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박세채(朴世采)의 생애(生涯)에 있어서 탕평론(蕩平論)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되는데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본다.

박세채는 당쟁(黨爭)이 심화(深化)되던 시기에 활동했으며, 특히 당쟁으로 인한 갈등이 생기지 않도록 중재하는 역할을 했는데 그러한 배경에서 남계(南溪)가 주장한 것이 바로 탕평론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해 탕평론은 한마디로 당쟁으로 인한 폐단(弊端)이 절정에 이르렀던 당시의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해결책으로 제시된 것인데, 당시에 이러한 주장을 한 인물은 박세채가 최초(最初)라 할 수 있다.

여기서 박세채가 탕평론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 직접적인 요인은 당시의 복잡한 붕당 정치(朋黨政治)라 할 수 있겠으나, 임진왜란(壬辰倭亂)과 병자호란(丙子胡亂) 이후에 고조된 기자숭배(箕子崇拜)와 그에 대한 연구도 영향을 줬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당시 기자에 대한 연구는 그의 사상(思想)과 정신(精神)에 비중(比重)을 뒀다고 보는데, 하나의 예가 왕도 정치(王道政治)를 구현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요소라 할 수 있는 홍범(洪範)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는 것을 통해 엿볼 수 있다.

구체적으로 율곡(栗谷) 이이(李珥)가 새로운 관점에서 홍범의 연구를 시도한 이후 많은 성리학자(性理學者)가 깊은 관심을 보였는데, 숙종(肅宗) 대에 박세채의 ‘범학전편(範學全編)’을 비롯해 이휘일(李徽逸), 이현일(李玄逸) 형제(兄弟)의 ‘홍범연의(洪範衍義)’, 영조(英祖) 대에 이원곤(李源坤)의 ‘기범연의(箕範衍義)’, 이민곤(李敏坤)의 ‘황극연의(皇極衍義)’등이 있었다.

이밖에도 한백겸(韓百謙)의 ‘기전고(箕田考)’와 서명응(徐命膺)의 ‘기자외기(箕子外記)’ 등 기자와 관련된 연구도 있었다.

그런데 특히 숙종 대에 박세채를 비롯하여 홍범에 대한 연구를 하는 학자(學者)들이 많았다는 사실을 통해 학문적(學問的)인 측면도 있겠지만 당시 당쟁이 극심했던 상황에서 기자에 대한 연구를 통해 새로운 조선을 다시 세우겠다는 강력한 의지(意志)를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눈여겨 볼 대목이 있으니 홍범에 나와 있는 황극이라는 개념이다. 이는 궁극적으로 황극의 이념 아래 왕도 정치를 실현하자는 것인데, 구체적으로 임금에게 간언(諫言)해 수덕(修德)을 강조함과 동시에 실추된 왕권(王權)을 회복(回復)하고 권위(權威)를 세우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