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자아(自我)는 무의식 가운데서도 늘 누군가를 기다리며 살아왔고 또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그 ‘누구’는 과연 누구일까.어쩌면 인생은 그 누구를 막연하게 ‘님’이라 여기며 기다려왔고, 그리움의 대상으로 늘 사모하며 그리워했는지도 모른다.그렇다면 그 그리움의 대상인 님의 실체는 누굴까. 그 님의 실체는 생명이며 나아가 생명을 주는 그분 바로 창조주 하나님이시다.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신 유일하신 창조주 하나님 말이다.사망 권세 아래 있는 이 세상에서 아니 생로병사의 굴레 속에서 영원히 함께하는 생명보다 더 귀한 것이 어디 있으며
지금은 천지분간(天地分揀)의 때다. 오랜 세월 민간에 전해 온 ‘천지분간 좀 하며 살라’고 한 것도 이때를 염두에 둔 말이다. 경(經)의 시작과 끝에도 ‘천지’며, 한자 공부의 시작도 ‘천지’다. 이는 천지분간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리는 증거가 된다. 하지만 지금의 때는 형이하학적 차원이 아닌 형이상학적 차원의 시대라는 정도는 알아야 한다. 즉, 문자 그대로도 아니며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의미다. 다시 말해 눈에 보이는 것을 통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알고 찾아야 하는 시대 즉, 형이상학적 차원의 시대니 곧 계시(啓示
송구영신, 이 사자성어는 조선 중기 유학자이자 천문학자인 격암(格菴) 남사고 선생의 격암유록에서 비롯됐다.이 송구영신이라는 네 글자에 대해 많은 이들은 해마다 찾아오는 연말연시가 되면 의례히 대문 또는 교회 등에 붙이고 가는 해를 아쉬워하며 오는 해를 맞이한다.물론 그 자체가 크게 잘못됐다고 지적하고 싶지는 않다.하지만 격암선생이 신(神)으로부터 받은 ‘송구영신’의 참 의미는 한 해의 해넘이와 해맞이를 넘어 시대적 의미를 담고 있다는 데 주목해야 한다.‘옛 구(舊)’와 ‘새 신(新)’자를 통해 가고 오는 한 해가 아닌 창조주 하나님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 아나니, 이와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마 24:32~33)”고 했다. 또 있다. “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변할 줄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변치 못하느냐, 또 어찌하여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치 아니하느냐(눅 12:56~57)”라고 했다.필자가 이 같은 글을 쓰는 데는 일반적인 글을 쓸 줄 몰라서가 아니다. 지금 이 시대가 듣고 읽고 알고 깨달아야 하는 것은 이 세상의 없어질 글이 아니라
세상은 참으로 하 수상(殊常: 몹시 괴이하고 뒤숭숭함)하다. 추측은 무성하지만 알 수 없는 질병이 팬데믹(세계적 유행)화 되며 인간의 편리성을 위해 만들어 놓은 모든 이기적 문명을 정지시키고 지구촌의 모든 질서를 한순간에 멈춰 세워놓고 있다.“태산이 높다 한들 하늘 아래 뫼”라는 시조가 문득 뇌리를 스치는 순간이다. 인생을 자랑하지 말라는 글귀도 스쳐지나간다. 인간의 생명이 이렇게 허무하게 죽어가는 현장을 하늘은 우리에게 생생하게 목도하게 하며, 우리는 언젠가부터 생명의 존엄성마저 상실해지고 또 무너져 가며 나도 모르는 사이에 허무
만추(晩秋)!, 가을은 깊어가고 어느덧 겨울의 문턱에 서 있다. 이른 봄에 밭에 나가 씨를 뿌리는 농부의 마음은 어디에 있었을까. 풍년을 소망하며 잘 익은 곡식과 열매를 거둬 곳간에 들일 생각에 기쁜 마음으로 이른 아침부터 밭에 나가 씨를 뿌렸을 것이다.지금 들녘엔 익은 곡식 하나라도, 열매 하나라도 놓칠세라 농부의 애타는 마음이 낫에 실려 분주히 마지막 추수를 하고 있다.혹여 추숫군이 휘두르는 낫에 미처 걸리지 못해 타작마당으로 옮겨져 오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조바심 섞인 농부의 마음이 다시 한번 느껴지는 풍경이다.물론 밭 한켠,
올해 지면에 마지막으로 올리는 시론이다. 정유년 한 해를 보내고 무술년 새해를 맞이해야 하기 때문이다. 흔히 이를 일컬어 송구영신이라 한다. 하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잘못된 해석이다. 본래 송구영신(送舊迎新)이란 송년과 신년을 넘어 한 시대를 끝내고 새로운 시대를 맞이한다는 광의의 개념이다. 그러면 왜 끝내야 하고 또 맞이해야 하는가. 그것은 부패하므로 새로운 시대가 요구되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때가 예고 없이 가고 오는 것은 아니다. 그러면 어떻게 예고되고 때가 오는지를 살펴보자.나라가 위태롭고 백성들이 도탄에 빠진 암울한 시대
지난 11월 30일 새벽 3시 17분 북한은 ICBM(대륙간탄도미사일) 화성-15호를 발사했다. 사거리 고도 성능까지 초고도화 된 미사일로 미국 워싱턴은 물론 지구촌 어디라도 공격 가능단계에 이르렀음을 대내외에 과시하는 성격이 컸다. 미국은 이를 좌시하지 않겠다는 반응이 즉시 나오면서 제재와 봉쇄와 연합훈련카드로 맞서며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위기는 또 다시 맹추위와 함께 한반도를 뒤덮고 있다. 이 같은 상황을 두고 세간에는 지구의 종말이 오는 것은 아닐까 두려워하는 이도 많다고 한다. 하지만 과거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상황이 악화
김영주 무궁화사랑협의회 회장 “이 세상을 밝게 비칠 지도자(성인)가 진사년에 출현해 오미년에 집집마다 즐거움이 있고, 병신정유년에 왕손이 등극해 화란(전쟁)을 다스리고 평화의 길로 인도한다.”14일은 인류가 꿈 꾼 완벽한 전쟁종식의 서막을 여는 날이다. 하늘문화세계평화광복(HWPL, 대표 이만희)이 추진 중인 전쟁종식 세계평화 국제법의 선언문이 공표되기 때문이다. HWPL이 추진 중인 전쟁종식 국제법은 기존의 법을 보완하는 것을 넘어 전쟁의 근본 발발을 완벽하게 막아내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어 그 의미가 남다르다. 실질적이고 완벽한
2014 갑오년(甲午年), 갑오년의 청마는 힘차게 달려왔고, 이제 그 달음마를 멈추려 한다. 그리고 그 바통을 을미년(乙未年) 청양에게 넘기려 하고 있다. 만물이 고대하던 을미년 새해가 밝아오고 있는 것이다. 푸른 초장에서 한가롭게 풀을 뜯는 양처럼 생명과 평화가 어느새 가까이 와 있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는 어느 시인의 싯귀처럼, 또 “폭풍이 지난 뒤엔 고요가 온다(After the storm comes the calm)”는 서양의 속담처럼, 청마는 그렇게 힘겹고 억척스레 달려와
5월의 산은 아름답다.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로 시작되는 미당 선생의 ‘푸르른 날’이 절로 생각나는 계절이다. 높은 산에 올라보니 아직 초록이 오기 전, 마치 산에 비단을 깐 듯 옅기도 하고 때론 짙기도 한 연두의 빛깔은 참으로 눈이 부실 지경이다. 이처럼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5월의 산에서 색다른 걸 깨닫는다. 산에는 이처럼 아름다움만 있는 게 아니라 갖가지 사연과 함께 역사를 간직하고 있으며, 미래의 문화가 담긴 종교와 신앙이 살아 있다. 우리 민족은 산과 함께 시작해 산과 함께 살아 왔고 지금도 산
‘도행역시(倒行逆施)’ 교훈 삼고군자의 면모와 소통의 길 열어‘오미락당당(午未樂堂堂)’의 한 해 실현되길 매년 교수신문은 전국 대학교수(662명)를 상대로 ‘올해의 사자성어’를 설문과 투표를 통해 선정해 왔다. 지난 2012년에는 ‘올해의 사자성어’로 온 세상이 모두 탁하다는 의미로 ‘거세개탁(擧世皆濁)’이 선정되기도 했다. 거세개탁이 선정된 배경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게다. 우선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이명박 전 대통령의 임기 만료를 앞두고 나타나는 일종의 권력누수현상(레임덕현상)이기도 했겠지만, 꼭 그렇게 치부해 버리기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수많은 성인들이 오늘날을 잘 예언해 놨다. 힘과 권력이 통하는 물질문명이 지배하던 시대는 가고, 참 도의(道義)가 통하는 정신문명이 지배하는 시대가 도래 할 것이라고 말이다.1919년 3월 1일 민족종교지도자 33人(기독교16, 천도교15, 불교2)이 낭독한 기미독립선언서는 그 날의 암울한 현실을 들어 도래할 새 시대를 감추어 담아 놓은 예언적 메시지였음을 깨달아야 한다. 이를테면 “아아! 신천지가 안전에 전개되도다. 위력의 시대가 거하고 도의의 시대가 내하도다. 과거 전세기에 연마 장양된 인도적 정신이 바야흐로
이 세상에는 많고 많은 종교가 있다. 그중에서도 유불선 삼도(三道)가 모든 종교를 대표한다. 왜 이 삼도가 대표 종교인가를 살펴보니, 사람의 도리를 설명하고 땅의 이치를 설명하며 나아가 하늘의 이치를 잘 설명하고 있으니 곧 ‘천지인(天地人)’이다. 이 유불선 삼도는 과연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 400여 년 전 조선의 유학자이자 천문학에 능통하던 남사고 선생은 그의 저서 ‘격암유록’을 통해 “상제예언(上帝豫言) 성경설(聖經設) 세인심폐(世人心閉) 영불각(永不覺),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에게 말씀하신 예언서인 성경말씀을 세상 사람들이 마음
‘아귀다툼’, 왠지 이 시대에 잘 어울리는 단어인 듯해 한편으론 친근하기까지 하다. 이는 나라 안팎이 일반이라 해도 무방하다. 특히 세계 각 나라의 대권경쟁이 몰려 있고, 특히 아시아를 중심으로 한 패권주의가 다시 부활하는 양상을 보이면서 아귀다툼은 그 어느 때보다 최고조에 달하고 있다. 이러한 세태 속에서도 현실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행보를 하는 이들이 있어 눈길을 끈다. 그 행보는 이렇다. 현자(賢者, 어질고 총명하여 성인에 견줄 만큼 뛰어난 사람)를 찾아 나선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때론 십승지(十勝地)를 찾아 나선 사람들도 만
이 시대는 과연 어떤 시대일까. 이 같은 의문을 갖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지 궁금하다. 지금 이 시대는 한 시대가 가고 또 한 시대가 오는 길목에 서 있다. 그러나 ‘세인하지(世人何知)’란 말과 같이 자기 삶에 골몰(汨沒)해 있을 뿐 이 시대의 흐름에 대해선 아는 자가 없고 관심 갖는 자도 없다. 예를 들면 마치 2천 년 전 유대 땅에서 있어졌던 일과 같다면 얼마나 이해할까. 당시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구약성경의 약속대로 이 땅에 와서 한 시대를 끝내고, 새로운 한 시대를 열었으나 당시 유대인들은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인정
이상면 편집인 자그마한 땅 덩어리를 가진 나라, 그러나 그 역사 속엔 참으로 수많은 얘기가 담겨 있다. 그 많은 얘기 가운데 오늘 한 가지를 해 보고자 한다. 바로 방랑시인 ‘김삿갓’에 얽힌 얘기다. 실존하지 않는, 그야말로 얘기로만 있을법한 존재가 바로 김삿갓 방랑시인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얼마 전 탐방 차 강원도 영월을 방문했을 때, 그는 엄연히 실존했으며 가슴 아픈 사연까지 간직하고 있었다. ‘아 그래서 삿갓을 쓰고 다녔구나’ 하고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본명 병연은 1807년 어린 나이(6세)로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평안
“기미년 삼월 일일 정오, 터지자 밀물 같은 대한독립 만세! 태극기 곳곳마다 삼천만이 하나로, 이 날은 우리의 의(義)요 생명(生命)이요 교훈(敎訓)이다.” 경술국치 100년을 맞는 해, 91년 전 오늘 민족대표 33인에 의해 독립선언문이 낭독되고, 이어 저들의 총칼 앞에서 대한독립만세가 울려 퍼지던 바로 그 날이다.그러면 왜 독립을 외쳐야만 했던가. 그것은 사로잡혔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왜 사로잡혀야만 했던가. 그것은 무지 때문이었다. 그 무지는 다름 아닌 부정과 부패를 생산했고, 그 부정과 부패의 개념은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