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사 이야기3-대구] 아이부터 여성까지 모두가 참여했던 나랏빚 갚기, 국채보상운동(1)
[지역사 이야기3-대구] 아이부터 여성까지 모두가 참여했던 나랏빚 갚기, 국채보상운동(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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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사 이야기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지역 곳곳의 역사를 재조명하고자 합니다. 흔하게 역사 교과서 등에서 볼 수 있는 주제가 아닌, 내가 발 딛고 살아가는 이 지역을 지켜줬던 과거의 흔적들을 찾아보는 시간이 됩니다. 이 글을 통해 과거의 역사를 알고 이곳에서 우리가 살아갈 수 있음을 다시금 감사하는 시간이 됐으면 합니다.

국채보상기성회 취지서(대한매일신보 제449호)
국채보상기성회 취지서(대한매일신보 제449호)

“지금 국채 일천삼백만 원이 있은즉 우리 대한의 존망에 관계되는 것입니다. 갚으면 나라는 보존될 것이요 갚지 못하면 나라가 망할 것은 필연적인 사실입니다. 지금 국고로는 변제하기 어려운 형세이니 2천만 민중이 3개월 날짜를 정하여 담배 피우는 것을 폐지하고 그 대금으로 각 사람이 매월 20전씩 거둔다면 일천삼백만 원은 모을 수 있으며, 만일 그 액수가 미달할 때는 1원, 10원, 100원, 1000원의 특별 출연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중략)

저희들이 여기서 감히 발기하여 취지를 알려 드리고 피눈물로 호소합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우리 대한 신민 여러분은 보시는 대로 곧 말로 글로 서로 알리어 고해서 한 사람이라도 모르는 일이 없게 하고 기어이 실시되어 위로는 임금의 높고 밝은 덕에 보답하고 아래로는 강토를 유지하게 된다면 이 이상 더 다행한 일이 없겠나이다.”

- <국채 일천삼백만원 보상취지문(1907년 2월 21일 대한매일신보)> 中

◆ 깨어있는 지식인의 결의부터

일제는 대한제국에 1906년 2월 통감부를 설치하면서 정치·경제적 침탈을 가속화시켰다. 청일전쟁부터 차관을 적극적으로 제공한 일제는 경제적으로 우위를 점하고 있었고, 대한제국이 1907년까지 들인 차관은 1300만원에 달했다. 이는 당시 대한제국의 1년 예산과 맞먹는 금액이었고 현실적으로 갚기 어려운 큰 금액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 1907년 2월 대구의 광문사(廣文社) 사장 김광제와 부사장 서상돈은 나랏빚을 갚지 못하면 나라가 망하게 될 것이라는 위기의식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광문사 사내 조직이었던 대구광문사문회는 ‘대동광문회(大東光文會)’로 개칭하는 자리에서 서상돈의 제안으로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했다.

국채보상의연금으로 800원을 먼저 냈던 서상돈이 “국채 1300만원을 갚지 못하면 장차 국토라도 팔아서 갚아야 하므로 2000만 동포가 담배를 석달만 피우지 말고, 그 대금으로 국채를 갚자”고 제의를 하자 김광제는 즉시 실현하자고 주장했고 회의에 참석했던 이들은 그 자리에서 담배를 끊기로 결의했다.

약 2000원이 모금된 그 자리에서 대동광문회 회장에 박해령, 부회장에 김광제를 선출하고 2월 21일 대구민의소에서 열린 총회 석상에서 단연회를 설립했다. 그리고 대구 서문시장 인근 북후정으로 자리를 옮긴 이들은 국채보상모금을 위한 대구군민대회를 열었고, 이 자리에서 <국채보상운동 취지서>를 낭독했다.

취지서는 <국채 일천삼백만 원 보상 취지>라는 제목으로 1907년 2월 21일자 ‘대한매일신보’에 게재됐고 전국적인 모금운동을 전개했다. 장지연은 대구군민대회를 보면서 <대한자강회월보> 제9호에 “노소 신사와 청홍 부녀들과 술 파는 아낙과 차 파는 노파, 다리를 저는 걸인과 백정, 책을 낀 동자와 제기 차는 아이들까지도 원통하여 눈물을 흘리며 의기 분발하여 당일 수합한 돈이 수백 수십 원이라 하니 사람의 마음 감발이 이처럼 굳은 것인가.”라며 논설 <단연 상채 문제>를 기재했다.

[천지일보=이예진 기자] 대구시 중구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에 있는 김광제 흉상
[천지일보=이예진 기자] 대구시 중구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에 있는 김광제 흉상

◆ 금연운동부터 여성운동까지

처음 국채보상운동의 실천 방안으로 나타난 것은 금연운동이었다. 그 당시 담배는 일본인들이 폭리를 취하는 물품 중에 하나였지만 없어서 못 팔정도로 인기 있는 품목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서상돈은 실천 방안 중 하나로 금연을 꼽았다.

하지만 국채보상운동의 가장 큰 특이점은 여성들의 참여였다. 처음 금연운동의 주체는 남성들이었다. 북후정에서 대구군민대회를 열고 이틀 후인 2월 23일 대구 남일동에서 여성들은 ‘남일동 패물폐지 부인회’를 조직했다. 이들은 자신들의 패물을 국채보상의연금으로 내어놓으면서 취지서를 발표했다.

“우리가 아녀자의 몸으로 규문에 있으면서 삼종지의에 간섭할 마음이 없지만, 나라를 위한 마음과 백성된 도리에 어찌 남녀가 다를 수 있겠습니까? (중략) 본인들은 여자의 몸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는 패물 뿐입니다. 태산이 작은 흙덩이를 사양치 않고 바다가 작은 물줄기를 사양치 않아 저렇게 크게 이루어졌습니다. 뜻있는 부인 동포들은 많고 적음에 구애됨이 없이 진심으로 도와 국채를 완전히 보상한다면 천만다행한 일일 것입니다.”

- <경고 아 부인 동포라(대한매일신보 제457호)> 中

여성들의 참여가 이어지고, 대구 서문시장의 영세 상인들 또한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분위기가 일어나자 참여를 하지 않고 있던 학자나 부자들은 부끄러워했고 국채보상운동에 함께했다.

이렇게 국채보상운동이 확산되자 서울에서는 <국채보상기성회>가 조직됐고 전국 각지에 수많은 단체들이 나타났다. 이렇게 대구에서 시작된 운동은 전국 운동으로 확산됐고, 국외에 있는 유학생이나 교포들도 의연금을 보내왔다. 또 조선인 뿐 아니라 외국인들도 이 광경에 감동하며 참여했고, 고종 황제 또한 금연을 하면서 국채보상운동에 힘을 보탰다.

[천지일보=이예진 기자] 대구시 중구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에 있는 '경고 아 부인동포라' 기념비
[천지일보=이예진 기자] 대구시 중구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에 있는 '경고 아 부인동포라' 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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