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포곡식성 정연한 석성유구 와편 수습

글.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사진. 글마루 

2019년부터 월간 글마루에서 연재하고 있는 ‘남한지역 고구려 유적 답사’ 시리즈를 천지일보 온라인을 통해 선보입니다. 우리의 역사를 알고 더욱 깊이 이해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과거 연재시기와 현재 노출되는 기사의 계절, 시간 상 시점이 다소 다른 점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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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평 용문산

양평군의 고구려 역사

경기도 양평 땅은 고구려시대 양근군(楊根郡) 또는 항양군(恒陽郡)이라 했다. 신라 경덕왕 때 빈양(濱陽)이라고 고쳐 기천군(沂川郡)의 영현으로 삼았다. 빈양은 ‘바로 물가에 있는 산’이란 뜻으로 한강을 지칭한 것이다. 

항양(恒陽)이란 지명은 어떤 뜻을 지닌 것일까. 항괘(恒卦)는 주역(周易) 64괘의 하나이며 진괘(震卦)와 손괘(巽卦)가 거듭된 것으로 우뢰와 바람을 상징한다. 또 함(咸)도 주역 64괘 중 하나로 태(兌)괘와 간(艮)괘가 거듭된 태상간하(兌上艮下)이며 태는 택(澤)을, 간은 산을 뜻하고 있다. 산 위에 택이 있는 형상으로 곧 음양(陰陽)의 교감을 뜻한다고 한다. 이를 감안하면 양평의 고지명은 이런 주역을 바탕으로 음양의 교감이 이루는 길지가 되는 것이다. 

고려 초에 다시 양근현으로 고쳐 1018(현종 9)년 광주목(廣州牧)에 속하게 하였다가 1175(명종 5)년 감무를 두었다. 고려 때 고구려 옛 이름을 회복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태조왕건의 고구려 실지 회복 정신을 살렸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1257(고종 44)년에는 이름을 영화(永化)로 고쳤고, 1269(원종 10)년 위사공신(衛社功臣) 김자정(金自廷)의 고향이라 하여 익화현(益和縣)으로 승격시켜 현령을 두었다.

<고려사지리지>의 기록을 옮겨본다. 

高麗史卷56, 志10, 地理1, 楊廣道, 廣州牧 ‘楊根縣 本高勾麗 楊根郡(一云 恒陽) 新羅景德王 改名 濱陽 爲川郡 領縣高麗初 復古名. 顯宗九年 來屬 明宗 五年 置 監務 高宗四十四年 稱 永化 元宗十年以 衛社功臣金自廷內 鄕陞 爲 益和縣令 恭愍王 五年以 王師 普愚母鄕陞 爲楊根郡有 龍門山有龍津渡 (下略).

양평은 또 하나의 고구려 지명이 있다. 그것이 매우 주목되는 ‘거사참(去斯斬)’이란 이름이다. 광개토대왕이 한강 유역을 점령할 당시 거명된 이름 구천성(仇天城)으로 역사학계는 지목한다. ‘거사첨’과 ‘구천’이란 이름은 전쟁에서 원수를 베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광개토대왕이 한강유역을 정복할 당시 성들을 거명하면 다음과 같다. 

…以六年丙申 王躬 率水軍 討利 殘國軍 ○○首攻取 壹八城 臼模盧城 若模盧城 幹弓利城 ○○城 閣彌城 牟盧城 彌沙城 古舍(조)城 阿旦城 古利城 ○利城 雜彌城 奧利城 勾牟城 古須耶羅城 …分而耶羅城 ○城 …豆奴城 沸○ ○利城 彌鄒城 也利城 大山韓城 掃加城 敦拔城 婁賣城 散那城 ○婁城 細城 牟婁城 于婁城 蘇○城 燕婁城 析支利城 巖門至城 林城 …就鄒城 古牟婁城, 閏奴城, 貫奴城, 三穰城 …○○○羅城 仇天城 …云云(중략) …口口口其國城 殘不服氣敢出(百)戰 王威赫怒 渡阿利水 遣刺迫城 橫○○○○(衝直撞以) 便國城而殘主因逼獻 (上)

男女生口一千人 細布千匹 (歸)王, 自誓從 今以後永爲奴客 太王恩赦 先迷之愆 錄其後順之誠, 於是 取五十八城 村七百 將殘主弟 幷大臣十人 旋師還都 云云.

…이육년병신 왕궁 솔수군 토리 잔국군 ○○수공취 일팔성 구모로성 약모로성 간궁리성 ○○성 각미성 모로성 미사성 고사(조)성 아단성 고리성 ○리성 잡미성 오리성 구모성 고수야라성 …분이야라성 ○성 …두노성 비○ ○리성 미추성 야리성 대산한성 소가성 돈발성 루매성 산나성 ○루성 세성 모루성 우루성 소○성 연루성 석지리성 암문지성 임성 …취추성 고모루성, 윤노성, 관노성, 삼양성 …○○○라성 구천성 …운운(중략) …구구구기국성 잔불복기감출(백)전 왕위혁노 도아리수 견자박성 횡○○○○(충직당이) 편국성이잔주인핍헌 (상)

남녀생구일천인 세포천필 (귀)왕, 자서종 금이후영위노객 태왕은사 선미지건 록기후순지성 어시 취오십팔성 촌칠백 장잔주제 병대신십인 선사환도 운운.

원수 구(仇)를 구천(九天)으로 해석하면 가장 높은 하늘이 된다. 중앙을 균천(鈞天), 동쪽을 창천(蒼天), 서쪽을 호천(昊天), 남쪽을 염천(炎天), 북쪽을 현천(玄天)이라 했다. 동남쪽을 양천(陽天), 서남쪽을 주천(朱天), 동북쪽을 변천(變天), 서북쪽을 유천(幽天)이라고 했다. 또는 대궐 안을 지칭하기도 한다. 이런 뜻에서 함왕성(咸王城)이란 뜻으로 변한 것인가. 

양근현은 <삼국사기> 권10 신라본기(新羅本紀) 원성왕 조에도 기록된다. 789(원성왕 5)년 9월에 ‘以子玉爲楊根縣小守(자옥을 양근현 소수로 삼았다)’는 내용이다. 소수(小守)는 현령과 비슷한 현의 우두머리로 제수(制守)라고도 했다. 

이 기사는 소수에 임명될 수 있는 자는 원칙적으로 문적출신(文籍出身, 국학 출신)이어야 함을 보여주는 흔치 않은 기록이다. 그만큼 이 지역을 중요시했다는 것을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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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왕산성 석축

시인이 사랑했던 양평

명산 용문산(龍門山)이 우뚝 선 양평은 한강변에 위치한 아름다운 고장이다. 청주가 고향인 고려 말 시인 한수(韓脩)는 양평 풍경을 사랑했다. 한수는 본관이 청주(淸州)로 호는 유항(柳巷)이다. 1347(충목왕 3)년 나이 15세로 과거에 급제하였다. 필체가 뛰어나 충정왕이 그를 정방(政房)의 필도지(必道赤)로 임명하였는데, 왕이 왕위를 내어놓고 강화도로 쫓겨날 때 왕을 따라가 사람들의 숭앙을 받았다. 공민왕(恭愍王)이 그를 불러 다시 필도지로 삼았으며 여러 관직을 거쳐 대언(代言)으로서 관리의 선발과 임명을 담당했다.

우왕(禑王)이 즉위하자 밀직제학(密直提學)을 거쳐 동지밀직(同知密直)으로 승진시켰다가 얼마 후 반역을 꾀한 한안(韓安)의 일족이라 하여 지방으로 귀양을 가기도 했다.

 

해는 관음봉(觀音峯)에 비치는데, 

손은 양근관(楊根館)을 떠나네. 

동으로 30리를 행하지 못하여, 

천경(千頃)이 편평하기가 책상과 같네. 

맑은 강이 항상 오른쪽에 있는데, 

멀고 가까운 것이 모두 구경할 만하네. 

다시 10리쯤 가서 말을 쉬고 높은 언덕에 오르니, 

외롭게 서 있는 강 가운데 

산이 나의 호한(浩汗)한 시야를 가로막네. 

이 지방 사람이 앞에 나와 말하기를, 

저것이 본래 충주(忠州)에 있던 산인데, 

내려오다가 여기에서 정지하였기에 

충주산으로 부른다 하네. 

동행들은 진실한 말이 못 된다 하여 

모두 한 번 껄껄 웃었네. 

영은산(靈隱山)은 날라 왔는데

창오산(蒼梧山)이 이 짝이 되도다. 

고요한 것은 산의 상리(常理)인데

천상(天常)을 네 어찌 어지럽혔느뇨. 

이곳이 어찌 그리워서 왔으며 

저곳이 어찌 괴로워서 도망하였느뇨. 

물어도 끝내 말하지 않으니, 

바람을 임하여 홀로 길이 탄식하노라.

 - <동국여지승람> 제8권 양근군 산천조

 

조선 세종 때 문호 서거정(徐居正)도 한강 대탄을 지나면서 용문산이 옹립한 양평을 노래했다. 

맑은 가을 어젯밤에 유쾌하게 다락에 오르니 

작은 배가 흐름을 따라서 자유롭네 

흰 돌은 앞 여울에 이빨처럼 감춰졌고

푸른 산은 양쪽 언덕에 여러 머리처럼 솟았네. 

키 앞에 조금 앉았노라니 말보다 편하고, 

뜸 밑에 외롭게 졸면 

한가하기 근심하듯 하네. 

얼굴을 우러르면 

용문산의 높이가 만 길인데, 

또 남은 취흥(醉興)을 타서 

양주(楊州)로 지나네.

 - <동국여지승람> 제8권 양근군 산천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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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왕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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