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대 왕 명종·인순왕후 능
세자 안 거치고 12살에 왕 올라
외척의 잇단 전횡에도 ‘속수무책’
외아들 순회세자 잃고 의욕 상실
“죽으면 시호 ‘명종’으로 해 달라”

글ㆍ사진 이의준 왕릉답사가

육군사관학교 근처에 태강릉(태릉과 강릉)이 있다. 인종의 효릉과 모후 장경왕후의 희릉이 나란히 있듯이 이곳에도 문정왕후(태릉)와 아들 명종 부부(강릉)가 가까이 있다. 명종은 어머니와 외척에 치여 제대로 빛을 보지 못했다. 인종에 이어 갑작스레 왕이 되니 12살이었다. 문정왕후의 8년 섭정과 외삼촌 윤원형, 그의 첩 정난정, 승려 보우가 정세를 이끌었다. 재위 22년, 을사사화로 많은 사람이 죽고 ‘임꺽정의 난’이 일어났다. 왜적의 침입이 끊이질 않았고 유교국가에서 대놓고 불교를 앞세우니 조정은 늘 시끄러웠다. 외척의 전횡에 백성의 분노가 치솟으니 명종조차 어찌하지 못했다. 연산군 시대는 죽음의 비명소리가, 중종시대는 잿빛 혼란이 거듭됐고 인종시대는 8개월에 불과했다. 그래서 명종은 백성에게 희망과 기쁨을 주는 왕이 되고자 했으나 현실은 달랐다. 명종은 자신이 죽으면 시호를 명종(明宗) 즉 ‘빛나는 왕’으로 해 달라 했으니 아이러니다. 죽어서도 어머니 곁을 맴도는 명종의 강릉을 찾아가본다.    

강릉의 정자각은 두 차례 수난을 겪었는데 1571년 화재로 소실돼 다시 세워졌으나 1591년 임진왜란 때 왜군에 의해 다시 소실돼 재건됐다. 강릉은 병풍석과 난간석을 둘렀고, 어정(우물)도 있어 왕릉의 구성물을 모두 갖췄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9.25.
강릉의 정자각은 두 차례 수난을 겪었는데 1571년 화재로 소실돼 다시 세워졌으나 1591년 임진왜란 때 왜군에 의해 다시 소실돼 재건됐다. 강릉은 병풍석과 난간석을 둘렀고, 어정(우물)도 있어 왕릉의 구성물을 모두 갖췄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9.25.

◆왕세자도 아닌데 갑자기 왕이 돼

명종(이환)은 1534(중종 29)년 중종(47세)과 문정왕후(34세)사이에서 태어났다. 중종이 반정에 의해 느닷없이 왕이 되었듯 명종 또한 그러했다. 생모인 문정왕후가 왕비였으나 중종이 건재하고 왕세자(인종), 그리고 다른 왕자들이 즐비해 명종은 왕의 순위에 있지 않았다.  당시 왕세자 인종은 20세였다. 명종은 그저 여러 왕자 중의 하나였다. 명종은 5살 1539년에 경원 대군에 책봉됐다. 그런데 불과 6년 후 인종이 왕위에 오르고 이듬해 1545년 7월 1일 승하했다. 인종은 자식이 없었다. 자연히 왕비의 아들 명종이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명종은 체계적인 세자교육을 받지 못했고 12살의 어린 나이였다. 관례대로 대비가 된 문정왕후가 정국을 이끌게 됐다. 왕후는 아들이 미덥지 않았다. 1545년 6월 29일 인종이 숨을 거두기전 명종에게 전위키로 하자 대신들은 이를 대비(문정왕후)에게 전했다. 이때 대비는 ‘어리석은 아이(명종)를 데려가서 어떻게 나라를 다스리겠가. 천하에 이처럼 망극한 일이 다시 있겠는가’라고 했다. 그리고 왕후는 본격적인 수렴청정을 시작했다. 20세가 될 때까지 8년간 어머니와 외삼촌이 모든 것을 쥐락펴락했다.

‘강릉은 제13대 명종과 인순왕후 심씨의 쌍릉이다. 세종의 소헌왕후 심씨 이후 127년 만에 청송 심씨 가문에서 나온 왕후였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9.25.
‘강릉은 제13대 명종과 인순왕후 심씨의 쌍릉이다. 세종의 소헌왕후 심씨 이후 127년 만에 청송 심씨 가문에서 나온 왕후였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9.25.

◆어린 왕 세우고 5년 간 피바람

즉위하자마자 윤원형과 소윤이 정권을 장악했다. 왕은 허수아비였다. 백성은 흉년으로 궁핍하고 왜적은 수시로 조선의 해안을 쳐들어왔다. 사회도 불안해 ‘임꺽정의 난’이 일어나기도 했다. 윤원형은 7월 6일 조카 명종이 왕위에 오르자 곧바로 친형 윤원로를 귀양 보내고 1545년 8월에는 을사사화를 일으켜 많은 정적을 제거했다. 1547년 9월 양재역벽서사건(정미사화)으로 많은 사람이 죽어갔다. 명종의 이복형제와 문정왕후의 동생도 처형됐다. 1548년 해가 바뀌어 상황은 여전했다. 사초(역시기록의 초안)를 둘러싼 고변으로 안명세와 그를 옹호한 윤결도 처형됐다. 1549년 4월 이홍윤 역모사건이 일어나 여럿이 능지처사되고 옥사하기도 했다. 이듬해에는 윤원형이 나서서 유관의 편을 든 구수담을 사사토록 했다. 1553년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이 끝나고 명종이 친정을 시작했다. 하지만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명종은 우선 문정왕후와 윤원형을 견제하고 왕권을 확립하고자 부인 인순왕후 심씨의 외삼촌 이양을 이조판서, 그 아들 이정빈을 이조전랑으로 기용했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들의 파벌형성과 횡령은 물론 사림파를 외직으로 추방시키고 사화를 꾀하는 등 오히려 역효과를 내고 말았다. 이양은 행태가 못 미처 그의 외 조카인 심의겸에게 탄핵당하고 1563년 숙청됐다. 오히려 윤원형·심통원과 함께 삼흉(三凶)의 오명을 얻게 됐다. 1563년 1월 윤원형이 영의정이 됐다. 그의 권세는 갈수록 위세를 떨쳤다.

겨울에 촬영된 강릉 정자각의 모습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천지일보 2023.09.25.
겨울에 촬영된 강릉 정자각의 모습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천지일보 2023.09.25.

◆경복궁 복원하고 왜구 침입 물리치기도

1553년 9월 14일 경복궁에 큰불이 났다. 실록은 “경복궁의 대내에 불이 났다. 태조가 창건한 강녕전·사정전·흠경각이 모두 불타 버렸다. 오랜 값지고 귀한 물건과 서적, 궁중의상 등도 재가 됐다. 서책 몇 궤짝만을 경회루 연못의 작은 배에 내다 실었다”라고 했다. 윤원형이 대규모 인력을 동원해 1년 만에 공사를 완성했다. 또한 이 시기에는 왜구의 침입이 잦았는데 1555(명종 10)년 세견선(대마도에 조선을 오가도록 허락한 무역선)이 감소되자 왜인들이 불만을 품고 배 70여척으로 전라도 연안에 들어와 방화와 약탈을 자행했다. 조정은 군대를 파견해 왜구를 토벌했고 쓰시마도주는 가담한 왜구들의 목을 베어 보내 사죄했다. 명종은 비변사(국방협의기구)를 상설로 했다. 1510(중종 10)년 삼포왜란 때 임시로 설치했는데 이를 강화하고자 한 것이다. 민심이 불안정해 1559(명종 14)년 황해도지역에서 임꺽정(일명 임거정 또는 임거질정)이 난을 일으켰다. 중국 사신들에 대한 경비를 백성이 부담하고, 해안 갈대밭을 권세가들이 차지해 불만을 샀다. 신분차별과 권세가들의 횡포에 불만이 컸던 임꺽정은 사람들을 무장시켜 반란을 일으켰다. 1560년 관군 500여명을 물리치며 세를 과시하기도 했으나 결국 부하의 배신으로 체포됐다. 이에 1562년 1월 8일 명종은 “국가에 반역한 임꺽정 무리가 모두 잡혀 내 마음이 몹시 기쁘다”고 말하며 공로자들을 포상했다. 하지만 3여년에 걸친 난은 당시의 뒤숭숭한 사회상을 보여준 것이었다. 황해도 들판에 가뭄과 전염병으로 시체가 뒹구는 데 왕후는 불교에 세금을 쏟았고 동생 윤원형과 첩 정난정은 가렴주구(苛斂誅求, 가혹한 세금과 재물의 착취)했던 것이다. 명종은 외척과 권력자의 전횡을 바로 잡으려 했다. 그러나 역부족이었다. 하지만 책임은 당시의 왕 명종에게 있었다.

‘강릉 비각’ 안에는 명종과 인순왕후의 표석이 세워져 있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9.25.
‘강릉 비각’ 안에는 명종과 인순왕후의 표석이 세워져 있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9.25.

◆아들 순회세자, 어머니 문정왕후와 외척의 죽음

명종은 6명의 후궁을 뒀으나 자식은 한명도 없었다. 그나마 인순왕후가 1551년 원자(순회세자)를 낳았다. 1557년 8월 세자로 책봉돼 왕위계승을 위한 수업을 받았다. 10살이 된  1561년 4월 20일 인정전에서 세자빈을 맞았다. 신부의 아버지는 황대임으로 윤원형과 사돈이었다. 이에 실록은 “지병에 시달리는 사람을 추천하여 굳이 세자빈으로 책봉하였으니, 윤원형의 죄악이 극도에 달했다”고 했다. 세자빈은 병이 있었다. 이에 5월 24일 명종이 전교하기를 “세자빈이 지난해 가을부터 잦은 병으로 치료 못할 지경이니 어찌 하겠는가? 속히 다른 빈을 간택토록 하라”고 했다. 7월 21일 새로운 세자빈을 정하고 10월에 책봉했으니 신부는 호군(정4품 무관) 윤옥의 딸로 한 살 많았다. 그러나 혼례 2년도 안돼 1563년 9월 20일 순회세자가 죽고 말았다. 명종은 의욕을 잃고 실의에 빠졌다. 그 슬픔이 얼마나 컸는지 1565년 3월 20일 실록에는 “임금이 2년 전 을미년에 세자를 잃은 뒤로부터 거둥을 전폐하였다”고 했다. 이틈에 문정왕후는 다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명종도 슬픔에서 벗어난 듯했다. 유생들에게 과거시험을 보게 하고 무예시범을 보였기 때문이다. 실록은 “이제 비로소 거둥하시니 행차를 구경하는 자들이 거리를 메우고 기뻐하였다”고 했다. 그러나 한 달도 안 돼 1565년 4월 6일 문정왕후가 갑자기 세상을 떴다. 명종은 장례를 치러야 했다.    

문정왕후가 죽은 뒤 대신들은 왕에게 윤원형과 보우를 내쫓으라 했다. 1565년 11월 18일 윤원형과 정난정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실록은 “윤원형이 정난정의 죽음에 못견뎌하다가 죽었다. 그의 권세는 임금을 넘고, 뇌물은 국고보다 많았다. 형 윤원로를 시기하여 죽게 하였고, 본처를 버리더니 독살하는 변을 빚었다”고 했다. 스님 보우도 유배 중 살해됐다.

강릉-태릉 둘레길이다. 강릉과 태릉은 가까이 있으며 1.8㎞의 둘레 길로 이어져 있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9.25.
강릉-태릉 둘레길이다. 강릉과 태릉은 가까이 있으며 1.8㎞의 둘레 길로 이어져 있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9.25.

◆잠시 명종시대, 그러나 이내 눈 감아

1566(명종21)년 1월 24일 개성부의 유생 100여명이 관의 허락도 없이 사당을 소각했다. 이에 이들을 벌주자고 주동을 잡아들이니 유생 250명이 소를 올려 잡아들인 유생의 방면을 요구했다. 또한 선교양종의 혁파를 주장하니 결국 이에 따랐다. 명종은 이질과 과도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면서 건강이 악화됐다. 1567년 음력 6월 28일 명종이 위독해졌다. 의식이 없어 말을 하지 못하는 상황이 됐다. 이에 사신이 논하기를 “어제 임금이 인사불성에 이르러 모두 어찌할 바를 몰랐었다. 대신들은 마땅히 궐내에 있어야 하거늘 편히 제집에 물러가 있었다. 이것이 임금에 대한 도리인가”라고 했다. 의식이 있을 때 후사에 대한 전교를 듣지 못한 것이다. 결국 후사는 인순왕후가 정했다. 명종은 축시(오전 1~3시) 경복궁 양심당에서 숨을 거뒀다. 7월 17일 왕의 묘호는 ‘명종’이었다. 명종이 평소 ‘시호는 명(明)자이면 족하다’고 했다. 실록은 명종시기를 “대행왕(죽은 왕)이 나이가 어려 정치는 문정왕후와 외가가 좌우하였다. 간신이 득세하여 선량한 신하들이 귀양보내지고 살해되었다. 왕은 외롭고 위태로웠다. 친정을 했으나 외척과 환관으로 문란해졌다. 다행히 이양(인순왕후 외삼촌)과 윤원형(명종의 외삼촌) 등의 무리를 내쳐 나라가 안정되었다”고 했다.

강릉 표석의 앞면에 ‘조선국 명종대왕 강릉’과 그 왼쪽 줄에 ‘인순왕후 부좌’라고 쓰여있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9.25.
강릉 표석의 앞면에 ‘조선국 명종대왕 강릉’과 그 왼쪽 줄에 ‘인순왕후 부좌’라고 쓰여있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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