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원주시 해미산성
사적 지정 시급… 주민·시의회도 적극 나서

2019년부터 월간 글마루에서 연재하고 있는 ‘남한지역 고구려 유적 답사’ 시리즈를 천지일보 온라인을 통해 선보입니다. 우리의 역사를 알고 더욱 깊이 이해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과거 연재시기와 현재 노출되는 기사의 계절, 시간 상 시점이 다소 다른 점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글.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사진. 글마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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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8경 중 하나인 치악산 비로봉 여름 전경(제공: 원주시청)

원주는 고구려 ‘평양경’인가

<동국여지승람> 권46권 원주목(原州牧) 연혁조를 보면 ‘이곳은 고구려 시기 평원군(平原郡)이라고 했다’고 기록된다. 재미있는 것은 고구려의 수도가 있는 평양성 일대도 평원군이라고 했다는 점이다. 일설에는 원주도 평양경(平凉京)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평양경이라고 기록한 글은 <조선팔도노래>라는 시문이다. 이 노래는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각 지역의 역사문화를 예찬한 글이다.

‘동쪽은 평창(平昌)이요 남쪽은 충주(忠州) 제천(堤川) / 서쪽에는 여주(驪州) 지평(砥平) 북쪽에는 횡성(橫城)이라 / 고구려 평원군(平原郡) 신라 북원경(北原京) 고려 원주네. 다른 이름 일신(一新) 정원(靖原) 익흥(益興) 성안(成安) 평량경(平涼京)이고 / 속현(屬縣)은 주천(酒泉), 성씨(姓氏)는 원이안신김(元李安申金) 석변최조(石邊崔趙)다. 풍속은 축적(蓄積)하는 일을 숭상한다고 지지(地志)에 있다. (하략)’

평양성도 중국 고(古) 기록에는 ‘평양경(平涼京)’이라고 기록되고 있다. 고구려 사람들은 왜 왕도 평양과 같은 이름으로 원주를 호칭한 것일까. <동국여지승람>에서 원주 평원군의 형승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원주가 천년 나라의 중심으로 회자되었음이 나타나고 있다. 

‘동쪽에는 치악(雉岳)이 서리고 서쪽에는 섬강이 달린다. 천년 고국이다. 교목(喬木, 줄기가 곧고 굵으며 높이 자라는 나무)이 남아있고 십리 긴 강은 고을의 성을 둘렀다.’ 

서거정도 <객관중수기>에 ‘원주는 본래 고구려의 평원군이다. 신라에서 북원소경을 두었으며 고려 초에 주를 두었다가 뒤에 낮추어 지주로 하였다’고 기록했다. 

고려 말엽 문명이 높았던 한수(韓脩, 1333~1384)의 시를 보면 치악의 정기를 받은 고도 원주의 풍경이 잘 그려진다.

치악의 구름 낀 봉오리가 비를 오게 하니

처마에서 떨어지는 소리 쓸쓸한데

저녁바람이 인다

이미 맑은 경치가 신선이 사는 곳으로 

옮겨가는 것을 즐겨하거니와

다시 아름다운 사람이 부르는 

위성곡을 듣는다

노는 사람이 머뭇거림은

옛일을 생각함이 많기 때문인가

영웅은 이제 적막하지만 

높은 이름은 남아있구나

말굽이 이르렀던 곳

(하략)

 

원주가 고도(古都)로 자리 잡은 것은 치악산을 진산(鎭山)으로 삼았기 때문인가. 치악산을 설명한 글을 보면 다음과 같다.

‘북으로는 원주시 소초면과 횡성군 강림면, 남으로는 원주시 판부면, 신림면과 영월군 수주면의 경계에 있는 산이다. 높이는 1288m로 비교적 높지는 않으나 백두대간의 하나이며, 차령산맥의 줄기로 영서지방의 대표적 명산이다. 주봉우리인 비로봉(毘盧峰)을 중심으로 북쪽으로 매화산, 삼봉과 남쪽으로 향로봉, 남대봉 등 여러 봉우리와 연결되어 있다. 능선이 남북으로 길게 뻗어있으며 동쪽은 경사가 완만하고 서쪽은 경사가 매우 급하여 험하기도 하고 아기자기하다.’ 

문무왕 18(678)년에 북원소경이었던 원주는 경덕왕 때 북원경이라고 고쳤다. 9세기 말 신라가 쇠퇴하면서 각처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양길은 원주지역을 근거로 세력을 확장하여 오늘날의 강원도 지역 대부분을 차지하는 큰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고구려 펑원군이라고 불린 원주 고성 유적 가운데 가장 오래된 곳은 어디일까. 한국역사문화연구회 답사반과 글마루 취재반은 2021년 6월 초순 초하의 무더운 날씨 해미산성(海美山城)을 답사했다. 

바다가 없는 원주, 치악산 고성 이름을 왜 ‘해미’라고 했을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원주에서 바다까지 거리는 너무 멀다. 어떤 비밀이 숨어있으며 또 해미산성은 어떤 모습으로 축성된 것일까. 성지에 와편을 제작한 주인공들은 어느 국적일까. 가장 설레는 마음으로 원주 답사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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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교리에서 바라 본 해미산성

‘해미’라는 지명의 비밀

중국 고문학자들은 ‘海(해)자’를 글자 뜻으로만 해석하지 않았다. 즉 두 변이 합쳐진 형성문자로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육서(六書)로 따지면 어려운 점이 ‘형성문자’라는 것이다. 형성문자는 뜻 부분과 음 부분이 합해져 있는 것인데, 음 부분의 음이 그 한자의 음과 다른 뜻으로 해석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每’가 들어 있는 한자들을 보면 회(悔), 해(海), 모(侮), 매(梅) 등이다. 이것들은 모두 형성문자로 봐야 하며, 이때는 음이 ‘每’의 음과 달라야 한다는 것이다. ‘海’는 ‘바다’와 ‘每’의 뜻이 직접 연결되지 않으므로 형성문자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주장이다. ‘海’의 이체자(異體字)는 ‘ (해)’ ‘ (모)’이며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는 해를 ‘천지(天池)’로 해석하고 있다. 

‘천지야. 이납백천자. 종수매(매성)(天池也. 以納百川者. 从水每( 聲))’ 

또 ‘해(海)’는 ‘회(晦)’이며 ‘주승예탁,기수흑여회야(主承穢濁,其水黑如晦也)’라고 해석하는 것이다. 즉 해는 예탁을 계승한 것이며 그 물을 검은 회라고 한다는 말이다. ‘검다’라는 것은 크다는 뜻으로 검을 오(烏), 즉 고구려를 지칭하는 말로 해석되기도 한다. 고구려 지명이나 인명에는 ‘烏(오)’자를 쓰는 경우가 많다. 

또 <우공서>에는 구이, 팔적, 칠융, 육만 등 이민족을 사해(四海)로 부르고 있음이 나타나고 있다(書·禹貢. 四海會同…爾雅·釋地(九夷,八狄,七戎,六蠻,謂之四海). 이를 감안하면 해미산성은 중국인들이 부르는 구이(九夷)에 해당되어 ‘고구려’란 뜻이 된다.

해미의 ‘미’는 퇴미(堆山) 즉 쌓은 성을 뜻하는 것이다. 우리말의 ‘미’를 한자를 차용해 썼기 때문이다. 어문학적으로 접근하면 ‘퇴미’는 ‘갈라져 나온 산’이라는 의미를 갖는 것이다. 즉 ‘퇴뫼산’이라는 이름은 ‘퇴뫼’라는 말에 ‘산’이 덧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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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 해미산성(좌)과 고구려 오녀산성 성벽 비교

해미산성은 금대성

<신증 동국여지승람> 제46권 원주목 고적조에 해미산성으로 지목되는 기록이 보인다. 바로 금대성(金臺城)이다. 이 성이 있는 마을 이름이 지금도 금대리로 불리고 있다. 

‘금대성. 주의 동쪽 30리 치악산 중턱에 있다. 돌로 쌓았으며 들레가 6천 60척이다. 안에 우물 3개소가 있었으나 지금은 폐지되었다. 주의 사람 송필이 이 성에 의거하여 배반하였기 때문에 주를 낮추어 일신현으로 하였다(金臺城. 在州 東三十里雉嶽山腰. 石築 周 六千六十尺內有三井今廢. 州民松弼據此城叛降州爲一新).’

이 기록을 보면 강원도에서 금대성의 길이가 가장 길다. 그렇다면 성의 중요성이 입증되고 있는 것이다. <조선팔도> 노래 가사에 금대성이 나온다. 

‘(전략) 단구역(丹丘驛) 신림(神林) 안창(安昌) 유원역(由原驛) 신흥역(神興驛)과 / 아야니원(阿也尼院) 송현원(松現院) 둔탄원(屯呑院) 요제원(要濟院) 있고 / 흥원창(興原倉) 모인 세곡(稅穀)을 조운(漕運)으로 실어간다 / 치악산 각림사(覺林寺)요 봉명산 법천사(法泉寺)라 / 동화사(桐華寺) 흥법사(興法寺) 거돈사(居頓寺) 문수사(文殊寺) 있고 / 주천현(酒泉縣) 남쪽 강가에 주천석(酒泉石)이 놓여있네 / 양길(梁吉)의 영원성(鴒原城)과 천왕사(天王寺) 금대성(金臺城) 있고 / 소탄소(所呑所) 금마곡소(金亇谷所) 사림소(射林所)와 도곡(刀谷) 도내(刀乃) 부곡운운’

1998년 충북대학교 중원문화연구소에서 발간한 <원주 영원산성, 해미산성 지표조사 보고서>의 기록을 인용해 본다.

‘해미산성의 위치는 원주시 관설동과 판부면의 경계를 이루는 산(699.2m)에서 남쪽으로 뻗은 산(해발 629.7m와 627.5m의 두 봉우리에서 서남쪽으로 뻗은 5개의 가지능선을 포용) 위에 있으며 산성의 남쪽 산 아랫마을의 지명이 금대리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금대리의 서쪽에 있는 가리파재에서 발원한 계곡물은 서쪽으로 흐르는데 이 물이 금대리 치악골 골짜기에서 흘러 내려온 물과 합류하는 지점이 함박골이며, 함박골에서 북쪽으로 치악골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금대초등학교의 일론 분교 자리를 만나는 곳이 일론마을이다. 이 일론마을에서 북서쪽으로 작은 계곡을 타고 오르다 다시 동쪽으로 가면 성터가 나온다. 해미산성의 위치는 원주시 간설동과 판부면 금대리의 경계를 이루는 산(699m)의 봉우리에 서남쪽으로 뻗은 5개의 가지 능선을 포용 축조했다. 성이 위치한 곳은 산의 남서쪽 봉우리다. 성벽의 구조가 매우 복잡하다. 성의 가장 높은 곳에 북문터가 있으며 이곳에서 출발한 성벽은 서쪽으로는 능선의 외연을 따라 내려가 서북쪽 회곡부에 있는 동문터에 이른다.’

충북대 조사단은 성벽의 전체길이를 약 1820m로 실측했다. 이는 <여지승람>의 기록보다는 작은 것으로 착오가 있다. 이 보고서는 해미산성을 신라 축성으로 내다보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다. 우선 성벽의 남아있는 석축을 보자. 성벽은 중국에 있는 여러 고구려 산성들의 축소판이다. (비교 사진 참조)

정연하게 다듬은 벽돌 같은 돌을 들여쌓기로 고준하게 쌓았다. 이를 굽도리 축성법이라고 하는데 사진을 비교해보면 너무나 닮아있다. 한국역사문화연구회 팀이 지금까지 조사한 남한지역 여러 고구려성 가운데 가장 확연한 모습을 보여준다.

고구려성의 특징인 치성(雉城)은 남쪽 성벽에서 찾아지는데 성벽에 ‘ㄷ’자로 돌출시키거나 완만하게 굴절시키지 않고 너비가 넓은 곡성(曲城) 형태를 보이고 있다. 흡사 평창 노산성의 치성을 방불하는 것이다. 

산성의 축성 형태를 살피며 올라가다 비교적 넓은 건물지에서 와편을 조사했다. 지난 가을 떨어진 낙엽이 쌓여있어 와편을 조사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그러나 낙엽 속에 오랫동안 주인을 기다렸듯이 적색 와편이 보인다. 그리고 신라계의 선조문 경질 와편도 찾아졌다. 

완연한 승석문계 적색와편도 보인다. 사선으로 선조문을 만들고 다시 오른쪽에서 사선을 그었다. 적색 와편은 두껍고 모래가 많이 섞인 경질이었으며 거칠다. 이곳 건물지를 발굴하면 오랜 시간 잠을 자던 고구려 역사의 혼이 깨어날 것이다. 다수의 회색 신라계 선조문 평기와편과 고려시대 검은 와편까지 조사된다. 이 성이 오랜 세월 중요한 성으로 이용되어 왔음을 증거 하는 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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