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이 밖에 함형주점(咸亨酒店)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 주점에는 뜻을 이루지 못한 문인들이 자주 드나들었다. 공을기(孔乙己)가 남긴 외상값 19전이 아직도 남은 곳이다. 토곡사(土谷祠)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곳에는 늘 정신적 승리자를 자부하던 ‘아Q’가 있었다.

외가가 있던 안교(安橋)와 황보장(皇甫庄)도 추억의 대상이다. 안교는 오래된 다리이고, 황보장은 물가에 잇던 희극무대였다. 모두 주씨 형제가 어려웠던 어린 시절 고통을 잊을 수 있었던 곳이다. 다리의 난간에 기대어 오가는 오봉선(烏蓬船)을 바라본다. 나중에 노신은 공을기가 오봉선을 타고 먼 과거로 떠났다고 했다. 공일기처럼 잇달아 고향을 떠난 형제는 옛집을 찾지 않았다.

신대문에서는 주가의 여섯 가구가 함께 살았다. 집안에는 예(禮), 의(義), 신(信)이라는 3개의 거처가 있었다. 대문 밖에는 흥(興), 립(立), 성(誠)이라는 3개의 다른 거처가 있었다. 각 가정의 방은 모두 누각의 상하를 통해 연결되었다. 이러한 구조는 조상들의 혜안과 고심이 만들어 냈다. 만약 어떤 집에 사는 자손이 망하더라도 서로 도와서 집을 지켜내게 하려는 배려가 엿보인다. 누구도 혼자 집을 팔아먹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집안 전체가 망하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어떤 생명도 영원히 살 수는 없고, 어떤 부귀도 영원히 누릴 수는 없다. 이 저택은 결국 주인이 바뀌었다. 같이 살던 사람들은 각자의 길을 찾아 흩어졌다.

옛집의 지붕은 관모(官帽)를 닮았다. 이 지붕은 선조의 부릅뜬 눈처럼 먼 길을 떠나는 후손들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주씨 형제는 이미 관직으로 가는 길을 포기했다. 관모는 무척 실망했을 것이다. 얼마 후이면 사람들은 주가의 3형제가 이 저택에서 가장 빛났던 조부 주복청보다 훨씬 빛난다고 말할 것이다. 3형제의 맏이는 교육부 첨사, 둘째는 화북교육총서독판, 셋째는 10년 동안 성장(省長), 중국공산당 중앙위원, 전국인대상위원회 부위원장 등 고위직을 역임했다. 조부도 손자들이 그렇게 되리라고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주씨 형제는 모두 차례대로 저택과 작별한 후 돌아오지 않았다. 집 앞에 걸렸던 등불이 꺼진 지도 이미 오래되었다. 등롱에는 ‘여남주(汝南周)’라는 3개의 큰 글자만 여전히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3형제의 조부는 여남주가 송왕조의 위대한 철학자였던 여남백(汝南伯) 주돈이(周敦頤)를 가리킨다고 말했다.

<애련설(愛蓮說)>이라는 소품에서 ‘출오니이불염(出汚泥而不染, 더러운 진흙에서 솟아났지만 거기에 물들지 않는다)’ 명구를 만세에 남긴 사람이다. 동창방구 대문에 살았던 주가는 그의 후예였다. 그들은 꾸준히 애련노인 주돈이의 혈통을 이어왔다. 집안 족보의 기록을 거슬러 올라가면 명왕조에 이른다. 그 이상의 기록은 없으므로 그들이 진짜 주돈이의 직계인지는 증명할 수 없다.

그러나 주작인은 이 족보의 기록을 지지했다. 주건인은 만년에 동창방구 주가가 하남성 여남현에서 나왔으며, 북송 말기에 남쪽으로 건너와 소흥에서 대대로 살았다고 주장했다.

20세기 중국을 돌이켜보면, 주가 3형제는 역사의 시야에서 우리가 곳곳에서 늘 만나는 익숙한 존재였다. 중국 현대 문화사에서 주수인, 주작인, 주건인이라는 3개의 이름은 각자 다른 무게의 내함과 매력을 발산한다. 노신으로 알려진 주수인은 하늘을 향해 우뚝 솟은 커다란 나무와 같았다. 그는 천지를 뒤흔드는 강력한 모래바람 속에서도 스스로 장대가 되어 선명한 깃발을 나부끼며 방향을 잃은 중국인들을 격려했다.

막내인 교봉(喬峰) 주건인은 흐트러지는 중국인들의 정신세계를 바로잡는 위대한 비석이었다. 둘째인 고우재 주인 주작인은 현대 중국을 만든 신문화 운동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공적을 남겼다. 그는 만년에 일본의 괴뢰정권 왕정위(汪精衛)에게 협조했던 것을 인정하고 부끄럽다고 실토했다.

주가 3형제는 이제 과거사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그들은 중국 문화의 영원한 배경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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