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이 버전은 부르군디와 다른 북유럽 전설에서 자연스럽게 확산되었다. 결론은 무엇인가? 트로이 신화에서 전쟁을 마치고 돌아온 그리스군의 총사령관 아가멤논이 아내 크리템네스트라(Clytemnestra)에게 죽은 것이 아니라, 목욕하다가 비누에 미끄러져 머리를 바닥에 부딪쳤고, 그 때문에 죽었다고 할 수 있을까? 당연히 아니다. 전설에서 아띨라의 죽음도 아가멤논처럼 복수극으로 개편되었을 것이다.

이제 다시 트로이로 돌아가 보자. 다른 자료로 확인되지 않는 한 단순한 전설을 근거로 역사적 사건을 설명하는 것은 옳지 않다. 지금까지 트로이 전쟁을 직접 언급한 역사적 문서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설에 따라 트로이가 그리스군에게 불타버렸다는 것을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일 수는 있을 것 같다.

전쟁과 직접 관련된 기록은 없지만, 발굴과 조사로 확보한 자료로 트로이 전쟁을 재구성하는 것이 전혀 불가능하지는 않다. 트로이 전설은 고대 암흑기가 아니라, 고고학적으로 어느 정도 증명할 수 있는 마지막 미케네 시대에 일어났기 때문이다.

트로이는 1863년, 칼버트의 발굴로 발견되었고, 비밀 가운데 일부는 1988~2005년, 코르프만의 발굴 과정에서 다른 연구자들과 성과를 공유했다.

우리는 미케네 문화에 대한 수많은 고고학적 지식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윌루사(Wilusa)라고 부르는 트로이에 비친 빛과 전설은 동방인 아나톨리아에서 왔다. 최근의 지배적인 견해에 따르면, 일리아드와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인 수메르의 도시 우르크 제1왕조를 다스린 전설적인 왕 길가메쉬(Gilgamesh)의 전설 사이에는 몇 가지 유사점이 있다. 특히 길가메쉬의 서사기법과 영웅들의 전투 장면이 일리아드의 근간을 이룬다는 사실이 더욱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다.

또 BC 1600년대 시리아 북부 도시 에브라(Ebla)의 침공을 노래한 히타이트 전설인 ‘자유의 노래’는 일리아드와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 많은 연구자는 호머의 일리아드에 다양한 고대 동양의 이야기가 포함되었다는 것을 인정한다. 이 주제에 대해서는 앞으로 더 새로운 결과를 볼 수 있을 것이다. 또 이 분야의 연구는 호머, 전설, 동양 문화와 전통이라는 측면에서 새롭고 흥미로운 결과를 얻을 것이다.

모든 것이 1868년에 시작되었다. 호머의 팬이었던 독일의 부유한 사업가 하인리히 슐리만은 트로이에 대한 연구와 탐색을 다르다넬즈에서 중지한다. 그가 트로이로 생각했던 피나르바쉬의 발굴 작업은 성과가 없었다. 목표를 놓친 슐리만은 다르다넬즈의 명사 프랑크 칼버트를 만난다. 칼버트는 1863년과 1865년에 히사리크에서 부분적인 발굴 작업을 추진했으며, 그곳이 트로이일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몇 편의 에세이를 발표했다. 그러나 재정적인 어려움으로 더 큰 규모의 발굴을 계속하지 못했다. 슐리만에게는 칼버트에게 없는 자금, 야망, 계획이 있었다. 두 사람의 조합으로 트로이 발굴 계획은 1870년에 수립했지만, 실제 발굴은 이듬해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1890년에 슐리만이 죽을 때까지 센세이션과 스캔들이 계속되었다.

슐리만이 죽은 후, 그의 건축사인 빌헬름 도르프펠드가 1893~1894년 사이에 발굴 작업을 계속했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칼 브레겐이 1932년~1938년 사이에 세밀한 방법으로 트로이를 발굴하고, 그 결과를 8권의 책으로 출판했다. 그의 출판물은 지금까지도 에게해 연안의 고고학에 대한 기본 자료로 인정된다. 브레겐의 발굴 이후 50년이 지난 1988년, 오스만 코르프만이 다시 발굴을 시작하여 2005년에 죽을 때까지 매우 중요한 유적과 유물을 발견했다. 그의 발굴은 다른 지역에서 이루어졌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발굴, 측정, 표면연구를 통해 트로이 하층 도시의 위치를 증명했다는 점이다. 처음 시작된 발굴 작업이 약 150년 동안 지속되면서 트로이는 신화에서 현실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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