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사 이야기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지역 곳곳의 역사를 재조명하고자 합니다. 흔하게 역사 교과서 등에서 볼 수 있는 주제가 아닌, 내가 발 딛고 살아가는 이 지역을 지켜줬던 과거의 흔적들을 찾아보는 시간이 됩니다. 이 글을 통해 과거의 역사를 알고 이곳에서 우리가 살아갈 수 있음을 다시금 감사하는 시간이 됐으면 합니다.

우당 이회영과 함께 6형제가 모여 망명을 의논하고 있는 그림(출처: 우당 기념관)
우당 이회영과 함께 6형제가 모여 망명을 의논하고 있는 그림(출처: 우당 기념관)

인간으로 세상에 태어나서 누구나 자기가 바라는 목적이 있네. 이 목적을 달성한다면 그보다 더한 행복은 없을 것이네. 그리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그 자리에서 죽는다 하더라도 이 또한 행복 아닌가. 남의 눈에는 불행일 수도 있겠지만 죽을 곳을 찾는 것은 옛날부터 행복으로 여겨왔네. 같은 운동선상의 동지로서 장래가 만리 같은 귀중한 청년자제들이 죽음을 제 집에 돌아가는 것으로 여겨 두려움 없이 몇 번이고 사선을 넘고 사지에 뛰어드는데 내 나이 이미 60을 넘어 70이 멀지 않았는가. 그런데 이대로 앉아 죽기를 기다린다면 청년동지들에게 부담을 주는 방해물이 될 뿐이니 이것은 내가 가장 부끄러워하는 바요, 동지들에게 면목이 없는 일이네.

- 1932년 이회영이 만주로 떠나기 전에 동지들에게 한 말

[천지일보=이예진 기자] 일제강점기 시절 나라를 빼앗겼다 보니 수많은 서러움이 있었다. 어느 누구하나 잘 차려진 밥 한 상 먹기 힘들었으며 서슬 퍼런 일제의 눈치만 봐야했던 시절이었다. 물론 일제에게 빌붙어서 자신의 나라를 망각해버린 이들은 일제 아래에서 떵떵 거리며 살았으나 사실 이들 또한 독립군들의 총구를 피해 벌벌 떨면서 살아야했다.

빼앗긴 조국을 위해 어떤 이들은 교육과 계몽에 힘을 썼고 어떤 이들은 집과 가족을 등진 채 외국으로 망명했고 총을 들었다. 총을 든 이들은 자기 목숨 아끼지 않고 조국을 되찾는 영광을 바랐고 이들이 힘껏 싸운 전투 중 올해 100주년을 맞는 것이 있으니 바로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다. 이 전투에는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이 많이 포진되어 있었고, 이들을 위해 뒤에서 조용히 물심양면 힘 쏟은 이가 있으니 바로 ‘우당 이회영’ 선생이다. 우리나라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대표적인 인물이기도 한 우당은 어떻게 우리에게 기억돼야 할까.

◆ 풍전등화와 같았던 조국

이회영은 백사 이항복 집안인 경주 이씨 집안의 여섯 형제 중 넷째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백사 이후 9명의 영의정과 1명의 좌의정 등을 배출한 명문가 중의 명문가였다. 이회영의 아버지 이유승 또한 이조판서를 역임했다. 이들은 조선 최고의 명문가였기에 일제에 협력만 한다면 이후의 생은 충분히 보장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회영의 아버지 이유승은 을사늑약이 체결된 후 조약 반대 상소문을 올리면서 박제순을 탄핵했다. 이처럼 이회영의 가문은 심지가 곧고 나라에 대한 충심이 지극한 집안이었다. 거기다 이회영은 일찍부터 외국 문물에 눈을 떴고 사대부 집안이었지만 개화사상을 거리낌 없이 받아들였다. 그러면서 당시 독립운동의 중심이었던 상동교회에 출석하면서 ‘상동청년학원’을 세웠고 학감의 자리에 올랐다.

이와 함께 전덕기 목사와도 친분을 쌓으면서 항일 투쟁 운동을 이어나갔다. 을사늑약 이후 전덕기 목사는 전국감리교청년연합회 ‘엡웰청년회’를 소집해 을사늑약 무효화 투쟁을 벌였고 이회영은 물심양면 아끼지 않으며 지원했다. 거기다 이회영은 을사늑약에 앞장 선 을사오적(乙巳五賊)을 처단하기 위해 사비를 들이며 암살단을 만들기도 했다.

을사늑약이 체결된 후 이회영은 이 늑약을 무효화시키기 위해 어린 시절부터 함께한 이상설, 동생 이시영과 같이 의논을 했다. 이에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개최되는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보내기로 결정했다. 쉽지 않은 길이었지만 고종의 옆을 보필하고 있던 궁내부대신 조정구를 만나 특사를 보낼 수 있는 황제의 ‘위임장’을 받아달라 부탁했다.

[천지일보=이예진 기자] 우당 기념관에 전시된 고종 황제의 헤이그 특사 위임장
[천지일보=이예진 기자] 우당 기념관에 전시된 고종 황제의 헤이그 특사 위임장

일제의 서슬 퍼런 칼 아래 있던 고종은 백지의 종이에 겨우 서명과 어새만 찍어 조정구를 통해 이회영에게 보냈다. 종이 한 장의 밀서조차 쓸 수 없는 상황이기에 내용은 알아서 쓰라는 뜻과 함께 특사로 가는 이들을 온전히 믿는다는 의미였다. 이상설·이위종·이준으로 구성된 헤이그 특사는 고종의 신뢰와 이회영의 노력으로 떠날 수 있었다. 하지만 고종의 위임장을 들고 간 특사들은 일제의 방해와 자기 배 채우기 급한 열강들의 묵인으로 회의장 입구도 밟지 못했다. 그러나 회의장 근처에는 많은 시민 활동가와 언론이 모여 있었고 세 사람은 발품을 팔아가며 을사늑약의 무효를 외쳤고 이위종의 인터뷰는 <평화회의보> 1면에 실리기도 했다.

이에 일본은 특사로 간 세 사람에 대한 결석재판을 열었고 이상설에게는 사형을, 이준과 이위종에게는 종신형을 내렸다. 즉 더 이상 조국에 돌아올 수 없다는 의미였다. 당시 이준은 이미 생을 달리한 상태였고 이상설과 이위종은 국외에서 떠돌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일제의 칼날은 고종에게로 향했고 결국 고종은 순종에게 왕위를 넘기는 모욕을 당했다. 또한 일제는 대한제국군대를 해산시켰다.

헤이그 특사(왼쪽부터 이준, 이상설, 이위종)
헤이그 특사(왼쪽부터 이준, 이상설, 이위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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