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자세히 생각해 보면 세상사는 기이하다. 악비의 충의는 오랫동안 사람들의 마음속에 남아서 그를 왕으로 받든다. 주희(朱熹)의 이학(理學)은 통치 철학으로 상승되어 중국과 주변국으로 널리 확산되었다. 육유(陸游)와 신기질(辛棄疾) 등도 남송이라는 나무에 열렸던 과일이다. 사람들은 지금도 그 과일의 맛을 즐긴다. 진회(秦檜), 한탁주(韓侂胄), 가사도(賈似道)와 같은 남송의 악역들까지도 기억에서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남송 여섯 황제의 이름과 묘호를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송육릉의 주인은 차례대로 고종(高宗) 조구(趙構), 효종(孝宗) 조신(趙昚), 광종(光宗) 조순(趙淳), 영종(寧宗) 조확(趙擴), 이종(理宗) 조윤(趙昀), 도종(度宗) 조기(趙樭)이다. 역사책에서 찾아냈으니 틀리지 않을 것이다.

황토 언덕에는 이름도 붙어 있다. 돌림자는 영(永)이다. 차례대로 영사릉(永思陵), 영부릉(永阜陵), 영숭릉(永崇陵), 영무릉(永茂陵), 영목릉(永穆陵), 영소릉(永昭陵)이다.

공종(恭宗) 조현(趙顯), 단종(端宗) 조하(趙昰), 조병(趙昺)에 이르면 남송도 이미 종말에 가까웠다. 혹자는 이들의 시대를 현이 끊어진 후의 거문고 여음(餘音)과 같다고 비꼰다.

남송은 공종 조현의 시대에 사실상 막을 내렸다. 당시 그는 4세의 어린아이였다. 쿠빌라이가 바얀에게 남송을 점령하라고 명했을 때, 이 아이는 즉위 2년 차였다. 노회한 어른들이 비통한 표정으로 시키는 대로 그는 어사를 불러서 조상이 전한 옥새를 바얀에게 바치게 했다. 남국의 반벽강산(半壁江山)과 자신을 포함하여 바친 셈이다.

이상하게도 나는 동진과 남송이 공식적으로 마무리되는 장면을 기억하지 못한다. 여행을 준비하면서 문득 생각했다. 단순한 흥미가 아니라면 왕조의 역사를 공부할 때는 시작과 마지막을 연결해야 한다.

어린 조현은 지금의 북경인 원의 수도 상도(上都)로 끌려갔다. 쿠빌라이는 진룡천자(眞龍天子)를 영국공(瀛國公)으로 봉했다. 이 어린아이의 마음속에는 천자와 영국공의 차이가 눈앞에 펼쳐지던 서호(西湖)의 아름다운 풍경이 갑자기 거대한 사막의 거친 모래바람으로 변한 것 같은 두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몰라서 동그랗게 눈을 뜨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사정없이 몰아치는 바람에 흙투성이가 된 얼굴을 쓰다듬는 아이는 그것이 훗날 남송의 유신들이 ‘황상몽진(皇上蒙塵)’이라고 탄식한 정치적 사건이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다. 갑자기 이 어린아이가 큰 소리로 울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우유에서 비린내가 난다는 것이었다. 아이는 항주에서 먹던 어죽을 달라고 졸랐다. 그러나 아이는 제대로 자라지도 못한 머리가 잘려서 사막에 묻힐 것은 전혀 몰랐다. 남송의 마지막 소황제가 북으로 끌려갔다. 그러나 북송의 마지막 황제 휘종 조길의 유골은 남방으로 돌아와 소흥의 송육릉에 부장(附葬)되었다. 부장이니 송육릉의 부록인 셈이다.

휘종은 남송 황제들의 조상이었지만, 남송의 역사에 설 자리가 없었다. 6릉은 그를 빼고 6릉이다. 그의 무덤에도 이름은 붙어 있지만 ‘우(佑)’라는 글자는 곁다리라는 뜻이다.

뛰어난 화가였던 조길은 원체화조(院體花鳥)로 천하에 독보적이었다. 그러나 그는 천하의 공주(共主)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채경(蔡京) 부자만 믿다가 천하의 마음을 잃고 말았다.

중국 4대기서의 한 자리를 차지하는 <수호전(水滸傳)>은 그의 시대가 배경이다. 채경의 아들은 꽃과 돌과 짐승과 새로 황제의 마음을 기쁘게 했다. 그의 애비는 길조(吉兆)를 날조하여 언제 황하가 맑아졌다느니, 어디에서 감로(甘露)가 내렸다느니, 어떤 만족이 스스로 투항했다느니라는 식으로 듣기 좋은 말만 늘어놓았다. 조길은 진짜 자기의 통치로 강산이 태평하다고 믿었다. 그가 한 일은 좋아하는 그림을 마음 놓고 즐기는 것뿐이었다. 이는 모두 채경이 몰래 사람들을 사주한 것이었다.

조길은 늙고 젊은 두 채가만 총애하다가 결국은 천하 공주로서의 풍모와 체통까지 잃고 말았다. 그 결과 송의 백성과 나라까지 빼앗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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