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일보 안성=노희주 기자]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에 있는 고려시대 진전사찰인 안성 봉업사지가 국가지정문화유산 사적으로 승격 지정된다.15일 안성시에 따르면 시는 지난 2월 문화재청과 함께 문화재위원회 현지조사를 진행했고 지난 13일 문화재위원회 사적 지정 검토심의를 통과했다.안성 봉업사지는 고려시대 태조 왕건의 어진을 모셨다는 기록이 남아있는 진전사찰(왕의 초상을 봉안한 사찰)이다. 그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지난 2003년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됐고 2009년과 2019년 두 차례에 걸쳐 사적 지정 신청했으나 추가 발굴조사 필요
글·사진 이의준 왕릉답사가고양 서오릉은 숙종과 그 부인, 며느리들이 함께 묻혀있다. 숙종과 인현왕후, 인원왕후(명릉), 인경왕후(익릉), 희빈 장씨(대빈묘)와 두 며느리 영조의 정비 정성왕후(홍릉), 영조의 후궁이자 사도세자의 사친 정빈 이씨(수경원)가 능역에 자리하고 있다. 이처럼 동일구역 왕릉에 4명의 부인과 더불어 며느리까지 모여 있는 경우는 유일하다. 숙종은 4명의 왕비, 46년 재위, 초강력 왕권, 왕비와 집권세력 교체 등 다양한 모습을 가진 왕이다. 왕비를 폐하고 죽이고, 송시열과 같은 거물들을 일거에 처형하는 등 조변석
동양철학에서 갑(甲) ‘시작’과 ‘동방’ 상징12지 동물 가운데 유일한 상상의 동물 ‘용’용의 상징… 동양과 서양에서 확연한 차이[천지일보=백은영 기자] 갑진년(甲辰年) ‘푸른 용의 해’가 밝았다. 용은 십이지 동물 가운데 유일한 상상의 동물로 유일하게 하늘을 날 수 있으며 변화무쌍한 초자연적인 힘을 지닌 존재로 그려진다. 새로운 한해를 맞아 2024년 갑진년 ‘청룡의 해’가 갖는 의미와 민속문화 속 용이 갖는 의미를 살펴보자.◆ 민속문화 속 용“안 본 용은 그려도 본 뱀은 못 그린다”는 속담이 있듯 용은 상상의 동물이지만 실존의
[천지일보 시흥=김정자 기자] 경기 시흥시가 2024년도 본예산을 1조 6241억원(일반회계 1조 4287억 원, 특별회계 1954억원) 규모로 편성해 21일 시흥시의회에 제출했다.이는 전년도 본예산 1조 5382억원보다 약 858억원(5.6%) 증액되고, 일반회계는 전년 대비 1207억원(9.2%)이 증액된 규모다.‘민생에 힘이 되고, 미래의 희망이 되는 K-시흥시’를 목표로 시흥시는 ‘시민의 더 많은 행복’과 ‘모두의 더 많은 기회’ 그리고 ‘도시의 더 좋은 미래’를 만들어가고자 2024년에 확장재정을 운용한다고 밝혔다.시 예산
글ㆍ사진 이의준 왕릉답사가육군사관학교 근처에 태강릉(태릉과 강릉)이 있다. 인종의 효릉과 모후 장경왕후의 희릉이 나란히 있듯이 이곳에도 문정왕후(태릉)와 아들 명종 부부(강릉)가 가까이 있다. 명종은 어머니와 외척에 치여 제대로 빛을 보지 못했다. 인종에 이어 갑작스레 왕이 되니 12살이었다. 문정왕후의 8년 섭정과 외삼촌 윤원형, 그의 첩 정난정, 승려 보우가 정세를 이끌었다. 재위 22년, 을사사화로 많은 사람이 죽고 ‘임꺽정의 난’이 일어났다. 왜적의 침입이 끊이질 않았고 유교국가에서 대놓고 불교를 앞세우니 조정은 늘 시끄러웠
[천지일보=남승우 기자] 20일 서울 종로구 경복궁에서 관람객들이 경복궁 계조당 일원을 둘러보고 있다.조선의 왕권 계승을 상징하는 공간이자 왕세자 집무실이었던 경복궁 ‘계조당(繼照堂)’은 6년간의 복원을 마치고 이날 일반에 공개됐다. 계조당이 1910년 일제 강점 뒤 조선총독부에 의해 철거되고 제 모습을 되찾은 것은 110여 년 만이다.
[천지일보 수원=류지민 기자] 정조의 꿈과 의지인 ‘만천명월’이 230여년이 지난 현재 빛이 돼 수원화성의 가을밤을 비추는 미디어아트로 재탄생한다.수원문화재단이 ‘수원화성 미디어아트’의 태마로 ‘만천명월 : 정조의 꿈, 빛이 되다’로 해 정조의 꿈과 의지를 시즌제로 선보이고 있다.지난 2021년 처음 시작한 수원화성 미디어아트는 왕권 강화를 개혁 정치를 위해 노력했던 정조대왕의 꿈을 첨단 미디어아트로 구현했다. 정조의 4가지 사상 문·무·예·법 사상을 미디어파사드 작품으로 승화시켜 정조의 꿈을 품은 유토피아적인 시공간으로 재탄생시켰
글·사진 이의준 왕릉답사가조선 왕릉에는 두 개의 정릉, 신덕왕후(貞陵)와 중종(靖陵)의 능이 있다. 중종의 정릉은 강남구 선정릉에 선릉(부모인 성종과 정현왕후)과 함께 하고 있다. 중종이 여기에 묻히기까지는 사연이 많다. 1544(중종 29)년 중종이 세상을 뜨고 이듬해 장경왕후가 묻혀있던 고양의 희릉 서쪽에 능을 조성하며 묘호를 정릉으로 바꿔 정했다. 그런데 1562(명종 17)년 세 번째 왕후 문정왕후가 중종의 무덤을 정릉에서 서초동 현 위치로 천장하고 본래 능은 다시 희릉으로 되돌렸다. 문정왕후는 사후 중종과 함께 묻히려 했으
전쟁은 분리를 낳는다. 부모와 자식 간, 연인 간에 안식처에서 피난처로, 삶에서 죽음으로 영원한 이별을 맞게 한다. 한국은 70여년 전 동족 간 전쟁이 벌어져 많은 이들이 고통받았다. 3년여에 걸친 비극으로 국군 62만여명, 유엔군 15만여명 등 총 77만여명이 전사, 부상, 실종됐다. 이재민은 1000만여명에 달했다. 가족을 잃거나 헤어진 사람들은 지금도 전쟁의 상흔으로 고통받고 있다.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한반도는 종전이 아니라 현재 정전 중이다. 본지는 정전 70주년을 맞아 6.25 전쟁 발발부터 정전까지 주요 과정을
글ㆍ사진 이의준 왕릉답사가연산군묘는 비각이나 공덕비조차 없는 백성의 묘와 다르지 않다. 연산군은 외롭고 의지할 곳 없는 황량한 벌판에 서야 했다. 왕비인 어머니가 사사된 왕실 최대의 비극을 안고 자랐다. 왕세자 신분이지만 따뜻한 칭찬이나 위로를 받지 못했다. 이러한 ‘결손’이 훗날 큰 화근이 될 줄 누가 알았던 가. 연산군은 1506년 폐위되자 강화로 유배돼 3개월 만에 죽었다. 일반 묘에 묻혀 제대로 돌보는 사람조차 없었으니 10년이 지나 부인 신씨가 청해 외할아버지 임영대군(세종의 4남)의 땅으로 옮겨졌다. 1537년 군부인 신
글ㆍ사진 이의준 왕릉답사가‘연산군묘’는 신하들의 반란으로 쫓겨난 10대 연산군과 거창군부인 신씨의 묘소이다. 연산군은 조선 최 초로 재위 중인 왕과 왕비의 맏아들로 태어나 원자와 세자를 거쳤으니 단연 적통 중의 적통으로 임금의 자리에 올랐다. 또한 창덕궁이 건립된 이후 ‘인정전’에서 조선왕 최초로 즉위하니 ‘어진 정치’를 실현할 것으로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대간과의 불화, 무력으로 대신을 억누르며 어머니 폐비에 대한 복수심으 로 참극을 벌이며 파멸에 이르고 말았다. 조선 최초로 폐위된 후 죽음을 맞아 일반 묘에 묻혔으니 단종 에
이병진 한국외대 중국연구소 연구위원한비자(韓非子)는 BC280~233년대 인물이다. 법가사상이라는 근원을 체계화시켰다. 유가의 덕치주의나 예교주의보다 법치주의를 내세운다.전국시대 합종연횡이 횡행할 때 한비자의 법가사상은 가장 환영받는 군주들의 사상과 덕목이었다. 왜 한비자의 법가사상이 절대적 환영을 받았으며 진나라의 천하통일에 결정적 역할을 했는지 깊게 생각해 볼 수 있는 가치가 현재의 중국과 맞물려 상존한다.법가는 중앙집권적 왕권의 강화와 강병 정책에 방점이 있다. 서양에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 있다면 동양에는 한비자의 고전 한비자
이호규 대중문화평론가(동아예술전문학교 예술학부 교수)이순재가 참여한 연극 ‘리어왕’은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최고의 수작으로 꼽히는 리어왕을 원작으로 한 작품이다. 이번 공연에서는 셰익스피어 원전의 의도를 200분간 그대로 구현해 작품의 배경인 기원전 8세기를 무대 위에 올렸다.작품에서 비극은 가치 있거나 진지하고 완결된 행동의 모방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의 목표를 공포와 연민이라고 정의했다. 공포와 연민은 전적으로 비극을 관람하는 관객의 반응이다.연극 리어왕을 보면, 권력이란 무엇일까를 생각하게 한다. 더 높은 권력을 끊임
올해 92세를 맞은 이만희 하늘문화세계평화광복(HWPL) 대표. 몸이 부서져라 뛰는 고령의 평화운동가는 지난 1월에도 필리핀 민다나오를 찾아 평화 정착에 힘을 보탰다. 지난 2012년 제1차로 시작한 평화순방은 올해로 12년째를 맞았고 제32차를 기록했다. 90대의 청춘은 평화순방 때마다 청년보다 더 열정 넘치는 행보로 수많은 기적들을 만들어냈다. 정작 국내에서는 편견에 갇혀 저평가 됐지만, 그의 획기적인 기획력과 실행력은 이미 세계가 인정하고 있다. 본지는 6.25참전용사 출신으로 ‘전쟁종식‧평화, 하면 된다’는 인식을 인류에게
글ㆍ사진 이의준 왕릉답사가서울 강남의 한복판에 있는 선정릉(선릉+정릉)은 42기 조선왕릉 중 가장 많은 사람이 찾는 곳이다. 선릉은 제9대 왕인 성종(成宗)과 정현왕후, 정릉은 아들 중종이 잠든 곳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임진왜란 때 왜군이 파헤쳐 불을 질렀기에 시신이 없어지고 말았다. 성종은 세종에 버금가는 왕으로 꼽힌다. 세조(조선 제7대 왕)는 성종을 “도량이 태조에 비할 만하다”라고 했고, 정조(조선 제22대 왕)는 “조선왕가의 성대한 시기를 만든 성군”이라 극찬했다. 성종은 3명의 왕비에 후궁이 14명이었다. 31명의 자식
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박세채(朴世采)의 황극탕평론(皇極蕩平論)은 왕권강화(王權强化)를 통한 변통(變通)을 추진하는 점에 핵심 포인트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하나의 예를 들자면 1694(숙종 20)년에 박세채가 숙종(肅宗)에게 별단(別單)의 계차(啓箚) 4건을 첨부한 차자(箚子)를 올리면서 “전하께서 오늘날 하셔야 할 계책은 바로 마땅히 크게 경장하시게 된 기회로 인한 것”임을 거듭 환기시킨 일을 통하여 남계(南溪)의 의중(意中)을 엿볼 수 있다.박세채는 황극탕평론을 통하여 왕이 인재(人才)를 등용하는데 있어서 당파(黨派)를 초
글, 사진 이정은 대한민국역사문화원 원장/ 3.1운동기념사업회 회장고종은 슬픈 왕이다. 1907년 7월 19일 일본은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고종을 강제로 물러나게 했다. 보통은 사후에 후계자가 대를 잇는데, 살아있을 때 권좌에서 강제로 끌려 내려오는 굴욕이었다. 아들 순종이 대한제국의 황제위를 물려받았으나, 이미 다 망하고 실권도 없는 권좌였다. 그마저도 3년 후 병합으로 왕조의 명맥은 영원히 끊어지고 말았다. 500년 대대로 지켜온 조선왕조가 막을 내리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다. 세종대왕과 거북선 등 찬란한 역사와 문화를 자랑
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박세채(朴世采)의 생애(生涯)에 있어서 탕평론(蕩平論)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되는데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본다.박세채는 당쟁(黨爭)이 심화(深化)되던 시기에 활동했으며, 특히 당쟁으로 인한 갈등이 생기지 않도록 중재하는 역할을 했는데 그러한 배경에서 남계(南溪)가 주장한 것이 바로 탕평론이라 할 수 있다.이와 관련해 탕평론은 한마디로 당쟁으로 인한 폐단(弊端)이 절정에 이르렀던 당시의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해결책으로 제시된 것인데, 당시에 이러한 주장을 한 인물은 박세채가 최초(最初)라 할 수 있다.여기
천지일보가 독자참여코너로 가로세로 낱말 퀴즈를 연재합니다. 낱말 퀴즈는 가로세로 낱말퍼즐 저자로 잘 알려진 김수웅 선생이 직접 출제한 퀴즈가 격주로 게재됩니다. 퀴즈에 응모하는 독자 중 5분을 추첨해 스타벅스 커피 쿠폰을 증정합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1. 여러 제자 가운데 배움이 가장 뛰어난 제자3. 아내와 자식. ~을 먹여 살릴 걱정에 한숨만 내쉬는 국민이 없어야 한다5. “어물전 망신은 꼴뚜기가 시키고, 과일전 망신은 ~가 시킨다”는 속담이 있다7. 아들이나 딸의 딸. 박 할아버지는 하나밖에 없는 ~의 재롱이
글ㆍ사진 이의준 왕릉답사가 강원도 영월의 장릉은 조선 제6대 단종 대왕의 무덤이다. 서울 경복궁에서 500리 떨어진 영월에 어찌 왕의 무덤이 있는가. 왕릉은 궁궐에서 반나절 행차의 거리에 조성한다. 그러니 장릉은 애초 왕릉 자리가 아니었다. 단종이 왕위를 빼앗기고 영월 유배에서 죽음에 이르렀지만, 시신조차 거두지 않았다. 영월의 호장 엄홍도가 몰래 아들들과 단종의 시신을 거둬 땅에 묻었다. 그리고 오랜 세월 내팽개쳐졌다. 241년이 지난 1698년 숙종 24년에 이르러 ‘장릉’이라는 능호를 정하자 비로소 왕릉이 됐다. 장릉은 조선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