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현 객원논설위원

 
정치인들의 화려한 말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린다.

‘이 사회에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게 하겠다’ 또는 ‘국민의 눈물을 닦아 주겠다’는 등의 수사(rhetoric)가 그런 것들이다. 감동이 일지 않을 수 없는 레토릭이다. 국민의 감성을 자극하고 국민에게 희망을 던지는 메시지다.

하지만 현실의 정치라는 것이 꼭 그 말대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런 정치를 하고 싶겠지만 하여간 잘 안 된다.

이렇게 말 잘하는 사람들이 대통령이 되고 국회의원이 돼도 사회는 하루아침에 본질이 달라지지 않는다. 이 말에 감동을 받았다면 얼마 안 가 실망한다. 감동이 컸다면 실망도 크다.

권력의 양지에 있는 사람들은 이 사회가 정의의 사회요 국민의 눈물을 닦아주는 정치가 행해지고 있다고 착각한다. 사람은 간사해서 오늘 좋아지면 어제의 고통을 잊는다. 같이 힘들었던 사람들의 처지도 잊기 쉽다.

어쨌든 권력이 바뀌어도 힘없는 사람들의 삶이 고달프거나 달라지지 않는 것은 어제나 오늘이나 마찬가지다.

현명한 사람은 정치가 바뀌거나 말거나 거기에 그렇게 연연하지 않는다. 자신의 삶을 누구에게 의존하려 하지 않고 스스로 개척해 나간다. 세상과 사회에 대해 담담한 식견을 가진다. 이런 사람들은 정치인의 말에 일희일비하지도 않는다.

사회의 본질은 언제나 정의와 불의가 뒤섞여 있다. 사람의 마음이 마치 선과 악이 뒤섞여 태초의 혼돈(chaos)처럼 돼 있듯이.

사회는 사람이 이루는 것이므로 궁극적으로 사람 마음이 사회의 모습을 결정한다. 정치는 이런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이 사회에 정의와 선이 넘치게 해야 한다.

말은 크게 해놓고 실제로는 파당의 이익이나 챙기고 국민에게 갈등을 조장하며 고통을 안겨 주어서는 안 된다.

언론도 마찬가지다. 언론의 존재 명분이나 정치의 명분은 같다. 정치가 그렇듯이 언론도 국민의 행복을 위해 존재한다. 그래야 마땅하다. 국민의 행복에 도움이 안 되는 언론은 사회의 악이다.

정치인이 입을 열면 국민을 팔듯이 언론은 정론(正論)이니 직필, 공정보도, 진실보도 등의 용어들을 아무 죄의식 없이 사용한다.

언론이 정론 직필 공정보도 진실보도를 해야 하는 것이 누구를 위해서인가. 독자인 국민을 위해서다. 국민이 그것을 바라기 때문에 국민에게 충실(loyalty to citizens)하는 것이 언론의 사명이다.

따라서 정치가 잘못되고 언론이 참 구실을 못하면 정치 언론은 다 같이 국민에게 죄짓는 것이며 국민을 배신하는 것이 된다. 우리 사회는 툭하면 의리를 찾는다. 의리 얼마나 좋은가. 정치와 언론은 국민에 대한 의리를 배신하면 안 된다.

이같이 큰 의리를 지키는 것이 참 의리다. 깡패사회나 골목의 의리처럼 파당이나 사주 한사람의 의리에 집착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언론은 어찌 보면 레토릭에서 정치보다 한 발 더 앞선다. 민주주의·자유·인권의 파수꾼임을 자처한다. 권력의 횡포로부터 이 같은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지켜내겠다고 큰소리를 친다. 그렇지만 무서운 권력이 뚜벅뚜벅 언론 앞으로 걸어오면 뒤로 물러서고 비굴해진다.

나폴레옹이 크레타 섬을 탈출했을 때 그를 비하했던 언론이 그가 파리에 나타나자 ‘나폴레옹 황제 만세’를 불렀듯이 말이다. 지금이라고 크게 다른가.

지금 우리 사회는 평화가 절실하다. 국민 통합, 화합이 중요하다. 정치권의 갈등이 국민의 갈등으로 번지는 것을 막아야 할 최후의 보루는 언론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언론은 우리 사회의 갈등을 더 부추기고 있지 않은지 오만을 털고 냉철히 성찰해야 한다. 들끓는 정치 갈등, 사회 갈등, 종교 갈등. 사회와 종교 간의 갈등의 해결사는 언론이 맡아야 한다.

어디 시대가 부르는 그런 참 언론 없을까. 반드시 나타날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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