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사 이야기2-부산] 사익(私益)보다 공익(公益)을 생각했던 기업인, 백산 안희제(1)
[지역사 이야기2-부산] 사익(私益)보다 공익(公益)을 생각했던 기업인, 백산 안희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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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사 이야기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지역 곳곳의 역사를 재조명하고자 합니다. 흔하게 역사 교과서 등에서 볼 수 있는 주제가 아닌, 내가 발 딛고 살아가는 이 지역을 지켜줬던 과거의 흔적들을 찾아보는 시간이 됩니다. 이 글을 통해 과거의 역사를 알고 이곳에서 우리가 살아갈 수 있음을 다시금 감사하는 시간이 됐으면 합니다.

[천지일보=이예진 기자] 부산시 중구에 위치한 백산 기념관
[천지일보=이예진 기자] 부산시 중구에 위치한 백산 기념관

국가가 망해 가는데 선비가 어디에 쓰일 것입니까. 고서(古書)를 읽고 실행하지 않으면 도리어 무식자만 같지 못합니다. 시대에 맞지 않는 학문은 오히려 나라를 해치는 것이니, 내일 당장 경성으로 올라가 세상에 맞는 학문을 하여 국민의 직분을 다하는 것이 가위 공맹(孔孟)의 도라 할 수 있는데, 어찌 산림간(山林間)에 숨어서 부질없이 글귀만 읽고 있겠습니까.

이윤의 획득을 목적으로 운용하는 자본의 조직단위. 기업의 사전적 정의다. 우리는 기업이 생산하는 물품을 구입하고 소비하고, 기업은 이를 통해 이윤을 남긴다. 그리고 다시 소비자는 기업에 들어가 생산의 주체가 되기도 한다. 이를 통해 자유경제에 있어서 기업과 소비자는 절대 갑, 절대 을의 위치에 있을 수 없다.

하지만 요즘 물질만능주의가 팽배해지면서 소위 ‘재벌’이라고 불리는 기업가(家)에서 드러나는 행태들을 보면 자신들의 세계가 있는 것 마냥 절대 ‘갑’의 위치에서 ‘을’을 부리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를 보면서 소비자들은 재벌을 향해 손가락질을 한다.

그렇다면 소비자가 원하는 올바른 기업상은 무엇일까라고 물어본다면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라고 많이들 대답할 것이다. 물론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재벌과 같은 기업가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우리는 ‘재벌=사회 고위층’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인데 사실 우리나라에서 기업인이 인정받은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러한 부정적인 기업인 이미지를 바꿀 한 인물이 있다. 바로 백산 안희제다.

◆ 신학문에 눈을 뜨다

안희제는 풍전등화와 같았던 조선 말 1885년 8월 4일에 경남 의령군 부림면 입산리에서 태어났다. 입산리는 강진 안씨의 집성촌이었으므로 그는 자연스럽게 7살 때부터 집안의 형인 안익제로부터 한학을 수학했다. 어릴 때부터 영민하고 문장에 능통했던 그는 19살의 나이에 선비들과 나란히 한시를 써 <남유록(南遊錄)>에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시대 상황은 그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한학으로는 망국의 위험에 처한 조선을 구할 수 없다고 판단한 그는 집안 어른들에게 신학문을 익힐 것을 밝혔다. 안희제는 가만히 앉아 글만 읽을 것이 아니라 세상에 맞는 학문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집안 어른들은 그의 말이 옳았지만 당장 올라갈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가만히 고민하던 그는 밤 몰래 여장을 챙겨 서울로 상경했다.

러일전쟁이 끝난 1905년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학교) 경제과에 입학했다가 다음에 양정의숙으로 전학하여 학문을 익혀갔다. 그러면서 그는 자라나는 청소년의 교육 중요성을 깨닫고 1907년 교남학우회를 조직했다. 교남학우회를 통해 가난한 학생들에게 학비를 지원하고 방학에는 순회강연을 다니며 민중의 의식을 깨우치는 일을 시작했다. 그러면서 고향인 의령에 의신학교, 동래 구포에는 구명학교 다음해인 1908년에는 고향 의령군 부림면 입산리에 창남학교를 세우면서 계몽운동을 이어갔다. 또 교남교육회를 조직해 잡지를 발행하기도 했다.

보수적인 성향이 짙었던 당시 영남지역은 신교육의 보급과 시행이 다른 지역보다 어려웠다. 서북지역의 경우는 수많은 소학교가 세워지고 동네에서도 큰 환영을 받았던 반면 영남지역에서는 소학교 세우는 일이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가 설립한 창남학교가 영남지역에서 3~4번째로 세워진 학교였으니 얼마나 영남지역이 신교육에 보수적인 성향을 가졌는지 알만했다. 그래서 안희제는 구명학교 교장으로 2년간 있으면서 신교육에 더욱 힘썼고 자신이 학교를 세우는 것 외에도 동료들이 세우는 학교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깨어있는 지식인들이 모여 나라를 구하기 위해 계몽운동을 펼쳤지만 일제는 더더욱 식민지화에 박차를 가했다. 헤이그 특사 사건을 구실로 고종을 강제퇴위 시킨 일제는 이완용 내각을 통해 ‘정미7조약’을 체결하면서 차관정치를 시행했다.

[천지일보=이예진 기자] 부산 중구에 위치한 백산 기념관에 전시된 교남교육회 잡지
[천지일보=이예진 기자] 부산시 중구에 위치한 백산 기념관에 전시된 교남교육회 잡지

◆ 비밀결사 ‘대동청년당’ 조직

이러한 시국에서 안희제는 국권회복을 위한 장기적인 계획으로 1909년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을 조직했다. 그와 뜻을 함께하는 서상일·남형우 등 17세부터 30세 미만의 뜻있는 청년 30여명이 모여 조직한 대동청년당은 8·15 해방 때까지 발각되지 않은 비밀조직이었다.

대동청년당 단규

1. 단원은 반드시 피로 맹세할 것

2. 새 단원의 가입은 단원 2명 이상 추천을 받을 것

3. 단명이나 단에 관한 사항은 문자로 표시하지 말 것

4. 경찰 기타 기관에 체포될 경우 그 사건은 본인에만 한하고 다른 단원에게 연루시키지 말 것

사실 대동청년당의 자료는 현재 많지 않다. 비밀결사으로 활동했던 탓에 자료를 거의 남기지 않았고 2대 단장으로 활약했던 백산 역시 망명하기 전에 대부분의 자료를 불태웠다고 한다.

당시 일제의 탄압은 망국의 길에 들어선 조선을 향해 거침없이 칼날을 드러낼 만큼 무자비했다. 하지만 안희제는 그 속에서도 이 나라를 지고 갈 청년에 대한 기대감과 그들이 만들어갈 나라를 생각하며 ‘대동청년당’을 조직했다. 그가 이종률에게 대동청년당의 의미를 설명한 것을 보면 그의 마음을 알 수 있다.

“청년당이라고 이름을 부치게 된 것은 조직성원이 대개 청년들인데도 이유의 일단이 있었지마는 그보다도 주된 이유는 그 때 이미 노쇠의 처지에 놓여있게 된 그 나라의 지속인 것이 아니라 새로운 청년조국을 우리 청년들의 힘으로 건설해야 한다는 주장에서 그렇게 이름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는 망국의 나라를 바라보며 슬퍼했던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해서든 이 나라를 새롭게 만들어가야겠다는 희망과 그 희망을 청년들이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 새로운 나라는 그가 겪었던 군주제의 나라가 아닌 신민회와 같이 새로운 나라, 공화정을 지향했던 것 같다.

[천지일보=이예진 기자] 부산 중구에 위치한 백산 기념관 내부
[천지일보=이예진 기자] 부산시 중구에 위치한 백산 기념관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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