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노신이 13세가 되었을 때, 이 조부는 친구에게 뇌물을 받고 고시를 주관했다가, 감옥에서 참형을 기다리라는 중형을 받았다. 이 시기에 아우 주작인은 10세, 주건인은 5세에 불과했다. 당시 주복청은 쇠사슬로 묶여 있었고, 나중에 3형제의 마음에서 지워졌다. 주가의 농토도 조금씩 줄었다. 3형제의 부친도 중병에 걸려 일어나지 못했다. 부친은 피를 토하더니 몸이 퉁퉁 붓기 시작했다. 노신은 자주 전당포에 드나들었다. 그는 계산대 뒤에 앉은 주인의 얼굴을 보며 몇 번이고 눈치를 살펴야 했다.

조부는 옥중에서 자손들에게 가훈을 주었다. 내용은 매우 보수적이고 진부했다. 그 가운데에는 서양의학을 믿지 말라는 조항도 있었다. 중의사 가운데에도 돌팔이가 적지는 않았다. 주씨 3형제는 조부의 말씀이 반드시 옳지 않다는 것을 잘 알게 되었다. 부친이 피를 토하자 의사는 먹물 한 사발을 먹였다. 먹물의 색깔이 피보다 진하므로, 피를 멈추게 한다는 것이었다. 또 부친의 배가 북처럼 팽창하자, 북의 가죽을 찢어서 약에 넣으면서 이제 배가 팽창하지 않을 것이라고 큰소리쳤다. 그가 사용하는 처방은 너무 황당했다.

예를 들어서 귀뚜라미의 암수를 맞춘다고 곁에 작은 글씨를 적어 놓는 식이었다. 정절을 지키는 곤충이라야 약효가 있다는 주장이었다. 부친의 병은 이런 황당한 처방으로 고칠 수 없었다. 결국 부친은 조부의 참수를 기다리지 못하고 고통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어느날 밤, 주씨 형제는 침상 곁에서 부친의 호흡이 점차 멎어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조부는 감옥에 계시고, 부친은 세상을 떠났다. 3형제가 홀로 된 모친을 지켰지만 생계는 자꾸 더 어려워졌다. 친척들은 등을 돌렸고, 길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은 짐짓 모르는 척했다. 3형제는 어려서부터 세태의 냉정함을 깨달았다.

저택의 뒤에는 백초원(百草園)이라는 채소밭이 있었다. 아이들에게는 쓸쓸한 마음을 달랠 수 있는 곳이었다. 오래된 우물도 있었다. 아이들의 그림자가 비칠 정도로 우물물이 맑았다. 쥐엄나무에 열매가 익으면 그것을 따서 어머니께 드렸다. 어머니께서는 그것으로 비누를 만들어 빨래를 했다. 무너진 담장은 아이들에게 여러 가지 즐거움을 주었다. 부친께 약으로 드릴 귀뚜라미 짝을 찾아 돌 틈을 뒤지는 동안 아이들은 우울한 나날을 잠시라도 잊었다.

백초원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삼미서옥(三味書屋)이 있었다. 주인인 매우 반듯한 수(壽)선생이 조용히 머리를 흔들며 앉아계셨다. 안경에 모기 한 마리가 붙자, 새 한 마리가 날아왔다고 소란을 피워 아이들이 한바탕 웃음바다를 연출하게 했다. 수선생도 멋쩍게 웃었다.

삼미서옥의 원명은 삼여서옥(三餘書屋)이었다. ‘삼여’란 겨울에는 아직도 한 해가 남았고, 밤에는 내일 낮이 남았고, 비가 올 때는 맑은 날이 남았다는 뜻이다. ‘삼미’란 경(經)을 읽으면 밥맛이 나고, 사(史)를 읽으면 반찬맛이 나고, 제자백가를 읽으면 젓갈맛이 난다는 뜻이다.

아이들은 책을 읽는다고 어떤 맛이 나는지 자세히 알 수 없었다.

서옥의 후원에는 조맹부(趙孟頫)가 쓴 ‘자이(自怡)’라는 편액이 있다. 공부하는 것만이 스스로를 즐기는 길이라는 뜻이다. 벽에도 시 한 수가 걸려 있다. 전문가의 고증에 따르면 수봉남(壽峰嵐) 선생의 친필이다. 100년이 지난 후이므로 정확히 식별하기는 어렵다. 간신히 보이는 것만 적으면, ‘재화십년(栽花十年), 간화십일(看花十日). 주벽춘광(珠璧春光), 기용경실(豈容輕失)’이다. ‘10년 동안 꽃을 가꾸었지만, 볼 수 있는 시간은 고작 열흘. 주렴 사이로 보이는 봄 햇살이라도 가볍게 여지기는 말아야지’라는 뜻으로 짐작된다.

사방에 놓인 등불은 학생들이 가져온 것이다. 주씨 형제는 이곳에서 글을 읽는 재미를 알았다. 특히 위의 두 형들은 나중에 문단의 큰 별이 되었다. 형제의 모든 문학적 기량은 이곳에서 양성되었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