 1622년, 누르하치는 명의 요동경략 웅정필(熊廷弼)과 요동순무 왕화정(王化貞)을 대파하고 광령(廣寧)을 탈취했다. 웅정필과 왕화정은 산해관으로 후퇴했다가 패전의 책임을 지고 참수됐다. 명조정은 손승종(孫承宗)을 요동경략으로 임명했다. 손승종은 원숭환을 등용해 영원성을 수축하여 전쟁준비를 완료했다. 누르하치는 명의 경략 따위는 우습게 여겼지만 경거망동하지는 않았다. 4년 동안 그는 내실을 다지는 데 주력했
최상현 주필 충주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치고 북상하는 왜군과 맞선 신립 장군이 전사하면서 조선군은 또 한번 허망하게 무너진다. 조총은 평지에서 큰 위력을 발휘하므로 앞이 개활지(開豁地)인 탄금대와 같은 곳에서의 배수진은 바람직하지 않으며 그런 곳에서의 몸을 드러낸 정면공격은 위험하다는 충고를 신립은 듣지 않고 무모한 공격을 감행했었다. 철석같이 믿었던 신립의 패전 소식에 선조는 조바심이 나고 몸이 달아 견딜 수가 없게 됐다. 그는 피난을 서둘렀다. 그런데 피난도 급하지만 임금에게 생길지도 모를 ‘만약의 경우’에 대비한 세자 책봉 역시
지금까지 우리나라 문교정책이 해결하지 못하는 게 있다. 그것은 한글과 한문의 관계다. 글은 그 민족의 영혼이자 정신이며, 나아가 역사며 문화다. 그러한 측면에서 볼 때, 우리 민족은 그 어느 나라도 가지지 못한 글을 가졌고 또 사용해 오면서도 늘 모호한 정체성에 혼란을 겪고 있다. 아니 모호한 정도를 넘어 늘 다툼과 분쟁의 원인으로 작용해 왔다. 우리가 아무리 유구한 역사와 문화를 자랑하고 강조한다 해도 우리 말 우리 글이 어디서부터 왔는지를 모른다면 무슨 소용이 있으랴.경복궁 남정문의 현판인 ‘광화문(光化門)’의 예를 들어보자.
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14세기 말까지 청황실의 시조 멍거테무르가 이끌었던 오도리(斡朵里)는 두만강 하류 훈춘과 중류 회령 일대에 살면서 조선에 부속된 작은 부락에 불과했다. 1423년, 명을 도와 타타르를 정벌하러 갔다가 타타르의 보복이 무서워 고토인 두만강 중류로 돌아올 때 그가 거느린 인구는 6500명에 불과했다. 조선과 명은 이들을 ‘야인’이라 불렀다. 건주여진은 내분과 외침에 시달렸다. 설상가상 조선이 두만강 유역에 6진을 개척하자, 건주좌위는 압록강의 지류 파저강(婆猪江) 유역으로 이동해 건주위의 오랑캐(兀良哈)와 합류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