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사 이야기5-나주] 거북선의 고향, 나대용 장군을 기리다(3)
[지역사 이야기5-나주] 거북선의 고향, 나대용 장군을 기리다(3)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지역사 이야기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지역 곳곳의 역사를 재조명하고자 합니다. 흔하게 역사 교과서 등에서 볼 수 있는 주제가 아닌, 내가 발 딛고 살아가는 이 지역을 지켜줬던 과거의 흔적들을 찾아보는 시간이 됩니다. 이 글을 통해 과거의 역사를 알고 이곳에서 우리가 살아갈 수 있음을 다시금 감사하는 시간이 됐으면 합니다.

[천지일보=이예진 기자] 나주시 문평면에 있는 나대용 장군 기적비
[천지일보=이예진 기자] 나주시 문평면에 있는 나대용 장군 기적비

◆ 조선 최고의 조선기술자로 인정받다

나대용 장군은 일본과 마지막으로 싸운 노량해전까지 이순신 장군을 보필하며 전투에 참여했고 이에 선조는 청룡도와 삼지창을 하사하며 공을 치하했다. 전란 이후 순찰사 한효순 휘하의 군관으로 있으면서 거북선의 불편함을 개량한 창선을 개발했다. 거북선은 덩치가 커서 많은 사람들이 필요하다는 단점이 있었는데, 창선은 적은 인원으로도 움직일 수 있도록 만들어진 중형 군선이었다.

선조 39년 12월에 나대용 장군은 “신은 항상 노 젓는 병사가 덜 들어가는 방법을 생각하고 있었던 바, 기해년(1599년)에 일찍이 순찰사 한효순의 군관이 되어 전선 25척을 별도로 만들었고, 감조할 때 판옥선도 아니요, 거북선도 아닌 특별한 모양으로 만들어서, 칼과 창을 총총히 꽂아 이름을 창선이라 하였습니다. 그래서 노 젓는 병사 42명을 싣고 시험 삼아 바다 가운데로 저어 나가 보니 그 빠른 품이 나는 것 같사옵고 화살 쏘는 편의도 역시 판옥선 보다 나았습니다.”라고 상소문을 올렸다.

사실 창선은 당대에 크게 각광을 받지는 못했으나 조선 후기에 나타난 방선 또는 방패선이라고 불리는 중형 전투함의 모형이 됐다.

창선 외에도 남해현령으로 재직했을 시절에는 쾌속선인 해추선을 발명했다. 이에 광해군은 “오직 재력의 핍박이 극심하여 이에 네 손발로 노력해서 이루었도다. 고을 다스린 지 겨우 열 달 만에 공역을 끝내어 세 척을 만들었다니 이미 직책을 다 한 실효가 있는데 어찌 공을 보수하는 특전이 없을소냐 이러므로 벼슬을 통정대부로 올리고 남해현령을 이전과 같이 거행케 한다.”고 교서를 내리기도 했다.

[천지일보=이예진 기자] 나주시 문평면 소충사에는 나대용 장군의 영정과 위패가 봉안돼 있다.
[천지일보=이예진 기자] 나주시 문평면 소충사에는 나대용 장군의 영정과 위패가 봉안돼 있다.

◆ 나대용 장군 기념사업

장군의 고향인 나주시 문평면 오륜리에 가면 그의 생가가 있다. 또 인근에는 그의 영정과 위패가 봉안된 소충사가 있다. 장군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1977년에 건립됐다. 이 외에도 그의 공적을 기리는 기적비도 얼마 가지 않아서 볼 수 있다. 그의 후손들은 매년 과학의 날인 4월 21일에 추모제를 열고 있다.

사실 ‘거북선’이라고 하면 이순신 장군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또 나대용 장군이 거북선 건조에 참여한 것은 확실하나 제안을 했다고 할 수 있는 기록들이 아직 많지 않다. 하지만 그의 참여로 만들어진 거북선은 임진왜란을 승리로 견인한 주인공인 것은 확실하다. 또 조선 후기 호남의 유림들이 그의 공과 덕을 기리기 시작한 것을 보면 그의 공적 또한 확실하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이제껏 ‘임진왜란=거북선=이순신’이라는 공식 아래 이순신 장군에 대해서만 조명해왔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이 길었던 임진왜란을 혼자만의 지략과 힘만으로는 승리로 이끌 수 없었을 것이다. 그의 옆에서 많은 이들이 보필하였고, 피와 땀을 흘리며 함께 조선을 지켰을 그들의 역사를 조명하는 후대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1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문지숙 2020-10-16 17:16:00
이런분도 계셧구나 우리는 이순신장군만 아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