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봉건시대 제왕들에게도 비선(秘線)이 있었다. 그런데 올바른 비선은 임금을 훌륭하게 만들었지만 그릇된 비선은 제왕을 궁지로 몰아넣고 비극을 야기시키기도 했다.

학승으로 범어(梵語)에 능통했던 신미대사는 현군 세종의 특별한 비선이었다. 신미대사를 궁중으로 초치하고 싶어도 신하들의 눈치를 살피느라 쉽지가 않았다. 세종은 피부병을 치료한다는 구실로 청주 초수(지금의 초정)로 행행할 것을 명한다.

세종은 초정에 행궁을 마련하고 60일간을 머물렀다. 억불숭유로 세종을 만나기도 어려웠던 신미대사는 세종과 두 달간을 같이 있으면서 범어를 기초로 하여 한글 창제의 주역을 맡았다. 인품이 훌륭했던 신미대사는 세종이 성군이 되는 데 큰 몫을 한 것이다.

조선 성종에게는 특별한 비선이 있었다. 성종은 평소 음주가무를 즐겼는데 기생 소춘풍을 측근에 두었다. 소춘풍은 재담으로 성종의 마음을 사로잡았으며 임금은 체통을 지키지 않고 그녀를 궁중으로 불렀다. 야사에는 소춘풍의 집을 가기 위해 미복으로 궁중의 담을 넘었다는 얘기도 전한다.

그런데 이 사건은 중전 윤비 폐모의 도화선이 됐으며 후에 연산군이 궁중을 피로 물들이는 참극으로 비화됐다. 윤비가 성종에게 기생을 가까이 하지 말라는 충언을 하면서 실수로 임금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낸 것이 화근이 되었다. 소춘풍은 실지 수십명의 기부(妓夫)까지 데리고 부자로 살았다고 한다. 그녀는 자신이 ‘왕 못지않은 팔자를 타고 났다’고 자랑했다는 얘기가 전한다.

조선 중종 때 무오사화를 일으킨 유자광은 궁궐의 문을 지키는 무인 신분이었다. 그런데 세조의 일등공신이 되어 예종 성종 연산군 중종 시기까지 5대 조정을 주름잡았다. 출신 성분이 좋지 않아 가장 많은 비난과 시기를 받았지만 임금의 비호로 관직을 떠나 있을 때도 권력과 호사를 누렸다.

유자광을 가장 신임한 것은 세조였다. 신하들이 유자광의 비행을 들어 탄핵할 것을 요구해도 세조는 듣지 않았다. 여론을 의식하여 유배를 보냈지만 금세 조정으로 불러들였다. 과거 급제자가 아닌 것이 항상 문제가 되자 전시(殿試)를 열어 장원으로 합격시키는 특전을 주기도 했다. 이것이 유자광을 오만하게 만들었으며 파멸케 한 것이다.

유자광은 연산군에게도 붙어 아첨으로 살다 중종반정 때 배신했다. 그러나 자신이 옹립한 중종으로부터 외면당하고 결국 유배지에서 쓸쓸히 죽었으며 그 아들마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제왕에게는 바른 말을 하는 신하나 올바른 비선이 필요했다. 당태종 시기 위징(魏徵)은 바른 소리의 상징으로 기록된다. 그는 황제에게 시도 때도 없이 직언, 태종이 성군이 되는 데 기여했다. 태종은 중국 국민들이 제일 숭배하는 인물이며 그가 지은 정관정요(貞觀定要)는 1천 5백년이 지난 지금도 나라를 다스리는 최고의 요람으로 평가된다.

전한(前漢)시대 학자 유향은 임금을 궁지로 모는 간신의 특징을 6가지로 나눴다. 이것이 바로 ‘육사론(六邪論)’이다. 위징은 이를 좌우명으로 삼고 바른 신하의 길을 실천한 것이다. 조선 성종도 경연에서 고려조에도 ‘육사’의 내용이 공론으로 제기된 것을 알고 각 관청의 벽에 써 붙이라고 어명했다.

“급료만을 기다리고 사사로운 이익만 취하는 자는 구신(具臣), 임금의 눈과 귀를 가리고 모든 것이 다 옳다고 하는 신하는 유신(諛臣), 겉으로 근면한 척 좋은 말과 표정을 지어 임금의 임용기준을 흐리게 하는 자는 간신(姦臣), 지혜와 말 재주는 뛰어나지만 골육의 정을 이간하고, 밖으로 조정을 어지럽히는 자는 참신(讒臣), 권세를 갖고 당파를 지어 자기 세력을 쌓아 위세를 높이는 자는 적신(賊臣)이다.”

최순실 게이트로 나라가 혼란을 겪고 있다. 대통령의 비선으로 권력의 그늘에 숨어 온갖 이권과 특권을 부여 받으려 했다. 대통령이 그녀의 비행을 막지 못한 것이 화근이다. 청와대 비서실도 책임을 지고 비서관들이 줄줄이 사표를 냈으며 총리까지 교체됐다. 대통령의 주변에 ‘육사’만 득실된 것은 아닌지. 위징과 같은 진정한 보좌진들과 비선이 있었어도 지금과 같은 불명예는 생기지 않았을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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