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병권 논설위원

 

80만 대군을 앞세운 거란의 1차 침입으로 고려가 누란의 위기에 처한 993년. 적장 소손녕은 고려 국왕이 거란 군영 앞에 와 항복하라고 종용했다. 고려 조정에서는 전세가 불리하니 투항하자는 안과 서둘러 서경 이북을 거란에 할양하고 강화하자는 안으로 갈려있었다. 이 때 목숨을 걸고 나선 이가 서희이다. 문신 출신인 불세출의 외교가 서희 장군은 치욕적인 강화안을 물리치고 자청해 국서를 들고 달려가 적장 소손녕과 담판을 벌였다. 거란의 침략은 고려와 송 관계를 단절시키는 것이 목적이었고, 전쟁 중인 송나라도 ‘내 코가 석자’라 원군을 보내달라는 고려 요청을 외면한 상황. 지피지기면 백전백승, 국제 정세를 읽는 눈이 비범했던 서희는 모든 상황을 꿰뚫고 있었다. 명분만 주면 거란이 더 이상의 전쟁을 원치 않을 것이라고 분석했고 이는 적중했다. 장군은 “송나라와의 관계를 끊겠다” “여진 때문에 거란과 왕래할 수 없다. 압록강 동쪽 280리 지역을 돌려주면 여진을 몰아내고 이 지역에 강동 6주를 쌓겠다”는 비장의 카드를 내놓았다. 고려는 신라의 후예이니 그 땅이 거란 땅이라는 주장에도 장군은 고려가 그 이름처럼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임을 분명히 했다. 이에 거란은 고려가 송과 국교를 단절하고 사신을 파견하겠다는 제의를 수용하고 군대를 전격철수 시켰다. 거란에 무릎을 꿇어야 할 국가적 재난 상황에 피 한방울 흘리지 않았고, 오히려 영토를 얻어왔다. 장군은 실로 ‘칼보다 무서운 혀를 가진 사람’이었다.

1010년 거란 성종이 40만 군사를 직접 이끌고 침입했다. 이 2차 침입은 고려가 목종을 폐위시킨 강조의 정변을 구실로 삼았다. 하지만 거란에 사대를 하지 않고 고려가 다시 슬그머니 친송 정책을 하는 것을 불쾌히 여겼다. 여기에 고려에 내준 강동 6주가 전략적 요충지임을 알고 되찾으려는 게 속마음이었다. 거란군은 수도 개경까지 함락시켰다. 이에 고려는 왕을 피난시킨 후 하공진 장군이 적진에서 외교담판을 벌였다. 거란은 장군을 볼모로 잡고 다시 군사를 철수시켰다. 하공진 장군이 “거란이 군대를 물리면 현종이 직접 황제를 알현할 것”이라고 한 데 따른 것이었다. 자고로 유세사의 말은 전쟁을 막기도 하고 전쟁을 불러오기도 한다. 2차 침입은 사신을 보내겠다는 서희의 약속을 고려가 지키지 않아서였고, 고려 현종도 굴욕적인 거란 방문을 하지 않았다. 서희와 하공진의 외교술은 전쟁의 참화를 막고 국방력 회복에 필요한 시간벌기를 위해 사용한 ‘세치 혀’ 외교 계책이었다. 인질로 잡혀간 하공진은 연경에서 거란 성종의 총애를 받았음에도 끝내 충절을 지키며 고려 귀환을 꾀하다 비참하게 처형됐다. 고려국왕이 거란에 와 인사 올리기로 한 약속을 깼다며 거란은 3차 침입을 했고, 고려는 71세의 원로장군 강감찬의 귀주대첩 등으로 거란을 격퇴했다. 잇따른 침입으로 거란이 고려 땅을 유린하려 했지만 강직한 신하들의 충성심과 애국심, 강대국 황제까지 쥐락펴락하는 신출귀몰한 외교술이 지혜롭게 국면을 전환시킨 것이었다.

“제발 고려(외교)를 배우라.”

광해군이 한 말이다. 송나라와 잠시 국교를 끊고 암중모색한 고려였다. 광해군은 현명한 외교술로 전쟁을 장기전과 협상으로 끌고 가면서 국방력을 튼튼히 해 외적을 물리친 고려를 부러워한 것이었다. 조선도 당시 신흥강국 후금과 존망의 기로에 선 명나라 사이에서 절묘한 균형외교를 펼친다. ‘광해군일기’에 따르면 명·청 교체기에는 고려처럼 안으로 스스로 강화하면서 밖으로 견제하는 계책을 써야 나라를 보전할 수 있는데 조선 무장(武將)들이 고려와 견주면 너무도 미치지 못한다고 질책했다. 지금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일 아니겠는가.

하룻밤만 자고 일어나면 수위를 한층 높여가는 미국과 북한의 말폭탄, ‘치킨게임’이 극에 달하고 있다. 뛰어난 ‘거래기술자’임을 자처하는 트럼프의 막말과 자존심을 건 북한 김정은 위원장의 북핵·미사일 질주가 충돌하고 있다. 둘 다 치밀하고 둘 다 변칙에 능해 보인다. 일촉즉발의 위기감이 감도는 이런 상황에서 우리의 위기대응능력과 비핵(非核)군사력에 의한 한반도전쟁 억지력이 어느 정도인지, 전쟁과 평화 중 문재인 정부가 과연 언제까지 평화 쪽을 고수할 수 있을지, 또한 한반도 평화의 종말과 전쟁 시작을 결정하는 비상 버튼에 한국이 어느 정도 주도권을 행사할 수 있는지 실로 국민은 궁금하다. 평창동계올림픽이라는 초유의 긴장완화 호재도 빛을 보지 못하고 전쟁이냐 평화냐, 운명의 날이 차츰 다가오고 있는 것만 같은데 도무지 국면전환 조짐이 없으니 불안감이 씻어지지 않고 있다. 외교·안보 책임자들은 알아야 한다. 최악의 국가 위기 상황에서 더욱 빛난 고려의 외교, 만에 하나라도 이를 북한이 이어받은 것으로 후대의 역사가들이 평가하지나 않을지, 아니면 우리야말로 그 적자(嫡子)인지 판명될 날도 가까워지고 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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