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양쪽의 대문이 묵직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오랜 옛날부터 들려온 소리와 같다. 청의 광서 7년(1881), 노신(魯迅)이라고 부른 주수인(周樹人, 1881~1936)이 태어났다.

이미 오래전에 영락한 절강성 소흥(紹興) 동창방구(東昌坊口)에서 이 아이가 세상에 나오면서 낸 첫 번째 소리를 들은 사람은 별로 없었다. 당연히 하늘에서 문곡성(文曲星)이 내려왔다는 말도 없었다. 그러므로 동창방구에서 들은 이 소리가 훗날 세상을 놀라게 할 거대한 소리로 변한다고 생각한 사람은 전혀 없었다.

당시 마르크스는 63세, 엥겔스는 61세, 레닌은 8세, 스탈린은 2세, 손중산은 16세, 마오쩌둥은 12년 후에나 태어났다. 4년 후에는 고우재(苦雨齋)의 주인 주작인(周作人, 1885~1967)이 태어났다. 이 해에 한간(漢奸)이라고 욕을 먹던 이홍장(李鴻章)이 프랑스에 화친을 애걸했지만 아무 성과도 없었다.

다시 3년 후인 광서 15년에 나중에 호를 교봉(喬峰)이라고 했던 주건인(周建人, 1888~1984)이 태어났다. 이 해에 파리에서 매년 5월 1일을 국제노동절로 선포했다.

주씨 3형제가 잇달아 태어난 것은 그들의 부친 백선공(伯宣公)과 모친 노서(魯瑞)에게는 중요하고 큰일이었지만, 동창방구 주가의 신태문(新台門)에서 영아가 낸 연속적인 소리는 너무 작은 것 같았다. 이 대문은 너무 컸다. 전후 6개의 문을 지나면 4천 제곱미터나 되는 후원이 있고, 80여개의 방이 분포되어 있었다. 가족의 수도 많았다. 조상이 살았던 집은 대가족이 함께 살기에는 부족했다.

북경에 있던 그들의 조부는 장손의 이름을 지어달라는 편지를 받고 어떻게 할까 노심초사했다. 마침 장(張)씨 성을 가진 관리가 찾아왔다. 한림원 서길사(庶吉士) 출신이었던 주복청(周福淸)은 그를 보고 자기 장손에게 아장(阿張)이라는 소명(小名)을 지어주려고 했다가 문득 너무 성의가 없다는 느낌이 들었다. 장(張)에는 아무런 뜻도 없는 것 같아서 녹나무를 가리키는 장(樟)으로 대신했다. 아장(阿張)이 아장(阿樟)으로 바뀌고, 자를 예산(豫山)으로 지었다. 그러다가 예산(豫山)이 우산(雨傘)과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예재(豫才)로 바꾸었다. 조부가 내키는 대로 이리저리 고친 것처럼 장손도 나중에 자라서 자기의 필명을 노신(魯迅)으로 지었다.

주가 3형제는 집안의 소중한 자산이었지만, 그만큼 대단한 사랑을 받고 자라지는 못했다. 어머니의 사랑을 제외하고, 형제가 받은 정은 오히려 처참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어린아이들의 눈에 비친 정원은 깊고 묵직했을 것이다. 물론 대대로 살아온 집안에는 조부인 한림이 쓴 편액이 곳곳에 걸려 있었다. 사람들에게 경외감을 주는 위엄은 거기에서 비롯되었다.

대청의 양쪽에는 두 개의 상자가 높이 걸려 있었다. 성지두(聖旨斗)라고 부르는 상자 속에는 3부의 고명(誥命)이 들어 있었다. 대청황제께서 그들의 조부모와 증조모에게 하사한 은택이다. 양쪽의 대명(臺明)에는 한 줄로 늘어선 검은색의 대문 12개가 있었다. 주씨 형제는 어렸을 때 이 대문이 주는 위압감으로 정신세계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결국 어느 날 3형제는 성지두에 있는 3통의 황봉고명(皇封誥命)이 불타면서 거기에서 나오는 새롭고 밝은 빛이 되었다.

주씨 형제가 파락(破落)한 대대문(大臺門) 속에서 성장하면서 하루 종일 어둡고 차가운 기운을 느꼈다고 반드시 불행했던 것은 아니다. 진짜 재난은 조부가 과거 시험장에서 일으킨 사건 때문에 발생했다.

조부 주복청은 전시(展試)에서 2갑(甲) 제39명 진사로 합격하여 한림이 되었다가, 지현(知縣)을 역임한 후 북경으로 돌아와 내각중서(內閣中書)로 임명되었다. 주씨 가문에서 가장 빛나는 경관(京官)으로 출세한 그는 한림 출신이라는 것을 자부했다. 그는 자기 아들과 장손까지 이후 한림이 되기를 희망했다. 그는 조손부자형제숙질한림(祖孫夫子兄弟叔侄翰林)이라는 편액까지 대문에 걸어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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