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강대학교 종교학과 교수인 프랑스 출신의 서명원(56) 신부는 불교에 조예와 관심이 무척 깊다. 그는 “다른 종교의 우물을 마시면서 그리스도교의 본질에 더 가까워졌다”고 말한다. 거울을 봐야 나를 볼 수 있지 않은가? 그는 기독교인에게도, 불교인에게도 이웃 종교의 우물은 생명의 우물이고, 지혜의 우물이라고 하였다. 통섭의 지혜를 강조하는 말로 들린다. 세계적인 비디오아티스트 백남준(Paik, Nam June 1932~2006, ROK Video)이 최근 독일의 잡지 에서 위대한 작고 현
불교계 사정에 눈이 어두운 나는 서울 강남의 봉은사 주지 명진스님과 개인적인 안면이 없다. 스님이 1986년의 저 유명한 ‘9.7 해인사 승려대회’를 주도하고 10.27법난 진상규명에 앞장선 다소 사회참여적 인물이란 것은 잘 알고 있었지만 그간 만나 뵐 기회는 별로 없었다. 다만 지난 5월 경복궁에서 열린 노무현 대통령 국민장 때 4대 종단 중 불교계를 대표해서 명진스님이 장의식 집전을 할 때 잠깐 스친 적은 있었다. 바로 그 명진 스님이 기축년 세모에 속진이 난무하는 속세의 잡것들을 향해 벽력같은 일성을 날려 화제를 모으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이 개인적으로 절친한 목사를 청와대로 불러 예배를 본 것으로 알려져 종교계는 물론 정치권까지 소란하다. 불교방송(BBS)의 보도에 따르면 이 대통령은 평소 기독교 방송의 계열사인 CBS TV를 시청하는 형식으로 교회에서의 예배 참석을 대신해 오다 지난달 8일에는 두레교회 김진홍 목사를 청와대로 불러 예배를 봤다. 뉴라이트 전국연합 전 상임의장인 김진홍 목사는 이 대통령이 대통령 후보 시절 ‘뉴라이트 전국연합’을 이끌며 열성적으로 선거운동에 앞장선 보수적 인물이다. 불교방송의 보도에 대해 청와대가 완강하게 부인하지 않는
기축년(己丑年)을 마감하는 달이자 경인년(庚寅年)을 준비하는 2009년 12월이 시작된다. 필자는 아무도 말하기 싫어하는 내용을 피력해 보고자 한다. 사회적 국가적으로 볼 때 총체적 위기상태라 해도 지나치지 않았을 올 한 해, 모든 현안은 지금 이 시간도 파국으로 치닫고 있다. 그런 가운데서도 세계의 경제위기를 가장 먼저 슬기롭게 극복해 나가는 위대함도 엿볼 수 있는 한 해였다. 하지만 사회적으로나 국가적으로 혼돈과 혼탁 그 자체였음을 부인할 자는 아무도 없으리라 생각된다.원인 없는 결과가 어디 있겠는가. 이렇게 되기까지는 분명 근
최근 몇 년 동안 종교계의 화두는 단연 ‘화합과 상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각 종교가 연합해 여러 기관과 단체를 만들고, 연중 큰 문화행사를 진행하기도 한다. 성탄절과 석가탄신일이 되면 기독교계와 불교계가 서로 축전을 보내고, 행사에 참여해 각 종교의 절기를 축하하는 모습도 이젠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서로가 서로의 종교를 인정하고 함께 상생하자는 데 뜻을 모은 것이다. 이를 위해 각 종교의 대표자들이 정기적인 모임을 갖는가 하면, 종교지도자협의회를 만들어 국가의 대소사에 각 종단의 의견을 표명하고 문제를 해결해 가고자 하
“어느 날 배불리 먹이를 먹고 늘어져 있던 사자에게 멧돼지 한 마리가 시비를 걸어온다. 평소 같았으면 한입에 잡아먹었겠지만, 너무 배가 불렀던 사자는 그냥 그 자리를 피하려 한다. 그런데 멧돼지는 사자가 자기를 무서워해서 도망간다고 착각한다. 그리고는 결투를 신청한다. 일주일 뒤에 결투를 하기로 하고 의기양양해서 집으로 돌아온 멧돼지. 하지만 그 얘기를 들은 부인은 ‘우린 이제 사자에게 다 죽었다’며 울어대고, 멧돼지는 그때야 자신이 크게 착각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멧돼지의 부인은 사자와의 결투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묘책이라며 몸에
지난 여름은 참 무더웠다. 그러나 어김없이 가을이 왔다. 또 한로, 상강이 찾아오면서 아름답던 가을이 아쉽기만 하니…. 겨울이 되면 하얀 눈꽃송이를 보면서, 벚꽃 피는 희망의 봄을 기다린다. 사계절!! 참 의미 있는 단어다. 세계 인류사를 보면, 사계절에 속해 있는 나라가 세계를 제패한 경우가 많았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예컨대 그리스·로마제국, 비잔틴제국, 몽고제국, 오스만 투르크제국, 스페인, 프랑스, 영국, 독일, 이탈리아, 일본 그리고 미국과 중국 등이 그렇다. 하다못해 조그만 네덜란드도 사계절이 있고, 그 나라도 한때
최근 ‘백제 가람에 담긴 불교문화’ 특별전을 통해 백제 금동대향로(국보 제287호)가 대중들에게 공개됐다. 백제 금동대향로는 백제 불교미술의 최대 걸작으로 평가되는 문화재이며 이날 조계종 총무원장인 지관스님은 “많은 사부대중들이 백제불교미술의 정수를 관람하길 바란다”며 불교문화에 대해 선전했다. 최근에는 인기리에 방영 중인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덕만공주(훗날 선덕여왕)가 불교를 부흥케 하려는 모습이 방영되면서 불교의 역사적 위치도 가늠케 했다. 드라마 ‘선덕여왕’의 배경이 되는 신라뿐 아니라 백제를 비롯한 통일신라시대는 불교문화가
모든 종교는 특징적인 표상 또는 상징을 가지고 있다. 사랑, 자비. 인·예와 같은 종교의 표상은 세상의 평화와 인간다운 생활을 위한 소중한 덕목이자 인간이 추구하는 지고의 목표이기도 하다. 종교의 교리를 사회현상에 맞게 변용 또는 변화를 요구하는 것은 무리이자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표상들은 서로 조화롭게, 또는 대체적 기능을 다하며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종교지도자들의 솔선수범적 희생과 헌신, 그리고 근검절약과 소탈함의 모습은 세상의 빛이요 소금으로서의 참 형상으로 만인의 존경을 받는다. 인
개신교의 성장과 종교편향 1970년대 경제 성장기는 개신교의 양적 성장기이기도 하다. 급속히 근대화되던 시기 농어촌을 떠나 도시로 몰려든, 마음 둘 곳 없던 70년대 노동자들 상당수가 상대적으로 문명적 이미지를 지닌 기독교회로 몰려들었다. 그렇게 한국개신교 대형화의 기초가 닦였고, 주류 세력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1992년에는 개신교인 김영삼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었고, 청와대에서 예배를 보는 일도 생겼다. 청와대라는 공적 장소에서 개인적 종교 행위가 이루어지는 데 대한 문제의식을 갖는 이들도 많았지만, 그렇다고 사회문제가 될 정도의
사람이 모이면 사회가 형성되고 종교는 번성한다. 사람의 능력은 유한하여 절대자의 도움을 구하고 싶어하는 것은 그들의 기본적 욕구이다. 사회질서의 윤택함과 인간다움의 생활관을 정립하는 데 있어서 종교의 기능은 중요하다. 각 종교는 우리나라 역사의 질곡 속에서 민중의 애환을 보듬어 주고 희망을 안겨주는 멘토 역할을 다하였다. 반듯한 사회형성을 위해 각 종교는 나름대로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특히 우리 민족은 태초부터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종교친화적 성향을 지니고 있다. 이 땅의 종교들은 세계종교역사상 전무후무한 기록들을 세웠다. 한국불
지난 10일은 한국장로교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한 지 71년째 되던 날이었다. 당시 일제의 압력에 못 이겨 가장 큰 개신교 교단인 장로교가 자신들이 믿는 하나님이 아닌 일본의 태양신을 섬기는 데 동의했던 것이다. 이는 개신교에서 말하는 ‘우상숭배’라는 죄를 범한 사건이기도 했지만 일제 앞에 신앙인 모두가 굴복했다는 것만으로도 치욕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다. 문제는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다. 잘못을 뼈저리게 뉘우쳐야 할 종교지도자들이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는 데 더 큰 문제가 있다. 교회를 유지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는 핑계
한국사회에서 정치와 종교처럼 미묘한 관계도 흔치 않다. 한국은 기본적으로 헌법에 따라 정교분리(政敎分離)를 원칙으로 하고 있다. 헌법 20조에는 “①모든 국민은 종교의 자유를 가진다. ②국교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종교와 정치는 분리된다.”라고 정교분리원칙이 명시되어 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가까이는 이명박 정부 출범 직후 내각과 청와대 수석비서관 급에 대한 인선과정에서 특정종교와 특정교회 편중 시비가 불거졌던 게 그 대표적인 사례다. 당시 야당과 일부 시민단체들은 고려대, 소망교회, 영남출신을 의미하는 이른바 ‘고소영’
천지일보 기자로 각 종단별 취재를 다니면서 참 많은 것을 느끼고, 또 배우고 있다. 사회일간지로 종교면을 특화시킨 신문이 낯설어서인지 혹은 신문사 제호가 낯설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사람들의 반응이 제각기다. 범종교를 다룬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은 기자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천지일보라는 이름으로 취재를 다닐 때마다 제호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생각이 각기 다른 것을 볼 때에 세상에는 참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고는 한다. 개신교가 생각하는 ‘천지’가 다르고, 가톨릭이 생각하는 ‘천지’가 또 다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