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미년 삼월 일일 정오, 터지자 밀물 같은 대한독립 만세! 태극기 곳곳마다 삼천만이 하나로, 이 날은 우리의 의(義)요 생명(生命)이요 교훈(敎訓)이다.” 경술국치 100년을 맞는 해, 91년 전 오늘 민족대표 33인에 의해 독립선언문이 낭독되고, 이어 저들의 총칼 앞에서 대한독립만세가 울려 퍼지던 바로 그 날이다.그러면 왜 독립을 외쳐야만 했던가. 그것은 사로잡혔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왜 사로잡혀야만 했던가. 그것은 무지 때문이었다. 그 무지는 다름 아닌 부정과 부패를 생산했고, 그 부정과 부패의 개념은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재작년 8월 김정일 위원장의 뇌졸중으로 인하여 등장한 후계자 문제가 현재로서는 삼남인 김정은이 겉으로 보기에 가장 유력해 보이나, 불투명한 북한사회의 속성상 현시점에서 김정은이 김 위원장의 후계자로 내정되었다고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고 본다. 그동안 알려진 바와 같이 김 위원장에게는 김정남, 김정철, 김정은 등 세 아들이 있는데, 김 위원장의 건강악화가 등장한 이후 언론에 이름이 오르내리던 김정남, 김정철의 관련기사를 요새는 거의 접하기가 힘들다. 사실 필자는 예전부터 김 위원장의 이복동생이며 현재 폴란드 주재 북한대사로 있는
- 이단세미나, 자신들 정체 드러내는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다 - 오늘날 종교현실, 말씀은 외면한 채 권력·삯·명예 좇은 결과 지난 1월 17일 한국장로교총연합회(한장총)의 최병규 목사는 ‘이단을 경계하자’는 제목으로 경남지역에서 이단세미나를 개최한 바 있다. 물론 최 목사는 이단에 빠진 사람들을 빼내는 일에 책임을 지고 있는 ‘이단상담소장’이라는 직함을 가졌다. 최 목사 외에도 이단 상담과 세미나에 최고의 지식과 실력을 나름 갖췄다 해서 전국을 휩쓸고 있는 목회자들도 있다. 이들의 정체는 중국 공산당이 사용하던 용어 즉, ‘자칭 사
정권이 바뀔 때마다 일부 직업공무원들의 소신 없는 갈지자 행보가 도마에 오르곤 한다. 전 정권에서 추진했던 정책이 새 정권 들어 바뀔 경우 전 정권에서 문제의 정책을 입안하고 집행했던 고위공직자들이 아무런 해명 없이 지난 정부의 정책을 부정하고 새 정부의 전도사가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우리 역사에서는 1997년 김대중 대통령 당선과 2007년 이명박 대통령 당선 등 2번의 정권교체기에 이 현상이 빚어졌다. 하지만 김대중 대통령 집권기보다 이번 이명박 정부 들어 직업관리들의 자기부정 행태가 더욱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
또 남북 간에 포성이 울렸다. 앞으로도 신경전이 계속 될 것 같다. 남북 간의 대화와 평화는 정말 요원한 것이냐는 탄식이 저절로 나온다. 이런 걱정을 뒤로하고, 경남의 통영에 내려가 공직자들을 대상으로 특강을 하고, 이순신 장군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충렬사와 세병관(洗兵館)을 방문해 향을 피워 기도를 올렸다. 오랜만에 다시 찾은 충렬사의 동백꽃은 매우 풍성한 겨울꽃을 뽐내고 있었다. 위패와 영정을 모신 사당 주위의 나무들도 수백 년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기품이 넘쳐났다. 참 신기하구나. 명당에 자리 잡고 있어서인가. 이순신 장군의
서쪽으로부터 백호(白虎)가 포효하며 달려왔다. 예로부터 우리의 역사와 문화 속에 함께 살아온 사신(四神) 즉, ‘백호·청룡·주작·현무’ 중 서쪽 방위를 지키며 가장 강인하고 용맹스러우며 신령을 상징하는 백호가 60년 만에 다시 서쪽으로부터 숨 가쁘게 달려왔다(西氣東來). 그래서인지 그 어느 해보다 강렬한 태양이 경인년 새 아침에 바다로부터 치솟아 올랐다. 악(惡)의 마지막 기운이 선(善)의 용맹함에 그 기세가 꺾여 더 이상 펼치지 못할 것임을 많은 곳에서 암시하고 있는 올해 즉, 대변혁의 시대가 막이 오른 것이다. 따라서 이 새 아
방송가의 막장, 막말, 조작 바이러스가 심각하다. 마치 두더쥐 잡기 게임처럼 아무리 때려도 끊임없이 솟구쳐 오르는 이 바이러스들은 내성이 하도 강해 웬만한 처방으로는 약발도 먹히지 않는다. 시청률 경쟁 탓이다. 이해하기 힘든 가족사, 기괴한 갈등과 복수, 끊임없는 악다구니와 패악적인 대사들로 뒤범벅이 된, 그래서 ‘막장’ 이란 수식어를 달게 된 드라마 이야기는 이제 생선 가게의 생선 냄새처럼 으레 그런가 보다 하게 되었다. 역사적으로 어떤 인물이 이미 죽고 없어진 시점인데도 멀쩡히 살아나 사랑을 하고 난을 일으키고, 배신하고 복수하
천지일보 기자로 각 종단별 취재를 다니면서 참 많은 것을 느끼고, 또 배우고 있다. 사회일간지로 종교면을 특화시킨 신문이 낯설어서인지 혹은 신문사 제호가 낯설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사람들의 반응이 제각기다. 범종교를 다룬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은 기자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천지일보라는 이름으로 취재를 다닐 때마다 제호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생각이 각기 다른 것을 볼 때에 세상에는 참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고는 한다. 개신교가 생각하는 ‘천지’가 다르고, 가톨릭이 생각하는 ‘천지’가 또 다르며
정치인들의 화려한 말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린다.‘이 사회에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게 하겠다’ 또는 ‘국민의 눈물을 닦아 주겠다’는 등의 수사(rhetoric)가 그런 것들이다. 감동이 일지 않을 수 없는 레토릭이다. 국민의 감성을 자극하고 국민에게 희망을 던지는 메시지다.하지만 현실의 정치라는 것이 꼭 그 말대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런 정치를 하고 싶겠지만 하여간 잘 안 된다.이렇게 말 잘하는 사람들이 대통령이 되고 국회의원이 돼도 사회는 하루아침에 본질이 달라지지 않는다. 이 말에 감동을 받았다면 얼마 안 가 실망한다. 감동
2. 상존해 온 갈등, 성서적 사례 흔히 종교들의 교리가 갈등의 원인이 된다고들 한다. 하지만 근원적으로 보면 교리(敎理)가 달라서 종교간 갈등이 생기는 것만은 아니다. 갈등이 생긴다면 그것은 교리, 즉 가르침(敎)의 원리(理)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독단화한 데서 비롯되는 것이다. 교리 자체가 아니라 오해를 이해로 착각하는 데서 갈등의 원인이 발생하는 것이다. 가령 유대교와 기독교 사이에 갈등이 있다면 그것은 예수에 대한 이해가 피상적인 데 머물고 그 이해가 상충된 데서 비롯된다. 기독교인은 예수의 기독교적 독자성을 강조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