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BC 2500년대에 시작된 낮은 성곽도시 트로이는 BC 10세기까지 방어 메커니즘을 변화시키면서 지속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250년의 약화된 시기를 거쳐, 헬레니즘과 로마 시대까지 도시의 중요성은 유지되었다. 그러나 정착지로서의 트로이는 BC 2500~1500년까지가 가장 강력했다. 트로이는 중앙 미케네 정착지와 아나톨리아 서부에서 가장 위력적인 도시였다. 여기에서 발굴된 항아리와 점토는 트로이가 미케네 세계는 물론 지중해의 다른 지역과도 유관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청동기 시대 그리스어로 Wilios인 호머의 일리오스는 BC 14세기 이집트 유적에서 Wiliya라고 불렀던 것이 확인되었다. 여러 히타이트 문서에서는 Wilusija 또는 Wilusa로 불렀다. 당시 아나톨리아 북서부에 있는 트로이만큼 강력하고 웅장한 도시는 없었다.

발굴 결과에 따르면, BC 14세기 말에 거대한 지진이 도시를 파괴했으며, 고고학자가 트로이4로 명명한 기간은 끝났다. 트로이7이라는 발전단계에서 도시는 일시적으로 약화되었지만, 곧바로 과거의 힘을 회복했다. 성벽과 성문은 더 튼튼해졌다. 취약했던 서쪽 입구는 닫았지만, 도시의 위력은 여전했다. 그러나 성벽과 성문은 화재, 재난, 전쟁의 패배를 감당하지 못했다. 방어시스템의 기본적 기능은 여전했으나, BC 1180년대에 도시는 완전히 무너졌다. 코르프만이 발견한 매장되지 못하고 산재된 해골, 늘어진 활, 부러진 창, 어지럽게 흩어진 팔매용 돌은 이러한 재난의 흔적이다. 트로이의 멸망은 호머의 서사시에서 말한 것처럼 재난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이러한 발견이 시인의 서사시가 사실이라는 것을 증명할까? 명확한 대답은 어렵지만, 트로이가 전쟁에 휘말렸고, 그 결과 도시의 대부분이 화재의 피해를 입은 것은 확실하다.

고고학적 지식의 공백을 전설이나 서사시로 메우는 것이 옳은지의 여부는 알 수 없다. 고고학적 자료가 트로이를 공격한 사람들이 그리스인이고, 그들의 우두머리가 아가멤논이었는지, 아니면 다른 사람이었는지도 정확히 알려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리스인들이 1000척의 전선을 이끌고 와서 10년 동안 트로이 해안에 머물지 않았던 것은 분명하다. 단순히 물량적 관점에서도 그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그러나 트로이 방어시스템에서 유추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군이 강했던 것은 확실하다. 역사가 투키디데스조차 호머가 일리아드에서 말한 그리스군의 전선 수는 과장되었다고 말했다. 투키디데스가 옳을 수도 있지만, 과장의 책임자는 호모가 아니라 전설이다. 그리스 전체의 사활이 걸린 페르시아 전쟁에서도 모든 도시가 일치단결하지 않았던 것을 감안하면, 그처럼 대군을 동원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러한 협력은 미케네 제국이 심각한 위기에 처했을 때 일어날 수는 있었을 것이다. 트로이 전쟁 전후인 BC 1200년대에 테베, 피로스, 미케네가 파괴된 것은 사실이다. 분명한 것은 두 사건 사이의 시차가 크지 않다는 점이다. 미케네 통치자가 트로이를 정복했을 때, 본국에 있던 자신의 궁전이 남아있었는지의 여부도 알 수 없다. 전설은 미케네 제국의 통치자 아가멤논이 몰락했다고 했지만, 궁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전혀 말하지 않았다.

전설은 청동기 말기의 일반적인 상황에 믿을 수 있는 정보를 제공한다. 이 정보에 따르면, 미케네 제국의 권력 중심은 아르고스, 코리스, 스미르나가 아니라, 티린스, 스파르타, 피로스, 테베, 로코스, 크노소스 등이었고, 그들의 언어는 그리스어였다. 이러한 사실은 미케네와 피로스 궁전의 기록보관소에 있던 석판을 통해 알 수 있다. 이 석판에는 중요한 역사적 사건보다 사소한 행정 업무에 관한 정보만 있다. 별로 유용하지는 않지만, 호머의 말이 미케네 전통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알 수 있다. 이 석판에서 호머의 서사시에 등장하는 영웅들의 이름, 트로이 전쟁에 대한 정보는 없지만, 노예로 끌려온 트로이 여성들의 이름은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정보는 우리를 트로이 전쟁의 끝자락으로 안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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