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영 6.25참전유공자회 이사 인터뷰
다부동 격전지, 아군·적군 합쳐 약 2만 7천명 사상자 발생
‘내가 후퇴하면 총을 쏘라’는 백선엽 장군 명언 직접 들어
푸틴 러 대통령 규탄, 자유주의 사상으로 남북통일 확신

전쟁은 분리를 낳는다. 부모와 자식 간, 연인 간에 안식처에서 피난처로, 삶에서 죽음으로 영원한 이별을 맞게 한다. 한국은 70여년 전 동족 간 전쟁이 벌어져 많은 이들이 고통받았다. 3년여에 걸친 비극으로 국군 62만여명, 유엔군 15만여명 등 총 77만여명이 전사, 부상, 실종됐다. 이재민은 1000만여명에 달했다. 가족을 잃거나 헤어진 사람들은 지금도 전쟁의 상흔으로 고통받고 있다.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한반도는 종전이 아니라 현재 정전 중이다. 본지는 정전 70주년을 맞아 6.25 전쟁 발발부터 정전까지 주요 과정을 짚어보고, 참전 용사들이 전하는 전쟁의 실상을 통해 평화의 의미를 되새기고자 한다.

[천지일보=박준성 기자] 이하영 6.25참전유공자회 이사가 지난 11일 본지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천지일보 2023.07.20.
[천지일보=박준성 기자] 이하영 6.25참전유공자회 이사가 지난 11일 본지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천지일보 2023.07.20.

[천지일보=김민희 기자] “만약 낙동강 전선이 허물어졌으면 오늘날 대한민국은 존재하지 않지요. 다부동 전투는 우리나라 6.25 전쟁사 중 가장 중요한 대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1950년 8월 1일부터 9월 24일까지 경상북도 칠곡군 가산면 다부리 일원에서 6.25 전쟁 최대의 격전 ‘다부동 전투’가 벌어졌다. 55일간의 전투에서 아군과 적군을 합쳐 약 2만 700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북한의 기습 남침 이후 50여일간 후퇴를 거듭하던 국군은 이곳에 최후의 교두보를 구축했다. 국군은 혈전을 거듭한 끝에 북한군에 패배를 안겼고 반격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의 대한민국을 존재하게 한 다부동 전투는 70여년이 흐른 지금 역사 속으로 잊힐 위기에 놓였다. 다부동 전투에 학도병으로 참전했던 이하영(90) 6.25참전유공자회 이사는 지난 11일 천지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젊은 사람들이 우리의 가장 쓰라린 역사를 거울삼아 나라에 대한 충성심을 가져야 하는데 안보에 대한 인식이 제대로 안 돼 있다”며 안타까워했다.

이 이사는 지난 5일 다부동 전적지에 세워진 백선엽 장군 동상 제막식에 다녀오는 길에 전철에서 한 ROTC 장교를 만났다. 자신의 영웅 제복을 보고 와서 깍듯이 경례하는 장교에게 이 이사는 “내가 오늘 다부동에 다녀오는 길인데 다부동 전투를 아느냐”고 물었다. 젊은 장교는 이 질문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이 이사는 “초급 장교에게 전쟁사에 대해서 역사 공부를 이렇게 안 시켰는데 무슨 정신교육이 됐겠느냐”면서 “전쟁에 대해 알리는 일이 우리(참전용사)의 과제”라고 말했다.

[천지일보=박준성 기자] 이하영 6.25참전유공자회 이사가 지난 11일 본지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천지일보 2023.07.20.
[천지일보=박준성 기자] 이하영 6.25참전유공자회 이사가 지난 11일 본지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천지일보 2023.07.20.

◆총대 멘 학도병… 북한 땅 밟기까지

이 이사는 다부동 전투 참전 당시 기억을 떠올렸다.

1932년 경북 성주군에서 태어난 그는 6.25 전쟁 발발 당시 성주농업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그의 작은아버지, 삼촌, 형님 모두 공무원이었다. 공무원 가족은 북한군의 박해 대상이 됐다. 이 이사는 성주군이 북한군에 점령되자 숙모, 형수, 사촌 아우들을 이끌고 피난길에 올랐다. 그는 가족들을 대구로 보낸 뒤 일주일간 군사 훈련을 받고 1사단 12연대에 배속됐다.

“첫 전투였던 다부동 328고지 전투에서 내 옆에 있던 전우가 인민군의 총에 맞아 죽었어요. 내가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군대 경험도 많이 없는데 옆에 사람이 죽었으니까. 그렇지만 그걸 슬퍼할 수도 없어요. 계속 적의 총알이 날아오니까.”

73년 전 여름 경북 칠곡군 고지는 뜨거웠다. 모기떼가 달려들었고 군복은 땀에 흥건히 젖었다. 총알이 날아드는 상황에서 고향 생각할 여력도 없었다. 지게 부대가 날라주던 물과 식량 보급이 끊기자 고지에 있던 병사들은 후퇴하기 시작했다.

“대구를 뺏기면 전 국토의 92%가 점령당하고 8%만 남아있는 그런 상태 아닙니까. 그러니까 (백선엽) 사단장께서 ‘멈춰라. 너희들이 후퇴하면 나라가 망하는데 어떻게 이래 후퇴하느냐. 싸워서 이겨야 한다. 내가 제일 앞장서겠노라. 만약에 내가 후퇴하면 내 가슴에 총을 쏘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지요.”

[천지일보=박준성 기자] 이하영 6.25참전유공자회 이사가 지난 11일 본지와 인터뷰 도중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관한 책을 보여주며 설명하고 있다. ⓒ천지일보 2023.07.20.
[천지일보=박준성 기자] 이하영 6.25참전유공자회 이사가 지난 11일 본지와 인터뷰 도중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관한 책을 보여주며 설명하고 있다. ⓒ천지일보 2023.07.20.

피나는 격전 끝에 다부동 전투에서 방어선을 지킬 수 있었다. 그 결과 9월 15일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했고, 국군 1사단은 평양에 입성했다. 대동강, 청천강을 건너 평안북도 운산까지 올라갔다.

“대구에서 평안북도 운산까지 자동차 한 번도 안 타고 걸어서 갔어요. 우리나라를 삼천리 금수강산이라고 하죠. 대구에서 부산까지를 500리라고 치고, 2400~2500리를 걸어서 올라갔어요. 지금 돌이켜보면 대단한 거죠.”

이 이사는 당시 걸어서 가던 길에 포병으로 참전한 중학교 은사를 만나기도 했다.

“중학교 생물 선생을 만났어요. 반가워서 끌어안고 서로 포옹했지요. 그러고는 선생이 윙하고 차를 타고 가는데 얼마나 부럽던지요. 나도 포병으로 갔으면 저렇게 갔을걸. 허허.”

◆다신 없어야 할 ‘비참한’ 전쟁

이후 국군은 다시금 밀리고 밀리며 후퇴를 계속했다. 이 이사는 그때 당시 상사와의 에피소드를 전했다. 청천강 부근에 있을 때 상사가 한번은 연애편지를 써달라는 지시를 했다. 이 이사가 연애편지를 쓰니 그다음 편지를 아무 집에 있는 처녀한테 전달하라고 시켰다. 이 이사는 민간 집에 들어가 한 처녀에게 편지를 건넸다. 당시 북한 주민들은 후퇴하는 국군과 유엔군을 따라 남한으로 내려오기도 했다. 이 이사는 그때 그 처녀도 남쪽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고 떠올렸다.

“지금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 처녀가 남쪽으로 오지 않았겠는가 싶네요. 우리 나이대 됐으니까 아마 죽었을는지도 모르고 백세시대니까 지금까지 살아있을지도 모르죠.”

국군은 1950년 10월 25일 운산에서 중공군을 맞닥뜨린 뒤 후퇴하기 시작했다. 개성을 지나 파주 고랑포에 왔다. 1950년 12월 31일 그해 마지막 날 임진강은 얼음판으로 얼어붙었다. 이 이사는 임진강으로 추격해오던 중공군의 모습이 ‘개미 떼 같았다’고 떠올렸다. 이후 1.4 후퇴로 서울을 다시 북한군에 내주게 됐다. 그는 “우리나라가 그런 비참한 환경 속에 있었다”고 말했다.

이 이사는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되기 전 일반 제대했다. 그는 “전쟁에서 안 죽고 크게 부상 안 당하고 저 위에 운산까지 다녀왔으니 어떻게 보면 신이 날 도와준 게 아닌가, 우리 조상께서 잘 보살펴 준 게 아닌가 싶다”고 회상했다. 이어 “전쟁은 앞으로 없어야 하지 않겠나”고 말했다.

[천지일보=박준성 기자] 이하영 6.25참전유공자회 이사가 지난 11일 본지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천지일보 2023.07.20.
[천지일보=박준성 기자] 이하영 6.25참전유공자회 이사가 지난 11일 본지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천지일보 2023.07.20.

◆다부동 참전용사의 바람

동족상잔의 비극을 맛봤던 이 이사에게 우크라이나 전쟁은 남 일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우크라이나가 폭격을 맞아서 건물이고 자동차고 무너진 걸 봤어요. 우리나라 6.25 때도 저렇게 참혹하진 않았어요. 그 당시엔 건물이 많이 없었으니까. 그걸 보고 우크라이나 사람들이 얼마나 고통스럽겠나 싶었습니다.”

이 이사는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강하게 비판했다.

“땅따먹기 식으로 남의 나라 침범해서 저렇게 많은 사람을 죽이고. 푸틴은 전쟁범으로 크게 벌을 받아야 하지 않겠나 싶습니다.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에서 우크라이나를 완전히 도와주고 있죠. 게다가 현재 푸틴은 소련 내에서도 인기를 잃고 있는 상탭니다. 머지않아 전쟁이 끝날 거라고 봅니다.”

북한 땅을 밟았던 이 이사는 남북통일에 대한 확신을 내비쳤다.

“대한민국이 분명히 북쪽을 통일시킬 겁니다. 남쪽이 50배는 경제력이 더 좋지 않습니까. 저 사람들(북한)은 소위 말하자면 옛날 왕권 시댑니다. 민주의 바람이 조금 들어가고 자유주의적인 사상이 조금만 들어가면 내부적으로 붕괴될 겁니다. 그런 날이 앞으로 10년 내 올는지 5년 후에 올는지는 모르지만 서독, 동독처럼 통일되는 날이 오지 않겠나. 그런 생각도 해봅니다.”

이 이사는 요즘 정치에 대해 “옛날 사색당파 이상으로 완전히 좌우로 갈라져서 너 죽고 나 죽으란 식”이라며 “그런 것이 불식돼서 새로운 정치문화가 생겼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정치에 관여할 순 없지만 신문 보도를 보면 너무 한심스럽습니다. 이런 식으로 해서 젊은 세대들이 뭘 배우겠나 싶어요. 배울 걸 줘야 하는 데 나쁜 것만 하니까 나라가 어떻게 되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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