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사 이야기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지역 곳곳의 역사를 재조명하고자 합니다. 흔하게 역사 교과서 등에서 볼 수 있는 주제가 아닌, 내가 발 딛고 살아가는 이 지역을 지켜줬던 과거의 흔적들을 찾아보는 시간이 됩니다. 이 글을 통해 과거의 역사를 알고 이곳에서 우리가 살아갈 수 있음을 다시금 감사하는 시간이 됐으면 합니다.

[천지일보=이예진 기자] 대구시 중구 국채보상운동기념관 내부 모습(양기탁과 베델)
[천지일보=이예진 기자] 대구시 중구 국채보상운동기념관 내부 모습(양기탁과 베델)

◆ 최초의 언론 캠페인

이렇게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될 수 있었던 것은 언론의 힘이 컸다. <대한매일신보>는 “이번 국채보상운동에 대해서 황실과 고관들 그리고 각 학교 대다수가 단연에 동참하고 있어 본 사원도 일반 의무로 동맹 단연함”이라고 광고에 올리며 신문사 사원들의 참여를 피력했고, 지면에 ‘국채 보상에 대하여 우리 동포 여러분께 알립니다.’라는 순 한글 기고문을 싣기도 했다.

또 다양한 계층의 참여 모습을 기사로 실어 운동에 참여하도록 독려했다. 1907년 4월 10일에 발행된 <대한매일신보> 제482호에는 ‘도둑 의연 도둑도 오히려 의를 알다.’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내용에는 국채의연금을 모집해 상경하던 사람이 도적떼를 만났는데 도적떼에게 “이는 국채보상금이니 내가 비록 이 돈을 빼앗겼으나 너희는 불과 몇 십리에 죽음을 면하지 못하리라”하니 도적떼가 놀라 다시 돌려주며 10원까지 더 보태줬다고 적혀있다.

이 외에도 1907년 3월 28일 <대한매일신보> 제473호에는 ‘대구 기생 앵무가 국채보상금 100원을 냈다’는 기사도 있다. <대한매일신보>뿐 아니라 <황성신문> <제국신문> <만세보> 등에서도 다양한 기사를 실었으며 <대한자강회월보> <서우> <야뢰> <대동보> 등의 잡지 또한 국민들의 의식을 깨우는 데 동참했다.

이를 통해 인천·부산·원산·평양 등 전국에서 20여개의 국채보상운동단체가 설립이 됐고, 그 안에서는 다양한 방법으로 국채보상운동이 전개됐다.

[천지일보=이예진 기자] 대구시 중구 국채보상운동기념관 내부 모습
[천지일보=이예진 기자] 대구시 중구 국채보상운동기념관 내부 모습

◆ 일제의 방해공작 그리고 와해

하지만 이를 가만히 지켜볼 일제가 아니었다. 일제는 운동이 시작될 때는 얼마 가지 않아 수그러들 것으로 예상했으나 점점 열기가 더해져 가는 것을 보고 탄압하기 시작했다. 특히 운동을 주체적으로 이끌고 있는 <대한매일신보>가 일제의 눈엣가시처럼 밟혔다. 당시 <대한매일신보>는 국채보상운동을 이끌면서 급격하게 성장하고 있었고 1907년 9월 무렵에는 국한문, 한글, 영문 세 가지 신문의 발행부수를 합쳐 1만 부가 넘는 신문을 배부하고 있었다. 이 부수는 당시 국내에서 발행되는 타 신문의 부수를 모두 합친 것보다 훨씬 많은 부수였다.

이에 일제 통감부는 신문사를 이끌고 있던 영국인 베델을 추방해달라고 영국 측에 요구했다. 또 신문지법을 개정해 외국에서 발행된 한국어 신문과 한국에서 외국인이 발행하는 한국어 신문도 발매·반포를 금지·압수할 수 있다는 조항을 삽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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