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항유적 문수산성에서 고구려 흔적 찾아

글.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사진. 글마루

2019년부터 월간 글마루에서 연재하고 있는 ‘남한지역 고구려 유적 답사’ 시리즈를 천지일보 온라인을 통해 선보입니다. 우리의 역사를 알고 더욱 깊이 이해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과거 연재시기와 현재 노출되는 기사의 계절, 시간 상 시점이 다소 다른 점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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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수산성

김포 고구려 비사성

고현(古縣)이었던 김포시 통진(通津)은 역사의 뒤안길에 묻힌 곳인가. 옛날 현 소재지가 김포에 통합됨으로써 이 지역의 고대 역사가 흐려졌다. 김포시 월곶면 성동리에는 바다를 지킨 고구려 큰 성이 자리 잡고 있다. 이름 하여 문수산성(文殊山城). 두산 백과사전에 문수산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둘레 약 2400m, 지정면적 208,526㎡. 사적 제139호. 강화의 갑곶진(甲串鎭)을 마주보고 있는 문수산(文殊山)의 험준한 줄기에서 해안지대를 연결한 성으로 현재 해안쪽의 성벽과 문루(門樓)는 없어지고 산등성이를 연결한 성곽만 남아 있다. 명칭은 문수사(文殊寺)에서 유래하였다. 이 성은 갑곶진과 더불어 강화 입구를 지키는 성으로, 1694(숙종 20)년에 축성되었고 1812(순조 12)년 대대적으로 중수되었다. 다듬은 돌로 견고하게 쌓았고 그 위에 여장(女墻)을 둘렀다.

당시 성문은 취예루(取豫樓)·공해루(控海樓) 등 세 개의 문루와 세 개의 암문(暗門)이 있었다. 이 가운데 취예루는 갑곶진과 마주보는 해안에 있었으며 강화에서 육지로 나오는 관문 구실을 하였다. 특히 이 성은 1866(고종 3)년의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과 치열한 격전을 치른 곳으로 유명하다. 이 전투 때 해안쪽의 성벽과 문루가 모두 파괴되었고 지금은 마을이 되어 있다.

어느 기록을 봐도 문수산성이 고대에 축성됐다는 설명이 없다. 17세기 후반 조선 숙종 당시 축성하였으며 조선말 병인양요 당시 수난만을 기록하고 있다. 다만 지난 2009년 토지주택박물관에서 발굴하면서 삼국시대 성의 기초가 확인된 바 있으나 그 후 본격적인 연구가 안 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인천일보 2014년 1월 24일자)

이 성은 강화도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임진강 하구를 지킨 해항(海港) 요새로 매우 중요한 유적이다. 이 성의 역사를 규명하려면 우선 과거 통진현의 내력부터 살펴봐야 한다. <삼국사기> 잡지 제6 지리지 고구려조를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된다. 

금포현. 동자홀현 일운 구사파의, 평화압현 일운 별사파의 회일작회 (黔浦縣. 童子忽縣 一云 仇斯波衣. 平淮押縣 一云 別史波衣, 淮一作唯.) 

<동국여지승람> 통진현 조의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본디 고구려의 ‘평회’, ‘유’라 한 곳도 있다. 압현, 비사성이라 하기도 하고 별사파의라 하기도 한다. 신라 경덕왕이 분진이라 고쳐서 장제군의 속현으로 만들었다.(本 高句麗 平淮, 淮一作 唯, 押縣 一云 比史城 一云 別史波衣 新羅 景德王 改 分津 爲 長堤郡 領縣.)

통진현의 옛날 지명이 매우 많았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에서는 평회 압현, 혹은 비사성, 별사파의라 했던 것이다. 언어학자들은 이 같은 지명이 물(淮)과 연관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 가운데 가장 주목을 끄는 것은 ‘비사성(比史城)’이다. 당나라가 고구려를 침공할 당시 비사성을 거점으로 평양을 공략했다는 <구당서> 등 기록에 등장하는 성이기 때문이다. 이 기록에 등장하는 비사성은 중국 요령성 요하(遼河)유역에 있었던 고구려성이다. 

수양제와 당태종의 고구려침입과 관계가 있는 성이다. 614(영양왕 25)년 수나라의 내호아(來護兒)가 요동만(遼東灣)에 상륙하여 비사성(또는 卑奢城·沙車城)에 이르자 아군이 맞아 싸웠으나 이를 이기지 못하였다. 당시에는 고구려와 수나라가 모두 전쟁에 지쳐 있던 시기였으므로 영양왕의 타협안을 받고 수양제는 뒤에 귀국하였다. 그 뒤 645(보장왕 4)년 당나라 대군이 수군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와 비사성을 엄습하였다. 비사성은 삼면이 절벽으로 되어 있고 서문(西門)으로만 오를 수 있었는데, 치열한 전투 끝에 성이 함락되어 8000여 명의 주민이 생포되었다. 발해 때는 남경남해부(南京南海府) 요해주(遼海州) 남해군절도(南海軍節度) 관할이었고, 중국의 영토가 된 후에는 봉천부(奉天府) 해성현(海城縣)에 속하였으며, 금나라 때는 징주(澄州)라 하였다. 

비사성은 중국에서 평양에 갈 때 꼭 들러야 하는 교통상의 요로(要路)에 있어 역사적으로 많은 침략을 받은 곳이다. 비사성의 지명 유래는 ‘장성(長城)’이라는 뜻에서 나왔다.(한국민족 문화대백과)

비사성을 기록한 이 설명문을 검토하면 고구려가 해안에 구축한 해항성(海港城)을 비사성이라고 불렀음을 알 수 있다. 중국 측의 문헌 사료에도 고구려 비사성(卑沙城)을 중심으로 한 기술이 있으며 비교적 연구가 활발하다. 요령성 비사성을 답사해 온 동국대 윤명철 교수는 동아일보(2014. 2)에 쓴 글에서 비사성을 ‘해항도시’로 해석했다.

(전략)...‘항구도시론’을 만들어 고구려의 국내성·요동성, 발해의 상경성, 백제의 웅진성, 후백제의 전주 등은 ‘하항(河港)도시’로, 원조선의 왕검성, 고구려의 평양성, 백제의 한성과 사비성, 가야의 김해, 고려의 개경, 조선의 한양 등을 강과 바다가 만나는 ‘강해(江海)도시’로, 고구려의 비사성, 신라의 금성 등은 ‘해항(海港)도시’로 규정했다. 또 강의 양쪽 언덕과 본류와 지류가 만나는 곳에는 ‘강변방어체제’가 있었다. 실제로 한강 하류 양쪽 언덕에는 성들이 촘촘하게 쌓고, 임진강과 한탄강 양쪽에도 고구려가 쌓은 보루성이 10여 개나 남아 있다. 또한 강에서 순찰하고 전투를 벌이는 ‘강상 수군’ 존재 등을 제시했다. 고구려는 만주뿐만 아니라 한강과 임진강에서 수군 전투를 벌였고, 신라도 통일 직전에 당나라와 전쟁을 벌일 때도 고랑포 옆을 흐르는 호로하(임진강)에서 수전을 벌여 승리했다. 

사실 윤 교수는 비사성을 해항(海港) 도시로 해석했지만 김포 월곳면 문수산성을 언급하지 않았다. 그만큼 국내 학자들의 성지연구 카르텔에서도 누락된 셈이다. 

<삼국사기> 백제 본기 성왕조에 나오는 고구려 대군의 오곡원 전투 기록을 보면 529년 안장왕은 지금의 강화도인 혈성(穴城)을 먼저 함락하고 고양시로 진출 한 것으로 나온다. 혈성은 바로 지금의 강화 삼랑성이다. <삼국사기> 권 제26 백제본기 제4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10월에 고구려왕 흥안이 몸소 군사를 거느리고 침입하여 북변의 혈성을 공격함으로써 왕은 좌평 연모에게 보기 3만명을 거느리고 오곡원에서 이를 막아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고 2천여명의 사상자를 냈다(7年 冬十月. 高句麗王 興安 躬帥兵馬來侵, 拔北鄙穴城, 命佐平燕謀. 領步騎三萬, 拒戰於 五谷之原, 不克 死者二千餘人).

이때 고구려 군사들도 백제군과 맞먹는 3만 명 이상의 기병들로 추정된다. 안장왕은 비사성에서 전열을 정비하여 한강을 통해 지금의 고양시로 진군한 것으로 상정된다. 비사성은 바다에서 육지로 통하는 관문으로 이용되었기 때문이다. 안장왕의 공격로는 과거 광개토대왕이 수군을 거느리고 백제 한강유역을 지배할 때의 루트였던 것이다. 문수산성 고구려 비사성엔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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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수사

문수산성과 문수사

고구려 비사성은 후대에 들어 문수산성(文殊山城)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 성안에 있는 문수사에서 유래했다는 기록이 있다. <동국여지승람> 통진현 불우(佛宇)조에는 비아산(比兒山) 내에 두 개의 사찰이 있었던 것으로 나온다. 비아산은 바로 비사산의 다른 이름이다. 

문수사. 흥룡사 아울러 비아산에 있다. (文殊寺 興龍寺 俱在 比兒山) 문수사는 절 안의 석탑 등 유물로 보아 고려시대 창건으로 보아야 한다. 석탑은 2단의 기단 위에 세운 이형의 석탑이다. 지대석은 방형이며 그 위에 4각의 복련(伏蓮)석을 배치했다. 복련은 태조(太彫)이며 고려시기 유행한 문양이다. 

4각의 중대석에는 기둥이 모각되어 있으며 앙련(仰蓮) 상대석을 얹었다. 초충 옥신석은 낮다. 사각의 옥개석 상면에는 옥신을 받치기 위한 1단의 괴임이 마련되어 있다. 초층 옥개석은 체감이 확 줄어들었으며 옥개석의 모서리는 반전되어 있다. 상륜(相輪)은 제짝이 아니며 연봉형이다. 어떻게 보면 불상을 안치하기 위한 연화대좌와 석탑의 잔해를 조합한 것으로도 생각할 수 있다. 

문수(文殊)는 불가 용어로 문수보살을 줄인 말이다. 복덕과 반야지혜를 상징하는 보살이다. 부처 열반 후 인도에서 태어나 반야(般若)의 도리를 선양한 이로서, 항상 반야지혜의 상징으로 표현되어 왔다. 또 모든 부처님의 스승이요 부모라고 표현되어 왔다. 한반도에서는 삼국시대 이래 문수보살 신앙이 유행했다.이 사찰 인근에는 경기유형문화재 제91호로 지정된 조선 선조 때 고승인 풍담대사(楓潭大師) 부도와 탑비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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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수산성 성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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