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정선군 고성산성

2019년부터 월간 글마루에서 연재하고 있는 ‘남한지역 고구려 유적 답사’ 시리즈를 천지일보 온라인을 통해 선보입니다. 우리의 역사를 알고 더욱 깊이 이해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과거 연재시기와 현재 노출되는 기사의 계절, 시간 상 시점이 다소 다른 점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글.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사진. 글마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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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 고성산성 제1산성

임계면 송계리 고구려 산성과 고분군

송계리산성은 강릉·동해지역으로부터 정선으로 넘어오는 길목인 삽당령과 백복령이 한눈에 보이는 전략적 요충지에 자리 잡고 있다. 이 성도 고구려계의 석축 모습이 완연하다.

성은 경사가 심한 구릉의 동쪽 면에 외벽만 돌로 쌓고, 안쪽은 흙과 잡석으로 채운 내탁산성으로 비교적 일직선으로 쌓았다. 남쪽 성벽의 끝부분에서 구릉은 급격히 낮아져 다시 능선을 형성하는데, 이곳을 따라 4기의 무덤이 분포하고 있다. 모두 도굴되어 돌덧널(석곽)이 노출되어 있는데 1기의 대형무덤만 내부를 확인할 수 있다. 확인된 내부구조는 앞트기식돌덧널무덤(횡구식석곽묘)이다. 

산성과 무덤 주변에서 삼국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토기편들이 수습되고 있다. 고분군은 해발630m에서 구릉이 급격히 낮아져서 다시 능선을 형성하며 이 능선을 따라 약 10m 간격으로 4기의 고분이 남아있다. 따라서 약 10m 간격의 4기 석관이 노출되어 있는데 대형고분 1기만 석관의 내부구조를 볼 수 있다. 

대형 고분은 성 쪽에서 두 번째 고분으로 분토의 직경은 약 10m이며 석관은 장 5.6m, 상폭 1.8m, 천장폭 1.15m, 높이 1.5m의 규모로 현재까지 알려진 도내의 석관묘 중 최대 규모다. 이 고분의 형식은 세 벽을 먼저 쌓고 두께 25cm 내외의 판석 4매를 이어 덮은 뒤 시신을 안치하고 최종적으로 남쪽의 단벽을 막는 횡구식 석관묘이다. 

한편 산성과 고분의 서쪽면 구릉에 있는 밭에서는 삼국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토기편이 수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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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 고성산성에서 찾은 와편

연면한 ‘효제향’ 정선군

‘정선’이란 효행과 선행을 기린다는 뜻이다. <동국여지승람> 풍속 조에 보면 정선을 가리켜 ‘효제향(孝悌鄕)’이라고 불렀다는 기록이 있다. 효제향이란 시를 쓴 이는 고려 말 함승경이란 이다. 본관은 강릉이고, 자(字)는 선여(善餘)이다. 아버지는 함주(咸住), 고려 태조공신(太祖功臣) 함규(咸規)의 12세손이다. 

고려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에 올랐다. 고려조에 보문각(寶文閣) 제학(提學)·검교(檢校), 중추원학사(中樞院學士)등을 역임하였고, 조선조에 집현전대제학(集賢殿大提學)을 역임하였다. 효제란 부모에 대한 효도와 형제에 대한 우애를 통틀어 이르는 말. 공자는 논어에서 효제(孝悌)는 인의 근본이라 하였다. 논어는 유교 경전인 사서(四書)의 하나이며 공자와 그의 제자들의 언행을 적은 것으로, 공자 사상의 중심이 되는 효제(孝悌)와 충서(忠恕) 및 ‘인(仁)’의 도(道)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충신(忠臣)·효자(孝子)·열녀(烈女)에 대해 그들이 사는 마을 입구나 대문 앞에 붉은 문을 세워 표창하였는데 이를 ‘정려’라고 했다. 정선은 대대로 효자 충신들이 많이 나왔다. 대표적 인물이 이규복(李圭復)이다. 1707년 정선군 여량면 송석동에서 출생하였으며 본관은 경주(慶州)이씨 자는 백근(伯謹)이고 호는 송석와(松石窩)이다. 성품이 인자하고 강직하였으며 어릴 때부터 학문에 열중하였다. 

그는 일찍이 가난하여 산에 나무를 하러 다녔는데 다른 사람은 하루에 네 짐씩 나무를 해 왔으나 이규복은 두 짐밖에 하지 못했다. 사람들이 까닭을 물었다. “생나무는 몇 개를 베어 보아도 진(樹脂)이 나오므로 내 살을 베면 아파서 못 견디는데 초목(草木)인들 오죽 아프겠는가? 그래서 죽은 나무만을 주워오느라 늦었다”고 대답하니 사람들이 그의 사람됨에 감격했다.

문방사우조차 없어 가랑잎과 숯검정 물로 글 쓰는 연습을 했다. 나이 20세가 되던 해 도암 이재(陶庵 李縡)의 문인이 되었다. 도암이 이규복의 사람됨을 알고 성심으로 지도했으며 마침내 도학(道學)에 통달했다. 

조선 말엽 효자인 함재환은 정선군 임계면 골지리(骨只里)에서 태어났다. 그는 유년 시절 부모를 섬기는 마음이 남달리 돋보였다. 비록 형이 있었으나 부모를 봉양할 능력이 없어 그가 부모님을 모시게 되었다. 

부친은 매일같이 방탕한 생활로 허송세월만 보내고 있었다. 재환은 어려운 가정형편에서도 부모에게 쌀과 술이 떨어지지 않도록 준비하여 정성껏 봉양하였고 아버지가 진 빚을 갚기 위하여 굶는 일이 일수였다.

그는 매일 날이 밝기 전에 일어나 부모님 방에 가 방이 덥거나 추운 것을 여쭙고 저녁에는 잠자리를 보아 드리고 항상 웃는 얼굴로 부모님을 대하였다. 부모가 외출할 때는 출입할 때와 귀가할 때 인사를 빼놓지 않았다. 칼날같이 추운 엄동설한에도 그는 따뜻한 솜바지, 저고리를 한 번도 입어보지 못하였으나 부모님에게 맛있는 음식을 구해 드리기 위하여 골지리에서 강릉(江陵)까지 150리 길을 걸어서 쌀과 생선을 구해 오기도 했다.

어느 해 겨울 아버지가 술을 마시며 노름판에서 노름을 하고 있을 때 부친의 신변에 불상사나 나지 않을까 염려되어 감시를 하다가 문밖에서 잠이 들었는데 그날 밤 함박눈이 내려 머리에 함박눈이 수북이 쌓인 적도 있었다고 한다.

한말 인물인 우정모는 독립운동과 후세교육에 노력했던 한학자(漢學者)다. 1874년 정선군 북평면 남평리에서 출생, 일제강점기 36년간 은거하면서 수많은 후학을 배출하고 문집 12권을 남겼다. 우국충정과 항일정신이 투철하여 ‘망국지민 불가정관(亡國之民 不可正冠)이라며 평양립(平凉笠)’을 쓰고 두문불출, 후배양성에만 몰두하다 해방 이듬해인 1946년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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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 고성산성 제2산성

에필로그

‘효제향 정선’의 봄 4월 초순은 아름답다. 고성산성 내려오는 길, 온통 산야가 매화와 개나리 진달래꽃으로 물들었다. 정선은 지대가 높은 탓에 화신이 늦다고 한다. 서울은 매화와 벚꽃이 다 지었으나 정성은 시작이다. 

답사반은 귀로에 정선읍내에 있는 오일장 아리랑시장을 방문했다. 동강변에 자리 잡은 정선은 깨끗하고 아름다운 도시다. 지저분하기만 한 관광지의 간판을 찾을 수가 없다. 말끔히 정비한 것이 마음에 든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시장은 한산했으나 장터 인심은 너무 좋았다. 건강을 담보하는 한약재와 먹거리가 풍성하다. 그중에서도 소머리국밥, 곤드레밥이 인기가 있다고 한다. 옥수수로 만든 정선 막걸리 맛도 다른 지역 향토 술맛보다 진하다. 

다시 오고 싶은 아우라지 정선. 읍내 주변의 먼 산을 둘러보니 성터의 윤곽을 찾을 수 있다. 여러 유적을 더 많이 조사할 수 없는 아쉬움을 안고 답사반은 서울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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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 고성산성에 남아 있는 고구려 포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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