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사 이야기3-대구] 아이부터 여성까지 모두가 참여했던 나랏빚 갚기, 국채보상운동(3)
[지역사 이야기3-대구] 아이부터 여성까지 모두가 참여했던 나랏빚 갚기, 국채보상운동(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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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사 이야기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지역 곳곳의 역사를 재조명하고자 합니다. 흔하게 역사 교과서 등에서 볼 수 있는 주제가 아닌, 내가 발 딛고 살아가는 이 지역을 지켜줬던 과거의 흔적들을 찾아보는 시간이 됩니다. 이 글을 통해 과거의 역사를 알고 이곳에서 우리가 살아갈 수 있음을 다시금 감사하는 시간이 됐으면 합니다.

[천지일보=이예진 기자] 대구시 중구 국채보상운동기념관 내부 모습(양기탁과 베델)
[천지일보=이예진 기자] 대구시 중구 국채보상운동기념관 내부 모습(양기탁과 베델)

이후 베델은 여러 번의 재판 끝에 상하이 감옥에서 3주간 복역했고, 그동안 일제는 <대한매일신보>의 총무 양기탁을 국채보상의연금 횡령 혐의로 구속시켰다. 양기탁이 구속되자 영국은 베델 재판에 증언한 양기탁에 대한 일제의 보복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베델의 재판과 양기탁의 구속은 국내에서 신뢰를 잃게 만들었고 국채보상운동에 제동이 걸리게 됐다. 양기탁은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 판결을 받았으나 국민들에게 잃은 신뢰를 회복하기에는 힘든 지경에 이르렀고, 일제는 친일 단체인 일진회 등을 동원해 국채보상운동을 탄압했다.

결국 국채보상운동은 좌절되고 말았다. 국채보상운동에서 모인 금액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약 20만원으로 예상되며 이 돈을 처리하기 위해 1909년 11월 국채보상금처리회가 만들어졌다. 당시 황현이 쓴 <매천야록>에는 1910년 국채보상금처리회가 조사한 결과 금액이 15만 9253원 99전이라고 기록돼 있다. 1910년 4월 16일 전국대표자회의를 개최한 처리회는 보상금 처리 문제를 논의한 결과 토지를 매입하고 증식해 교육 사업에 투자하기로 했다.

하지만 8월에 한일병합조약으로 국권을 뺏기면서 국채보상금처리회는 교육기본금관리회로 바뀌었고 관리하던 약 15만원은 모두 경무총감부에 귀속돼 일제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천지일보=이예진 기자] 대구시 중구에 위치한 국채보상운동 기념관
[천지일보=이예진 기자] 대구시 중구에 위치한 국채보상운동 기념관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은 우리나라 최초의 금연운동이자 국민적 기부운동이었으며 근대적 여성·학생운동이었다. 또 동시에 최초의 언론캠페인 운동이었다. ‘최초’라는 타이틀의 의미를 파헤쳐보면 결국 당시 모든 국민이 동참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이부터 노인 그리고 지식인과 관료 뿐 아니라 기생·백정·걸인이 동참했던 범국민적인 운동. 이 역사는 1997년 동아시아 외환위기 때 금모으기 운동으로 다시 나타났다.

물질이라는 것은 각자가 끊임없이 모으면서 욕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나라가 위급할 때 자신의 것을 아낌없이 내는 국민성은 물질만능주의를 살아가는 현 실태를 다시 생각할 수 있는 부분이다.

이러한 사상은 국채보상운동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뽑힐 수 있도록 한 이유 중 하나로 꼽힌다. 수기·언론·정부기록물 등 2457건으로 구성된 국채보상운동 기록물은 지난 2017년 10월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으며 우리나라의 세계기록유산 중 유일한 근대기록물이다. 등재 당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국제자문위원회는 제국주의 열강에 대응해 가장 앞선 시기에 범국민 기부운동을 바탕으로 나랏빚을 갚고자 했던 ‘국권수호운동’이라는 점을 높이 평가했다.

역사는 돌고 돈다고 했다. 그것은 사건의 반복이 아니라 수많은 시간을 이어온 국민성의 연속성이 아닐까. 개인주의를 향해가는 지금 이 세태를 생각해보며 힘든 시간을 함께 이겨냈던 우리의 국민성을 다시 되돌아보면서 좀 더 나은 대한민국을 향해가는 우리가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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