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문화연구원 이찬수 원장

▲ 종교문화연구원 이찬수 원장. ⓒ뉴스천지
2. 상존해 온 갈등, 성서적 사례

흔히 종교들의 교리가 갈등의 원인이 된다고들 한다. 하지만 근원적으로 보면 교리(敎理)가 달라서 종교간 갈등이 생기는 것만은 아니다. 갈등이 생긴다면 그것은 교리, 즉 가르침(敎)의 원리(理)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독단화한 데서 비롯되는 것이다. 교리 자체가 아니라 오해를 이해로 착각하는 데서 갈등의 원인이 발생하는 것이다.

가령 유대교와 기독교 사이에 갈등이 있다면 그것은 예수에 대한 이해가 피상적인 데 머물고 그 이해가 상충된 데서 비롯된다. 기독교인은 예수의 기독교적 독자성을 강조하지만, 예수는 분명히 유대인이었고, 유대교적 전승을 공유하던 사람이었다. 이런 그의 친유대교적 정서는 자신이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의 말씀 없애러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없애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 5,17)”고 한 데서 잘 드러난다. 예수는 유대교적 율법의 ‘정신’을 실현하려고 했던 인물이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율법의 모든 것이라는 예수의 정신과 가르침은 예수 고유의 것이었다기보다는 유대교 랍비들에게서도 발견되고 히브리 성서에서도 등장하는 친숙한 가르침이기도 했다(신명기 6,5; 레위기 19,18). 예수는 다만 믿는 대로 실천했을 뿐이다.

예수 정신의 고유성을 잘 담고 있다고 생각되는 말, 즉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마르 2,27)”도 사실 유대교 랍비들 전통 안에 이미 전승되어 오던 지혜였다. 출애굽기에 대한 랍비들의 해설서인 ‘메킬타(31,13)’에는 “안식일이 네게 맡겨져 있는 것이지 네가 안식일에 맡겨져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예수 당시 유대인들이라면 누구든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라(출애 20,8)”는 말을 하느님의 십계명으로 알고 그에 따르고자 했는데, 차이가 있다면, 그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해석이 서로 달랐다는 데 있다.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 안식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예수에게 안식은 그저 아무 노동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 그가 보건대 병든 이에게 안식은 치료이고 굶주리는 이에게 안식은 한 끼 식사였다. 그렇다면 아무리 안식일이라도 굶주리는 이를 위해서는 밀가루를 구해 빵을 만들어 먹이는 노동을 해야 했다. 예수가 보건대 그것이 굶주리는 이를 위한 안식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는 정말 긴급하지 않은 경우라면 환자 치료행위조차 금하는 방식으로 안식일법을 지키고자 했던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미움을 사게 되었다. 안식일에는 정말 아무 노동도 해선 안 된다고 단순하게 생각하던, 그러면서 정말 아무 노동도 하지 않아도 충분히 먹고 살고 누릴 만한 기득권층 종교인의 단순한 이해 방식 사이에 갈등이 생기게 된 것이다.

이와 함께, 예수는 유대인이었지만, 따라서 유대교적 관례와 문화에 친숙했지만, 신의 구원의 가능성을 유대인에게만 제한하지는 않았다. 때로는 유대인보다 이방인에게 신의 구원이 먼저 임한다고 가르치기도 했다. 하느님은 당시 사회적 의인들 보다 죄인을 더 사랑하신다고 보기도 했다. 그것이 하느님의 사랑의 원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예수의 이런 태도는 이방인의 구원을 상상해본 적 없던 유대 지도자들의 관습과 정서를 자극했고, 죄인과 함께 어울리는 이도 죄인이라는 관례적 논리에 따라, 죄인과 어울리는 예수에게 불경죄, 신성모독죄 등을 씌워졌고, 예수는 급기야 사형장으로까지 내몰리게 된 것이다. 죽인 이나 죽은 이나 나름대로는 하느님의 이름으로 그렇게 했다는 것이 종교사의 아이러니이다. 물론 그 아이러니는 상대의 내면을 피상적 외형으로만 진단하고 평가하는 데서 비롯된다.

재미있는 것은 오늘날 기독교는 그렇게 죽임당한 예수가 도리어 더 옳다고 따르는 이들의 모임이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오늘날도 훨씬 많은 기독교인들이 그런 예수의 정신보다는 예수를 죽인 고대 유대교적 관습의 논리를 더 따르고 그에 매인다. 구원이 기독교 밖에도 이루어진다고 말하면 불경하다며 두 눈을 똥그랗게 뜨며 짓는 공격적 표정이란 이천년 전 예수를 죽인 사람들이 꼭 그랬을 것 같다는 느낌을 준다. 그런 식으로 오늘도 기독교는 다른 종교와 조화하지 못하면서 종교간 갈등의 원인을 제공한다. 도대체 왜 그런 유치한 일은 계속 벌어지는 것일까.

이미 말한대로 그것은 예수를 믿는다는 기독교인조차 대부분 교리를, 성서를, 예수의 근본 정신을 피상적으로만 이해하거나 자기 중심적으로 오해하는 데서 온다. 예수를, 진리를 이기적 욕망 충족의 수단처럼 착각하며 간주하는 데서 온다. 이렇게 기독교인이 실제 예수의 모습에서 멀어지게 된 데에는 이유도 많고, 신학적으로 설명해야 할 것도 많지만, 여기서는 크게 두 가지 차원에서만 설명하고자 한다. 하나는 한국 기독교가 전해지게 된 정치 사회적 배경이고, 다른 하나는 근본주의적 사고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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