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대 왕 선조, 의인왕후, 인목왕후 능

사후 7개월 만에 묻힌 의인왕후
왜군, 조선왕릉 파헤치고 불태워
무자비한 살육에 시신도 훼손해
선조 “형제를 사랑하라” 유언 남겨

글ㆍ사진 이의준 왕릉답사가

가장 먼저 ‘목릉’에 들어선 무덤은 조선 제14대 왕 선조의 첫번째 왕후인 의인왕후의 ‘유릉’이었다. 1600년 12월 22일 의인왕후의 장사를 지냈다. 7개월 전 승하했는데 처음 포천 신평에 능자리를 정하고 절반의 공사가 진행됐는데 술관(점치는 관리) 박자우가 불길하다며 소(疏)를 올렸다. 이에 다시 건원릉 안에 정하고 유릉이라 했다. 의인왕후는 후궁의 자식들, 특히 광해군을 각별히 챙겼고 광해군이 세자 책봉과 왕위에 오르도록 지지했다. 그러나 자식 없이 45세에 세상을 떴다. 이에 선조는 32년 연하의 인목왕후를 맞았다. 인목왕후가 1606년 영창대군을 낳으니 선조가 매우 기뻐했다. 그러나 후계에 문제가 생겼고 2년 후 선조는 승하했다. 광해군이 왕이 되니 인목왕후는 폐비되고 어린 아들 영창대군이 죽는 비극을 겪었다. 나중에 대비로 복귀했지만 가장 참혹한 슬픔을 겪어야만 했다. 1632년 세상을 뜨니 무덤을 ‘혜릉’으로 칭하려다 이 역시 목릉으로 통일했다. 임진왜란의 고난을 겪으며 큰 아픔과 시련을 간직한 채 세상을 뜬 왕과 왕후들은 목릉에서 재회했다.

인목왕후 능의 봉분이다. 인목왕후의 능은 처음에 혜릉으로 하려다 목릉과 같은 능역이므로 통칭해 목릉으로 했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10.22.
인목왕후 능의 봉분이다. 인목왕후의 능은 처음에 혜릉으로 하려다 목릉과 같은 능역이므로 통칭해 목릉으로 했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10.22.

◆왜적의 급습, 보름 만에 한양까지

1592(선조 25)년 4월 13일 고니시 유키나가를 선봉으로 2만여명이 부산을 상륙했다. 초기에 조선인 3천명이 살육됐다. 몇 일 후 왜군 3만 4천명이 추가 상륙했다. 조정에는 4일후 보고됐다. 선조는 유성룡, 김명원, 이일, 신립에게 북상을 막도록 명했다. 그러나 왜군을 당하지 못했다. 다시 명장 신립과 대규모 병력을 내보냈으나 충주 탄금대에서 전멸하고 신립은 강물에 빠져 죽었다. 1592(선조 25)년 4월 28일 한양이 점령되기 직전이었다. 선조는 왜군에 잡힐 위기에 처했다. 파천이 논의되니 신하들은 반대했으나 영의정 이산해가 울기만 하다가 “피난한 사례가 있다”고 했다. 결국 파천키로 했다. 선조는 이원익을 평안도로, 최흥원은 황해도로 보내면서 백성을 격려하고 지키라고 당부했다. 신잡은 세자를 책봉해 백성을 진정시키자 했다. 선조는 “광해군이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니 세자로서 어떠한가”라고 하니 모두 절을 하고 이튿날 광해군을 세자로 삼았다. 선조는 분조(조정을 둘로 나눔)해 광해군에게 맡겼다. 선조는 김명원과 신각이 한강을, 이양원이 서울을, 유성룡이 중국과의 교섭을 맡도록 했다. 4월 30일 새벽, 선조는 서울을 떠나 5월 1일 저녁 개성에 도착했다. 풍덕군수가 음식과 따로 쌀 5석을 바치니 왕은 쌀을 호위병들에게 나눠 줬다.

의인왕후 능의 봉분이다. 의인왕후가 사후 7개월 만에 이곳에 묻히니 처음에 유릉이라 했다가 선조의 목릉이 들어서면서 능호를 통일했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10.22.
의인왕후 능의 봉분이다. 의인왕후가 사후 7개월 만에 이곳에 묻히니 처음에 유릉이라 했다가 선조의 목릉이 들어서면서 능호를 통일했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10.22.

◆첫 승전보 전한 이순신에 크게 기뻐해

왜군은 20일 만에 한양에 이르렀고 평양성까지 진격했다. 이덕형은 구원병을 청하러 요동으로 떠났다. 이때 이순신의 승전보가 선조에게 전해졌다. 이순신은 1592년 5월 7일 옥포 앞바다에서 일본함대 26척을 침몰시켰다. 선조는 크게 기뻐하며 이순신을 종2품으로 승진시켰다. 이순신은 합포와 적진포, 한산도, 당포, 당항포, 노량, 부산포 등에서 잇따라 승리를 거뒀다. 육지에서는 의병 곽재우, 60세의 고경명, 최경희와 김천일, 의병 정문부, 조헌, 승려 영규 등이 나서서 전투를 벌였다. 이 가운데 함경도에서 왕자 임해군과 순화군이 왜군에 잡혀 포로가 됐다. 다행히 전쟁은 진주성에서 승리하며 호전되고 있었다. 1592년 7월 명나라가 파병했고 이어 일본과 50일간 휴전을 합의했다. 일본은 임해군과 순화군을 풀어주며 남쪽으로 퇴각했다. 그런데 6월 22일 10만 왜군이 진주성을 공격해 함락시켰다. 백성 수만 명이 살육됐다. 명나라와 일본은 조선의 반대에도 강화를 하자했고 1593년 10월 선조는 1년 반 만에 환궁을 했다. 전쟁과 굶주림, 역병으로 온 국토에 시체가 넘쳐났다. 군량미도 없고 관군의 유지도 어려웠다. 훈련도감을 두고 서원에서 군사훈련을 실시하며 깨진 종을 모아 대포를 만들었다. 그런데 1597년 1월 풍수길은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왜군 20만으로 다시 쳐들어왔다. ‘정유재란(丁酉再亂)’이다. 2월 이순신이 무고로 하옥되고 원균이 3도수군통제사가 됐다. 7월 원균이 최대의 해군을 이끌고 칠전량에 나섰으나 전멸했다. 선조는 이순신을 3도 수군통제사로 복직시켜 명량해전에 보내니 승리를 거뒀다. 1598년 2월 명나라가 조선에 해군을 파병했다. 그런데 9월 갑자기 풍수길이 아프다더니 조선에서 철수하라는 말을 남기고 죽고 말았다. 11월 이순신이 철수하는 왜군을 섬멸하던 중 전사했다. 1599년 1월 조선은 각지 병마를 철수시켰고 명나라 군대도 1600년 9월에 모두 돌아갔다.

망주석은 묘를 멀리서 알아볼 수 있게 세운 기둥이다. 봉분 앞 좌우에 하나씩 있다. 임진왜란 이후 최초로 조성된 의인왕후의 능은 망주석과 장명등에 왕릉 최초로 꽃무늬가 새겨졌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10.22.
망주석은 묘를 멀리서 알아볼 수 있게 세운 기둥이다. 봉분 앞 좌우에 하나씩 있다. 임진왜란 이후 최초로 조성된 의인왕후의 능은 망주석과 장명등에 왕릉 최초로 꽃무늬가 새겨졌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10.22.

◆왜적, 조선인 귀 베고 왕릉 불태우고   

왜군에 의해 죽은 조선인은 헤아릴 수 없었다. 왜군은 무자비한 살육으로 겁을 주며 조선 4개도를 차지하려했다. 조선인을 마구 죽이라하니 공을 세우고 그 증표로써 조선인의 귀와 코를 베어 본국에 보냈다. 일본 각지의 조선인 귀 무덤(이총) 중 교토에는 9미터 높이로 조선인 12만 6천명의 귀와 코를 묻어 쌓았다. 조선 왕의 무덤을 파헤쳐 불태우기도 했다. 1593년 1월 22일 김천일이 보고하기를 “왜적이 태릉과 강릉, 대원군의 묘를 팠지만 뚫지 못하고 되돌아갔습니다”라고 했다. 2월 20일에는 “강릉 왕의 능에 불탄 흔적이 있고, 왕후의 능은 모두 탔으며 정자각은 소실되었습니다. 태릉은 능 전면이 반쯤 파졌습니다”라고 했다. 1593년 4월 13일 경기좌도 관찰사 성영이 아뢰기를 “지난 겨울 태릉과 강릉에 이어 선릉·정릉의 변고가 이와 같으니 왜적과는 한 하늘 아래에 살 수가 없습니다”라고 했다. 6월 16일 “왜는 찬탈로써 대를 이어 그 포악함이 가득 차니 근래에 더욱 날뛰어 병란을 일으키고 선릉과 정릉을 도굴하고, 그 시신을 훼손했습니다”라고 했다. 1595년 5월 18일 경상도 좌병사 고언백이 “요즘 왜적들이 작당하여 순장품을 노려 분묘를 모두 파헤치고 있습니다”라고 했다. 심지어 1596년 6월에는 선대왕들의 신위가 모셔진 종묘를 불태웠다.

의인왕후 능의 장명등이다. 장명등은 등불을 밝히는 의미의 상징적 석등이며 조선 왕릉에만 설치됐다.  4각 또는 8각으로 되어있고 형상도 다양하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10.22.
의인왕후 능의 장명등이다. 장명등은 등불을 밝히는 의미의 상징적 석등이며 조선 왕릉에만 설치됐다.  4각 또는 8각으로 되어있고 형상도 다양하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10.22.

◆선조, 뛰어났지만 불운한 왕?

선조는 왕이 되어 20년 안정적인 치세를 했다. 그러나 임진왜란 7년의 위기를 맞았다. 선조는 재위기간 21번이나 선위(왕의 자리를 물려줌)의 소동을 벌이며 왕에서 물러나고자 했다. 그만큼 힘들었던 것일까. 선조는 두 명의 왕후 등 10명의 부인에서 25명(14남)의 자녀를 뒀다. 그러나 자식들은 선조의 기대에 충분치 못했다. 1603년의 하루, 사신이 논했다. “왕은 30년을 기생이나 가무 등 오락이나 사냥도 없이 백성을 걱정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에 백성의 원망과 배신이 자자했는데 이는 왕자·제궁들이 농토를 빼앗아 소민이 힘들었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1606년 인목왕후가 적장자 영창대군을 낳았으나 왕위계승에 논란이 불거졌다. 그러나 1607년 10월 9일 선조가 아침에 일어나 방을 나오다 쓰러졌고 4개월 후 1608(선조 41)년 2월 1일 경운궁 석어당에서 57세로 승하했다. 광해군이 왕위를 이었다. 선조는 유언으로 “형제 사랑하기를 내 있을 때처럼 하고 참소하는 자가 있어도 삼가듣지 말라”고 했다. 1608년 2월 21일 실록은 “왕은 불세출의 자질을 타고나 큰일의 뜻을 지니고 옛날보다 융성한 성대함을 이룩하려 했었다. 그런데 불행히 왜적의 변을 만나 의리를 지키다가 화란을 당하니 스스로 뜻을 실천에 옮기지 못함을 평생 개탄하였다. 선대 종계의 오랜 잘못을 씻고 나라를 빛내 후세에 전하며, 왜구를 물리치고 국가를 재조하는 공적을 이룩하였으니, 공과 업적이 있다. 위대하다. 슬픈 일이다”라고 했다. 선조수정실록 총서1권 “왕께서는 초기에 정신을 가다듬고 정사를 잘 다스리려 애썼으며, 어진 이를 존중하고 도를 소중히 여겨 백성들은 치세에 살게 되었다. 그러나 임진년의 난리를 만나 26년 동안의 훌륭한 치적의 기록들이 모두 타버려 남은 것이 없게 되었다. 어찌 가슴 아프고 애석하지 아니하겠는가”라고 했다.

인목왕후 능의 혼유석. 원래 명칭은 석상이다. 혼유석이라는 명칭은 임진왜란 이후부터 속칭으로 사용되며 혼이 쉬는 의미로 해석된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10.22.
인목왕후 능의 혼유석. 원래 명칭은 석상이다. 혼유석이라는 명칭은 임진왜란 이후부터 속칭으로 사용되며 혼이 쉬는 의미로 해석된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10.22.

◆선조와 왕후들, 죽어서 함께 해 

선조의 첫 왕비 의인왕후 박씨(1555~1600)는 반성부원군 박응순의 딸이며 15세인 1569년(선조 2)에 왕비로 책봉됐다. 성품이 온화하고 침착하며 자애로웠다고 한다. 24세에 죽은 공빈 김씨의 아들 4살 임해군과 3살 광해군을 친자식처럼 살피고 광해군이 왕세자가 되도록 적극 후원했다. 실록에는 “왕후가 후궁자식을 매우 예뻐했다. 왕이 장난치면 아이들이 왕후에게 달려갔고 왕후가 치마폭으로 그들을 가려주었다”고 했다. 왕후는 자식을 낳게 해달라고 절을 찾아 기도하니 “전국에 왕비의 원찰이 아닌 곳이 없다”고 했다. ‘살아있는 관세음보살'이라고 불렸다. 1600년 5월 46세로 경운궁에서 세상을 떠났다. 

2년 뒤인 1602년 선조의 두 번째 왕비 인목왕후 김씨(1584~1632)가 문정왕후의 경우처럼 외부에서 간택되니 19세였다. 연흥부원군 김제남과 광산부부인 노씨의 딸이다. 51세의 선조보다 32년, 선조의 아들 광해군보다 9살 연하였다. 1606년에 선조의 적자 영창대군을 낳았다. 1618(광해 10)년에 대비에서 폐해져 경운궁에 거처했다. 그러나 인조반정으로 다시 대비가 돼 능양군(정원군의 아들)을 왕으로 옹립하고 왕실 어른으로서 국정에 관심을 갖고 한글로 하교를 내리기도 했다. 1632(인조 10)년에 인경궁 흠명전에서 48세로 세상을 떠났다.

인목왕후 능의 고석이다. 혼유석을 받치고 있는 네 개의 공 모양 석물이며 족석 또는 부석이라 부르며 사악한 잡귀를 물리치는 역할을 한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10.22.
인목왕후 능의 고석이다. 혼유석을 받치고 있는 네 개의 공 모양 석물이며 족석 또는 부석이라 부르며 사악한 잡귀를 물리치는 역할을 한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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