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사 이야기5-나주] 거북선의 고향, 나대용 장군을 기리다(1)
[지역사 이야기5-나주] 거북선의 고향, 나대용 장군을 기리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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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사 이야기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지역 곳곳의 역사를 재조명하고자 합니다. 흔하게 역사 교과서 등에서 볼 수 있는 주제가 아닌, 내가 발 딛고 살아가는 이 지역을 지켜줬던 과거의 흔적들을 찾아보는 시간이 됩니다. 이 글을 통해 과거의 역사를 알고 이곳에서 우리가 살아갈 수 있음을 다시금 감사하는 시간이 됐으면 합니다.

[천지일보=이예진 기자] 나주시 문평면에 있는 나대용 장군 생가
[천지일보=이예진 기자] 나주시 문평면에 있는 나대용 장군 생가

조선의 전선은 철판으로 몸을 싸고 마치 거북모양으로 만들어 당시 일본의 목조 병선을 깨뜨렸으니 세계에서 가장 오랜 철갑선은 진실로 한국인의 발명인 것이다.

- 영국해군의 기록(1883년)

조선시대 가장 큰 전란 중 하나였던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것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뛰어난 지략과 거북선의 등장이었다. 이순신 장군과 거북선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짝지와도 같아 보이지만, 사실 거북선을 만든 인물은 따로 있다. 바로 체암 나대용 장군이다.

◆ 나대용 장군, 그는 누구인가

1566년 나주에서 태어난 나대용 장군은 조선 중기 무신이다. 원래는 학문의 길을 걸었지만 영산강 유역에 나타나 행패를 부리는 왜구의 모습에 무예를 닦고 28세에 무과에 급제했다. 급제 후 훈련원 봉사(奉事)로 8년간 근무하면서 조정에 왜적이 들어올 것을 염려하는 글을 올리기도 했다.

그러다 1582년에 고향인 나주 문평으로 낙향한 그는 어렸을 때부터 생각해왔던 거북선 연구를 시작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1년 전인 1591(선조 24)년에 나대용 장군은 이순신 장군 휘하로 들어가게 된다. 이순신 장군 휘하로 들어간 그는 거북선 건조 외에도 옥포해전, 사천해전 등에 참여해 공을 세웠다. 이후 정유재란에도 이순신 장군과 함께 참여해 명량해전과 노량해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길었던 임진왜란이 끝나고, 나대용 장군은 강진·남해·고성 등 일곱 곳의 현령(縣令)을 역임하면서 전란을 수습하고 민생안정을 시켰다. 특히 남해는 왜적이 계속 들끓던 곳이었지만 나대용 장군의 노력으로 안정을 시킨 곳이었다.

이후 광해군 3년에 경기 수군을 관할하는 교동수사로 승진됐으나 임진왜란 중 입은 부상이 덧나면서 부임하지 못하고 다음해에 향년 57세로 별세했다. 그의 묘는 고향인 나주시 문평면에 위치해있다.

거북선(출처: 게티이미지 뱅크)
거북선(출처: 게티이미지 뱅크)

◆ 화력은 좋았지만 속도가 느렸던 판옥선

임진왜란 때 등장했던 거북선. 그렇다면 거북선이 등장하기 전에 이용됐던 배는 어떤 것일까? 당시 수군의 주력 전함은 전선이라고도 불리는 판옥선이었다.

판옥선 이전에 있었던 맹선은 고려시대 때부터 이용됐던 배로, 조운을 겸할 수 있었다. 평소에는 조운선으로 이용되다가, 군용으로 쓰일 때는 적당한 수의 노를 설치해 병사들이 싸울 수 있도록 갑판을 깔았다. 하지만 왜적들이 왜선에 화포를 설치하고 규모가 점점 커지면서 평선 구조의 맹선만으로는 왜구 격퇴가 어려워졌다. 그래서 명종 대에 맹선의 단점을 보완해 만든 군용선이 판옥선이었다.

판옥선은 갑판 위에 상갑판을 올리고, 그 위에 사령탑을 설치한 형태의 2층 구조로 되어 있다. 1층은 노를 젓는 노군이 담당했고, 2층은 전투에 참여하는 전투원들이 담당했다. 이는 판옥선의 가장 큰 장점으로 내부에서 노를 젓는 노군들이 노출되지 않았다. 즉 전투에 참여하는 전투원들과 노만 젓는 노군과의 역할을 분리함으로써 각자의 역할에 충실히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판옥선은 거북선과 비교했을 때 구조는 비슷하나, 전투에 이용되는 역할이 달랐다. 거북선은 맨 앞에서 진격해 적의 진열을 흩뜨리는 돌격대의 역할이었다면 판옥선은 그 뒤를 따라 막강한 화력을 통해 적들을 소탕하는 역할이었다. 속도가 느렸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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