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현 주필

 
충주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치고 북상하는 왜군과 맞선 신립 장군이 전사하면서 조선군은 또 한번 허망하게 무너진다. 조총은 평지에서 큰 위력을 발휘하므로 앞이 개활지(開豁地)인 탄금대와 같은 곳에서의 배수진은 바람직하지 않으며 그런 곳에서의 몸을 드러낸 정면공격은 위험하다는 충고를 신립은 듣지 않고 무모한 공격을 감행했었다. 철석같이 믿었던 신립의 패전 소식에 선조는 조바심이 나고 몸이 달아 견딜 수가 없게 됐다. 그는 피난을 서둘렀다. 그런데 피난도 급하지만 임금에게 생길지도 모를 ‘만약의 경우’에 대비한 세자 책봉 역시 급한 과제로 대두됐다.

이래서 선조는 하는 수 없이 소주방 출신 후궁인 공빈 김씨 소생의 둘째 아들인 광해군을 선택해 4월 29일 세자로 책봉한다. 내키지 않던 일이었지만 역시 공빈 김씨 소생의 서출로서 첫째 아들인 광포한 성격의 임해군이 일찌감치 제척된 상황에서 장성한 광해군 말고는 다른 대안이 없었다. 이처럼 국가 누란의 위기가 선조의 미움과 망설임으로부터 광해군을 살렸다. 바로 다음 날 선조 일행은 부리나케 도성을 빠져나간다. 왜군이 임금을 사로잡겠다고 전격적으로 도성에 들이닥친 것은 그로부터 불과 이틀 후인 5월 2일이다. 4월 13일 새까맣게 부산에 상륙한 때로부터도 겨우 20여 일이 지났을 뿐이다. 임진강을 서둘러 건너 평양에 도착한 선조는 자신이 관장하는 원조정과 별도로 그의 명을 받들어 세자로 하여금 조정 일을 보게 할 임시 소(小)조정인 ‘분조(分朝)’를 설립했다.

임금이 도성을 빠져나간 것을 알게 된 백성들은 궁궐과 관아에 불을 지르고 금은보석 등을 약탈했다. 임해군의 집에도 불을 질렀다. 심지어는 반란도 있었다. 시대에 관계없이 그 같은 일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온다 간다 말도 없이 백성들을 사지(死地)에 버리고 몰래 도성을 빠져나간 염치없는 행태는 백성들의 분격을 사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들 지배층의 군림과 영화(榮華), 그들의 삶의 열락은 바로 그 백성들의 충(忠)과 희생이 있어 가능한 것이었음에도 자기들만 살자는 것처럼 소리 없이 내뺀 것은 백성들에게 극도의 배신감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국가의 상징인 임금이 꼭 사지에 있어야 된다는 뜻이 아니다. 조정이 난(難)을 피하더라도 백성으로부터 몰래 도피하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되며 적어도 백성에게 알리고 백성을 걱정하고 조정이 어디에 있든 백성과 함께할 것임을 약속하고 천명하는 형태가 돼야 마땅하고 옳은 일이라는 의미일 뿐이다.

이것도 저것도 구차해 싫다면 쓸데없는 일에 국력과 정치력을 낭비하지 말고 미리 철저히 외침에 대비해 나라와 조정과 백성을 보호했어야 옳다. 그것이 궁극적이며 가장 실제적이고 진솔한 애민(愛民) 의식의 표현일 것이다. 입으로는 ‘백성은 나라와 조정의 근본’이라 말하면서도 실제 행동은 그 말과 부합하지 않았다. 당시 지배층의 애민 의식 수준이라는 것이 고작 그런 정도였다고 봐진다. 지금이라고 크게 다를 것은 없다. 그렇다면 ‘과거를 교훈삼아 앞일을 삼가하고 경계’하는 이른바 ‘징비(懲毖)’는 항상 이 시대 국가 지도자들이 가슴에 간직하고 자신의 얼굴과 양심을 비추어보는 맑은 거울과 같은 치세의 덕목이 돼야 한다.

‘도요토미가 조선을 침략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임금에 단언했던 통신 부사(副使) 김성일은 때마침 궁궐을 떠나 경상우병마절도사의 외직으로 나가 있었다. 왜의 침공 소식을 듣자마자 그의 거짓말에 화가 치밀어 견딜 수 없었던 선조는 그를 즉시 파직함과 동시에 당장 잡아들이라고 명령했다. 이에 김성일은 한양으로 끌려오고 있었다. 물어보나마나 그는 임금이 주재하는 친국의 형장에서 장하(杖下)에 죽어갈 것을 각오하고 있었을 것이 뻔하다. 그런 그가 경상우도초유사로 부임해 왜군과 싸워 공을 세움으로써 죄를 씻으라는 뜻밖의 어명을 듣고 오던 길을 되돌린 것은 충청도 직산쯤에서였다. 그때는 세자책봉 건의와 관련한 음모의 덫에 걸려 정철을 영수로 한 서인이 몰락함으로써 동인이 마침 조정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때였다. 그랬기에 그와 마찬가지로 동인인 류성룡 등의 구명 탄원으로 김성일은 기사회생할 수 있었다. 그는 그 왜란 중에 병사했다.

파죽지세의 진격 끝에 왜군은 침공 2개월여 만인 6월에 임금이 피난해 행재소(行在所)를 차린 평안도 일부와 전라도를 제외한 전 강토를 집어삼켰다. 그렇지만 그들의 기세도 이 정도가 한계였다. 그들에게도 곧 침공의 대가를 지불해야만 하는 고통스러운 시간이 찾아온다. 이순신이 우선 그들을 힘들게 만든 가장 두렵고 무서운 존재였다. 이순신 때문에 그들은 전라도에 얼씬도 할 수 없었다. 남해를 통한 서해 진출도 철저히 봉쇄당했다. 더 말할 것 없이 이순신에게 남해 전역의 제해권을 빼앗겼기 때문이다. 제해권을 빼앗겼다는 것은 전쟁을 지속 가능하게 해주는 그들의 후속 병력과 장비 무기 식량 의약품을 실어 나르는 바닷길이 막혔음을 의미한다. 그들은 마음 놓고 싸울 수가 없게 됐다. 그뿐만 아니라 경향 각지에서 의병들이 들불처럼 일어나 왜군의 허리와 배후를 치고 빠지기를 반복함으로써 막심한 피해와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이때에 용맹을 떨친 의병장들의 불후의 이름이 곽재우 고경명 조헌 김천일 정인흥 김덕령 등이다. 여기에 침공군 규모만큼의 명나라의 원군이 압록강을 넘어 도착함으로써 왜군은 서서히 남쪽으로 밀려 꼬리를 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볼 때 임진왜란은 도요토미가 생각한 대로, 그의 맘대로 풀려나갔던 전쟁만은 아니었다. 거꾸로 우리가 일방적으로 당한 전쟁만도 아니다. 만주의 신흥 세력 후금 누루하치의 위협 속에 명나라의 명운은 점차 기울어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린 법(脣亡齒寒/순망치한)’이므로 그들의 파병은 불가피했다. 결국은 그들을 위해 싸우기 위함이었다. 조선이 먹히면 그들 땅 역시 왜와의 전쟁터가 될 것이므로 조선에 미리와 남의 땅에서 자기들 전쟁을 치른 셈이다. 이렇게 해서 지도자들을 잘못 만난 조선은 16세기 동북아 최대의 전쟁이었던 임진왜란의 싸움터가 되고 말았다는 것을 치세의 경계와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