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ㆍ사진 이의준 왕릉답사가가장 먼저 ‘목릉’에 들어선 무덤은 조선 제14대 왕 선조의 첫번째 왕후인 의인왕후의 ‘유릉’이었다. 1600년 12월 22일 의인왕후의 장사를 지냈다. 7개월 전 승하했는데 처음 포천 신평에 능자리를 정하고 절반의 공사가 진행됐는데 술관(점치는 관리) 박자우가 불길하다며 소(疏)를 올렸다. 이에 다시 건원릉 안에 정하고 유릉이라 했다. 의인왕후는 후궁의 자식들, 특히 광해군을 각별히 챙겼고 광해군이 세자 책봉과 왕위에 오르도록 지지했다. 그러나 자식 없이 45세에 세상을 떴다. 이에 선조는 32년 연하의
글·사진 이의준 왕릉답사가구리 동구릉의 목릉은 선조와 두 왕후(의인왕후 박씨와 인목왕후 김씨)가 잠들어 있다. 조선왕릉 최초로 왕과 왕후들이 같은 묘역에 자리했다. 목릉은 왕후들의 능호(능의 명칭)를 합쳐서 정해졌다. 처음 1600년 의인왕후가 유릉에 묻혔다. 1608년 선조가 승하하자 숙릉으로 칭하려다 목릉으로 바꿔 건원릉 서쪽(현 헌종 경릉)에 조성했다. 1630(인조 8)년에 터가 안 좋다는 상소에 따라 현 위치로 옮기며 유릉과 목릉을 통일해 목릉으로 했다. 1632(인조 10)년에 인목왕후 김씨가 죽자 능호를 혜릉으로 정했으
2019년부터 월간 글마루에서 연재하고 있는 ‘남한지역 고구려 유적 답사’ 시리즈를 천지일보 온라인을 통해 선보입니다. 우리의 역사를 알고 더욱 깊이 이해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과거 연재시기와 현재 노출되는 기사의 계절, 시간 상 시점이 다소 다른 점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글.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사진. 글마루잃어버린 고대역사 ‘내이미’ 지리지에 내을매(內乙買) 혹은 내이미(內省米)라는 지명이 나온다. 한주(漢州, 지금의 서울)를 기록한 권 제37 잡지 제6 지리4에 ‘內(-乙)買, 一云
글ㆍ사진 이의준 왕릉답사가 세종대왕 부부는 조선 왕실 처음 합장릉에 자리했다. 부부의 정과 서로의 역할도 출중했다. 세종의 처세는 달랐다. 인간적인 배려와 제도적 성과를 중시하며 덕치를 펼쳤다. 왕은 성실하고 꼼꼼하며 창의적이었다. 부왕이 추천한 인사를 끝까지 믿고 ‘의논’하며 정사를 돌봤다. 소헌왕후 또한 최고의 왕비로 평가되고 있다. 시아버지에 의해 친정아버지가 처형되고 어머니와 동생이 노비로 전락했으며 자신도 폐비가 될 뻔했지만 왕비의 자리를 굳건히 지키며 본분을 다했다. 왕과 왕비의 인품과 덕망이 궁내외의 백성에게 신뢰와 화
글·사진 서상진 세계잡지연구소장은 한국문단을 대표하는 문학잡지다.1966년 1월 15일 창간했는데, 그보다 11년 먼저인 1955년에 발행된 월간 과 선의의 경쟁을 하며 지금까지 우리나라 문학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고 있다.필자는 1966년 창간호부터 1980년 통권 56호로 강제 폐간될 때까지 56책 완질과 1985년 부정기 1호, 1987년 부정기 간행물, 1988년 3월 1일에 나온 통권 59호(복간호)를 전부 소장했다. 여기에 그들을 아울러 서지학적으로 소개한다.제호: 발행일: 1966년 1
글.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사진. 글마루 2019년부터 월간 글마루에서 연재하고 있는 ‘남한지역 고구려 유적 답사’ 시리즈를 천지일보 온라인을 통해 선보입니다. 우리의 역사를 알고 더욱 깊이 이해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과거 연재시기와 현재 노출되는 기사의 계절, 시간 상 시점이 다소 다른 점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맥국의 고지·춘천의 역사 강원도 춘천은 고대 맥국(貊国)의 땅이라고 한다. 우리 역사에서 잃어버린 맥국은 실재 존재한 왕국이었을까. 지배자들이 살았던 왕성은 어디일까. 문화는 어떠했을까. 글마루 취재반과
글.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사진. 글마루 2019년부터 월간 글마루에서 연재하고 있는 ‘남한지역 고구려 유적 답사’ 시리즈를 천지일보 온라인을 통해 선보입니다. 우리의 역사를 알고 더욱 깊이 이해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과거 연재시기와 현재 노출되는 기사의 계절, 시간 상 시점이 다소 다른 점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양평군의 고구려 역사 경기도 양평 땅은 고구려시대 양근군(楊根郡) 또는 항양군(恒陽郡)이라 했다. 신라 경덕왕 때 빈양(濱陽)이라고 고쳐 기천군(沂川郡)의 영현으로 삼았다. 빈양은 ‘바로 물가에 있는 산
글.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사진. 글마루 2019년부터 월간 글마루에서 연재하고 있는 ‘남한지역 고구려 유적 답사’ 시리즈를 천지일보 온라인을 통해 선보입니다. 우리의 역사를 알고 더욱 깊이 이해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과거 연재시기와 현재 노출되는 기사의 계절, 시간 상 시점이 다소 다른 점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김포 고구려 비사성 고현(古縣)이었던 김포시 통진(通津)은 역사의 뒤안길에 묻힌 곳인가. 옛날 현 소재지가 김포에 통합됨으로써 이 지역의 고대 역사가 흐려졌다. 김포시 월곶면 성동리에는 바다를 지킨 고구
2019년부터 월간 글마루에서 연재하고 있는 ‘남한지역 고구려 유적 답사’ 시리즈를 천지일보 온라인을 통해 선보입니다. 우리의 역사를 알고 더욱 깊이 이해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과거 연재시기와 현재 노출되는 기사의 계절, 시간 상 시점이 다소 다른 점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글.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사진. 글마루 원주는 고구려 ‘평양경’인가 권46권 원주목(原州牧) 연혁조를 보면 ‘이곳은 고구려 시기 평원군(平原郡)이라고 했다’고 기록된다. 재미있는 것은 고구려의 수도가 있는 평양성 일대도 평원군이
2019년부터 월간 글마루에서 연재하고 있는 ‘남한지역 고구려 유적 답사’ 시리즈를 천지일보 온라인을 통해 선보입니다. 우리의 역사를 알고 더욱 깊이 이해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과거 연재시기와 현재 노출되는 기사의 계절, 시간 상 시점이 다소 다른 점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글.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사진. 글마루 임계면 송계리 고구려 산성과 고분군 송계리산성은 강릉·동해지역으로부터 정선으로 넘어오는 길목인 삽당령과 백복령이 한눈에 보이는 전략적 요충지에 자리 잡고 있다. 이 성도 고구려계의 석축 모습이 완연하다.
지역사 이야기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지역 곳곳의 역사를 재조명하고자 합니다. 흔하게 역사 교과서 등에서 볼 수 있는 주제가 아닌, 내가 발 딛고 살아가는 이 지역을 지켜줬던 과거의 흔적들을 찾아보는 시간이 됩니다. 이 글을 통해 과거의 역사를 알고 이곳에서 우리가 살아갈 수 있음을 다시금 감사하는 시간이 됐으면 합니다.◆ 조국을 위해 조국을 떠나다“동서 역사상 나라가 망한 때 나라를 떠난 충신 의사가 수백, 수천에 그치지 않는다. 그러나 우당 일가족처럼 6형제와 가족 40여 명이 한마음으로 결의하고 나라를 떠난 일은 전무한 것이다
서울서 차로 2시간 거리충청남도 기념물 제76호 김좌진 장군 순국 90주기계몽운동·항일투쟁에 힘써 승리로 이끈 청산리대첩10월 25일 추모제 열어[천지일보=정다준 기자] 임진왜란 때 조선을 승리로 이끈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있었다면 일제강점기 때에는 독립군을 승리로 이끈 백야 김좌진 장군이 있다. 올해는 김좌진 장군이 순국한 지 90주기다. 특히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청산리대첩 100주년이 되는 해로 그 의미가 더해진다. 한해를 시작하는 이때. 백야 김좌진 장군 생가터에서 나라를 되찾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던 독립투사의
글 이정은 대한민국역사문화원 원장, (사)3.1운동기념사업회 회장 1922년 시베리아를 강점했던 일본군이 철수하자 산중에 들어가 항일 빨치산 투쟁을 벌였던 한인들은 평지로 내려와 일상으로 돌아왔다. 소련 정부는 1930년대 초까지 소수민족들의 자치와 언어, 관습, 풍습을 장려하는 문화정책을 썼다. 한인사회는 안정을 되찾고, 민족교육사업에 많은 힘을 기울였다. 그 결과 1917년 혁명 이전 극동지역에 45~50개를 넘지 않던 한인 초급학교가 1930년대 중반에는 287개로 증가되었다. 학생 수도 2만 1956명이나 되었다. 혁명 전에
글 이정은 대한민국역사문화원 원장, (사)3.1운동기념사업회 회장 님 웨일즈(Nym Wales)는 한국의 독립운동가 김산(본명 장지락)을 주인공으로 한 ‘아리랑’이란 책 저자로 한국 사회에 잘 알려진 미국의 여류 언론인이자 작가이다. 그녀의 남편 에드가 스노우(Edgar Snow)는 ‘중국의 붉은 별(1937)’이라는 책을 써서 서방세계에 처음으로 1930년대 중국 대륙에서 진행되고 있었던 공산혁명과 마오쩌둥(毛澤東, 1893~1976) 등 지도자들에 대해 알렸다.마오가 이끄는 혁명세력은 중국 남부 농촌지역에서 세력을 키워가다가 장
글 백은영, 사진제공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 별기군(1900)1881년(고종 18)에 설치된 우리나라 최초의 신식 군대인 별기군(교련병대)의 모습을 담은 사진이다. 강화도조약 이후 서구 열강의 침투가 심해지자 고종은 국방을 튼튼히 하기 위해 군사제도를 기존의 5군영에서 무위영과 장어영의 2군영 체제로 개편하고 별도로 무위영 안에 신식 군대를 양성하는 별기군을 창설했다.별기군의 총책임자인 교련소 당상은 민영익이 담당했으며, 정령관에는 한성근, 좌부령관에 윤웅렬, 우부령관에 김노완, 참령관에 우범선이 임명됐다. 군사 훈련
[천지일보=백은영 기자]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 자유는 그저 얻어진 것이 아니다. 우리 민족의 수많은 질곡의 역사 속에서 나라와 민족을 지키기 위해 죽어간 순국선열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가깝게는 동족상잔의 비극 속에서 나라를 지킨 참전용사와 또 이름도 없이 스러져간 수많은 전사자들의 피의 값으로 지켜낸 자유다.아직 엄마의 손길이 필요한 어린 소년들이 학도의용군이 되어 나라를, 내 가족을, 내 친구를 전쟁의 포화 속에서 지켜냈다. 그렇게 얻은 자유다.이번에 소개할 사진들은 개화기 군인들의 모습이다. 갑오경장(1894)과
신의주 교회 (1915) 신의주 제2교회 신정전의 모습이다. 서양 고딕식 건물로 지어진 이 교회에서 한경직 목사가 사역했다. 처음에는 전도사로 교회를 섬기다가 1년 후 목사 안수를 받고 목회에 전념했다. 한경직 목사는 특히 청년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신앙교육과 함께 다양한 애국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당시 일제의 내선일체로 신사참배를 강요당했지만 이를 반대한 한경직 목사와 장로들이 20여일 동안 신의주경찰서에 갇히기도 했다. 하지만 그 사이 일본 경찰들에 의해 교회에 남아 있던 제직들은 신사참배에 동의했고, 한경직 목사
글 이정은 대한민국역사문화원 원장, (사)3.1운동기념사업회 회장 김필순 형제, 집안의 노비들 해방배재학당 졸업 후 통역•교수 활동안창호에 신민회 비밀본부 내줘 간도 통화현으로 건너가 병원 개업헤이룽장성으로 옮겨 독립군 도와일본 첩자에 의한 독살로 생 마감외국 선교사들이 황해도 장연의 소래마을에 오면 신약성경을 번역했던 서상륜, 서경조 형제의 집이나 김판서 댁이라 불리는 김윤오(金允五, 容淳)의 집 사랑채에 묵었다. 김윤오 집안은 서울에서 큰 부자로 살다 고조부 대에 낙향하여 소 60마리를 도지로 주었고, 소래마을 불타산 앞 부채꼴
배론학당(제천) 1890년배론신학교(충청북도 기념물 제118호, 소재지: 제천시 봉양읍 구학리)1855년 조선교구의 장상이던 메스트르(Maistre, 1808~1857) 신부는 박해 아래서 장주기(요셉, 1803~1866)의 집에 한국 교회사 최초의 가톨릭 신학교를 설립했다. 신학교에 1856년 교장으로 부임한 푸르티에(Pourthié, 1830~1866) 신부와 1861년 말에 부임한 프티니콜라(Petitnicolas, 1828~1866) 신부는 김 사도요한, 권 요한, 유 안드레아, 임 빈첸시오, 박 필립보, 이만돌(바울리노),
“평양의 명소 연광정에서 대동강을 끼고 부벽루에 오르다 보면 한-양옥 절충의 우람한 조선집이 나타난다. 아름드리 기둥에는 주홍칠을 하고 벽마다 그림을 그려놓은 이 집이 당시 팔도에 유일했던 평양 기생학교다.” -이규태 역사 에세이 中- “놀이터의 노래에 목이 쉬어/ 돌아와서 화가 나 함부로 뜯는 가야금이여 줄이 끊어지도록 뜯으며/ 뜯으며 이 밤을 새일 거나” - 놀이터의 노래에, 장연화(1920년대 평양기생)-[천지일보=백은영 기자] 한옥과 양옥을 절충한 듯한 모습의 평양기생학교 전경이다. 당시 명성이 자자했던 곳답게 건물이 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