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그러나 비가 내리기 전에 개미들은 먼저처럼 움직이면서 같은 짓을 반복한다. 사실 여부가 무엇이 중요하겠는가? 노인의 마음속에는 이 개미들도 땅속으로 들어가 안전하게 지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개미는 오랜 중국사를 말없이 지켜온 무명의 백성들이다. 두보(杜甫)가 ‘춘망(春望)’에서 ‘국파산하재(國破山河在), 성춘초목심(城春草木深)’이라고 한 것처럼 나라는 말해도 산하는 그대로, 성에 봄이 오면 초목이 짙어진다. 개미와 노인은 왕조의 흥망과 무관한 산하와 초목이다. 그저 묵묵히 주어진 삶을
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북송 흠종 시기에 금군이 남하하여 동경 개봉부를 포위했다. 조구는 인질이 되어 금군의 병영으로 갔다. 여진인들은 그가 진짜 왕이라고 믿지 않았다.당연히 그를 돌려보내고 인질을 바꾸라고 요구했다. 강왕은 잽싸게 도망쳤다. 언제 여진인의 생각이 바뀔지 모른다. 다급하게 도망치던 그는 길가에서 주인이 없는 말을 발견했다. 말을 타고 강을 건너려고 하는데 말이 움직이지 않았다. 자세히 보니 진흙으로 만든 가짜 말이었다. 강왕이 진흙으로 만든 말을 타고 강을 건넜다는 전설은 관이 비었다는 전설과 잘 어울리는 황당한 스토
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이종의 영목릉이 가장 먼저 도굴되었다. 도굴꾼은 봉토를 허물고 지하궁을 파헤쳤다. 관곽을 끌어내어 뚜껑을 여는 순간 하얀 기운이 하늘로 치솟았다. 오랜 세월 묻혔던 주옥이 빛을 발휘한 것이다. 물론 과장된 소문일 것이다. 그러나 더 믿을 수 없는 것은 이종 조윤의 시신이 눈을 감고 잠자는 것과 같았다는 소문이다.베개는 칠보로 장식했고, 침상에는 호피(虎皮)가 깔려 있었다고 한다. 다리 곁에는 당(唐)의 경국지색 양귀비가 연주하던 천운금(穿雲琴)도 있었다. 연주하면 구름이 몰려와 휘감는다는 명품이다. 관의 네 모
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태녕사 주변에는 산이 큼직한 자락을 형성하고 있으며, 다섯 개의 봉우리가 앞에 버티고 있습니다. 상황을 여기 모시면 웅장한 푸른 산이 날개처럼 자미궁(紫微宮)을 감싸고, 백록(白鹿)의 빼어남을 갖춘 산들이 잇닿아 두 손을 모아 절을 올리는 것처럼 높은 기상을 품을 수 있습니다. 선제를 위해 활과 화살을 감추어야 할 곳이니, 만세에 흥륭하는 기쁨을 누릴 것입니다.”궁중에서 조칙을 내려 태녕사를 옮기고 송육릉이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 이 황토 언덕을 ‘조가오(趙家嶴)’로 개명하고, 궁을 옮겨왔다는 뜻으로 찬궁(欑
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조길은 화가로서는 성공했지만, 제왕으로서는 전혀 존중받지 못할 인물이었다. 그에 비해 여진(女眞)의 군주 금태종 완안성(完顔晟)은 아버지 아쿠다(阿骨打)에 못지않은 대단한 식견을 갖추었다. 그는 휘종에게 혼덕공(昏德公), 흠종에게 중혼후(重昏侯)라는 치욕스러운 봉호를 주었다. 휘종은 덕이라고는 혼미함뿐이고 흠종은 더 혼미하다는 조롱이다. 송의 북방을 점령한 승자로서의 기쁨을 마음껏 누린 것이다.이 혼덕공은 북만주에 있는 오국성(五國城)에서 살았다. 혼덕공이 거기에서도 그림을 즐겼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온갖 굴
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자세히 생각해 보면 세상사는 기이하다. 악비의 충의는 오랫동안 사람들의 마음속에 남아서 그를 왕으로 받든다. 주희(朱熹)의 이학(理學)은 통치 철학으로 상승되어 중국과 주변국으로 널리 확산되었다. 육유(陸游)와 신기질(辛棄疾) 등도 남송이라는 나무에 열렸던 과일이다. 사람들은 지금도 그 과일의 맛을 즐긴다. 진회(秦檜), 한탁주(韓侂胄), 가사도(賈似道)와 같은 남송의 악역들까지도 기억에서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그러나 남송 여섯 황제의 이름과 묘호를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송육릉의 주인은 차례대로 고종
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동진(東晋)과 남송(南宋)은 중국사에서 한족이 세운 왕조 가운데 북방 민족에게 쫓겨서 장강 이남으로 옮겨간 대표적인 사례이다. 동진은 그나마 생기와 멋을 보여주었지만, 남송은 어딘지 슬픈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러한 인식이 과연 사실에 부합될까? 아니면 강력한 한족 중심의 민족적 패권주의에 오염된 인식일까?남송은 항주(杭州)를 정권의 중심으로 삼았지만, 뜻밖에 초기 제왕들의 자취는 소흥(紹興)에 남아 있다. 소흥은 구도시 전체에서 다른 도시에서 느낄 수 없는 깊은맛이 숨어 있다.찹쌀에 보리누룩을 넣어서 담은
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이 밖에 함형주점(咸亨酒店)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 주점에는 뜻을 이루지 못한 문인들이 자주 드나들었다. 공을기(孔乙己)가 남긴 외상값 19전이 아직도 남은 곳이다. 토곡사(土谷祠)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곳에는 늘 정신적 승리자를 자부하던 ‘아Q’가 있었다.외가가 있던 안교(安橋)와 황보장(皇甫庄)도 추억의 대상이다. 안교는 오래된 다리이고, 황보장은 물가에 잇던 희극무대였다. 모두 주씨 형제가 어려웠던 어린 시절 고통을 잊을 수 있었던 곳이다. 다리의 난간에 기대어 오가는 오봉선(烏蓬船)을 바라본다.
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노신이 13세가 되었을 때, 이 조부는 친구에게 뇌물을 받고 고시를 주관했다가, 감옥에서 참형을 기다리라는 중형을 받았다. 이 시기에 아우 주작인은 10세, 주건인은 5세에 불과했다. 당시 주복청은 쇠사슬로 묶여 있었고, 나중에 3형제의 마음에서 지워졌다. 주가의 농토도 조금씩 줄었다. 3형제의 부친도 중병에 걸려 일어나지 못했다. 부친은 피를 토하더니 몸이 퉁퉁 붓기 시작했다. 노신은 자주 전당포에 드나들었다. 그는 계산대 뒤에 앉은 주인의 얼굴을 보며 몇 번이고 눈치를 살펴야 했다.조부는 옥중에서 자손들에게
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양쪽의 대문이 묵직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오랜 옛날부터 들려온 소리와 같다. 청의 광서 7년(1881), 노신(魯迅)이라고 부른 주수인(周樹人, 1881~1936)이 태어났다.이미 오래전에 영락한 절강성 소흥(紹興) 동창방구(東昌坊口)에서 이 아이가 세상에 나오면서 낸 첫 번째 소리를 들은 사람은 별로 없었다. 당연히 하늘에서 문곡성(文曲星)이 내려왔다는 말도 없었다. 그러므로 동창방구에서 들은 이 소리가 훗날 세상을 놀라게 할 거대한 소리로 변한다고 생각한 사람은 전혀 없었다.당시 마르크스는 63세, 엥겔스
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고대 동양의 전통적인 전쟁에서는 신의 상징을 납치하는 사건이 자주 신화로 각색된다. 그렇다면 헬렌의 상징을 납치한 호머의 서사시 일리아드가 이러한 신화의 변형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도 이론적으로 가능하다. 좀 더 나아가면 우리는 이러한 행동이 BC 1280년에 아라크산두에 의해 이루어졌고, 복수는 100년 후인 BC 1180년에 완료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방식으로 윌루사(Wilusa)왕이 아라크산두와 체결한 조약을 이후인 트로이7의 시대와 연결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많은
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전설에 따라 미케네 제국이 대군을 이끌고 트로이를 공격했다고 가정해 보자. 그렇다면 그들은 왜 그렇게 큰 전쟁의 위험에 빠져들었을까? 전설에서는 헬렌을 되찾아 오고, 트로이를 정벌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것이 불가능한 이유가 중요하다.헬렌은 반드시 죽어야 할 공주가 아니다. 그녀는 알에서 태어난 제우스의 딸이므로 불멸의 여신이다. 또 제우스를 섬기는 디오스코우로스의 자매이기도 하다.고전 시대에도 이를 믿는 신앙이 스파르타와 로도스섬에 있었다. 이 신앙은 큰 전쟁이라는 무자비한 재난을 초래한 여인을
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BC 2500년대에 시작된 낮은 성곽도시 트로이는 BC 10세기까지 방어 메커니즘을 변화시키면서 지속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250년의 약화된 시기를 거쳐, 헬레니즘과 로마 시대까지 도시의 중요성은 유지되었다. 그러나 정착지로서의 트로이는 BC 2500~1500년까지가 가장 강력했다. 트로이는 중앙 미케네 정착지와 아나톨리아 서부에서 가장 위력적인 도시였다. 여기에서 발굴된 항아리와 점토는 트로이가 미케네 세계는 물론 지중해의 다른 지역과도 유관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청동기 시대 그리스어로 Wilios인 호머의
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이 버전은 부르군디와 다른 북유럽 전설에서 자연스럽게 확산되었다. 결론은 무엇인가? 트로이 신화에서 전쟁을 마치고 돌아온 그리스군의 총사령관 아가멤논이 아내 크리템네스트라(Clytemnestra)에게 죽은 것이 아니라, 목욕하다가 비누에 미끄러져 머리를 바닥에 부딪쳤고, 그 때문에 죽었다고 할 수 있을까? 당연히 아니다. 전설에서 아띨라의 죽음도 아가멤논처럼 복수극으로 개편되었을 것이다.이제 다시 트로이로 돌아가 보자. 다른 자료로 확인되지 않는 한 단순한 전설을 근거로 역사적 사건을 설명하는 것은 옳지 않다.
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9세기에서 10세기의 옛 유럽 민요를 통해 우리는 옛 게르만 영웅 전설에서 사람과 사실이 어떻게 융합되는지를 알 수 있다. 이 전설에는 게르만족이 이주하는 시기에 부르군디 제국의 멸망, 훈족의 중부 유럽 침투, 동고트족의 최후와 같은 역사적 사건과 사람들에 관한 기록이 포함되어 있다.주요한 등장인물은 에르마나리히(Ermanarich), 군디 하리(Gundi Hari), 아띨라(Attila), 데오데리히(Theoderich) 등이다. 이러한 이름들은 전설과 관련된 시기와 장소와 여러 차례 뒤섞인다. 4세기의 에르
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호머의 우화와 전설은 아주 오랜 전통을 지녔다. 수백년 동안 발전한 전설의 언어는 다양한 고대어와 시대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한 문법의 특징을 보여준다. 호머가 이야기한 영웅들의 세계는 그의 시대가 아니라 훨씬 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서사시에 언급된 도시 가운데 미케네, 티린스, 필로스, 트로이는 BC 1200년 이전에 이미 소멸되었다. BC 8세기에 아시아 해안에 등장한 이오니아 식민도시들은 아직 생기지도 않았다. 칼, 단검, 화살은 BC 8세기부터 철로 만들었다. 호머의 서사시에서는 이러한 무기를 청동으로
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역사가는 언제, 누가, 어떤 정보를, 어떤 목적으로 문서를 작성했는지 서로 대조하여, 적절한 결과를 도출해 낸다. 반면에 구술 전승은 유동적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변화한다. 전달자가 중요시하는 부분이 지나치게 강조되었거나, 불필요하다고 생각하면 축소 또는 변질되기도 한다. 이전의 전승에 이질적 요소가 가미되어 다양한 이야기 구조의 층차를 보여주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사실 그리스 국가들과 에게해 지역의 역사는 BC 776년보다 훨씬 더 거슬러 올라간다. BC 6000년의 신석기 문화나 BC 3000년의 청동
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트로이에 관한 이야기는 상상인가? 꿈인가? 역사인가? 신화인가? 전설인가? 2023년 4월 중순에서 5월 말까지 근 40여일 동안, 에게해를 따라 지도를 보며 주변을 자세히 답사하고, 기록을 중심으로 트로이 유적지와 유물을 오랫동안 중시하면서 다시 호머의 일리아드를 읽었다. 10개의 층으로 이루어진 트로이 유적지처럼 트로이에 관한 이야기도 몇 개의 층을 이루면서 일리아드라는 서사시에 쌓여 있었다.헬렌은 당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였다. 그리스 여러 나라의 왕자들이 그녀에게 청혼했다. 헬렌의 아버지는 후보자
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그러나 조약의 조건이 충족되지 않아 제1차 세계대전 시기까지 그리스가 계속 통치했다. 갈리폴리 전투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국의 주축인 영국군이 호주와 뉴질랜드군으로 구성된 영연방군을 이끌고 동맹국을 참전한 오스만제국을 공격하기 위해 갈리폴리에 상륙하면서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 연합군은 괴크체아다(Gokceada)와 보즈자다(Bozcaada)를 해군기지로 사용했다. 1923년 7월 24일에 조인된 로잔조약에 따라 이 섬은 튀르키예로 반환되었다. 동년 1월 30일, 튀르키예와 그리스는 로잔에서 인구교환에 대한
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그러나 여우를 피하려다가 호랑이를 만난다고, 제노바인으로 인한 피해는 해적보다 심했다. 이어서 요한5세와 요한6세의 비잔티움 내전이 발발했다. 1353년, 요한5세는 테네도스를 기지로 콘스탄티노플을 장악하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1376년, 테네도스는 제노바보다 베네치아의 지배를 원했다. 1381년, 제노바와 베네치아가 체결한 평화조약에 따라 테네도스에서는 군대뿐만 아니라 민간인까지 모두 소개된 빈 섬으로 변했다. 주민 약 4천여명은 크레타섬과 에우리포스섬으로 강제 이주 됐다. 베네치아 총독 Zanach Mudz