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삼국유사에 나오는 보천(寶川)과 효명(孝明) 태자의 설화는 ‘청련화(靑蓮花)’와 관계가 있다. 청련화는 청정을 상징하는 푸른 색깔의 연꽃이나 석가모니 설화에는 여인의 이름이다. 그래서 여러 보살들이 손에 잡는 아름다운 꽃으로 표현된다.

두 태자는 왕위보다는 유람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런데 오대산에 와서는 갑자기 산 속에 숨어 시위하던 군사들도 간 곳을 알지 못했다. 보천, 효명은 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삼국유사에는 이들이 오대산에서 ‘청련화’를 발견했다고 했다.

보천은 청련화가 있는 곳에 암자를 세웠는데 그 이름을 보천암이라고 했다. 정변이 일어나 신하들이 왕위를 계승시키기 위해 오대산을 뒤져 사라진 두 태자를 찾았다. 보천암에서 이들을 찾은 군사들은 엎드려 환궁하기를 간청한다.

그런데 보천은 울며 돌아가지 않겠다고 사양했다. 궁중의 호사로움보다는 아름다운 청련화와 함께 사는 것이 더 좋았던 것인가. 삼국유사 보천 태자의 설화에는 그가 사랑한 아름다운 여인과의 은둔 비밀을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아우 세종에게 세자자리를 양보한 양녕대군의 파국도 한 여인과의 사랑에서 비롯된다. 양녕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어리’라고 하는 기생이었는데 그녀는 이미 한 관리의 애첩이었다. 어리를 보고 한눈에 반한 양녕은 관리의 집을 찾아가 어리를 달라고 다그친다.

세자는 여인을 뺏어 말에 태우고 동궁으로 돌아오는 길에 얼굴을 훔쳐봤다. 화장도 안한 얼굴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세자는 “어렴풋이 비치는 불빛 아래 그 얼굴을 바라보니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이 아름다웠다”고 기록을 남겼다. 양녕은 그녀를 장인 집에 숨겨 두고 임신까지 시킨다.

태종은 이 같은 사실을 듣고 “세자가 어떻게 사대부 첩을 뺏을 수 있단 말인가”라고 한탄했다. 왕은 두 사람 사이를 떼어 놓으려고 어리를 먼 곳으로 귀양 보냈다. 양녕은 어리가 보고 싶어 동궁을 빠져 나와 유배지까지 찾아갔다. 양녕의 이런 행동은 거짓이었을까, 아니면  진실이었을까. 양녕은 신분을 초월, 진정으로 어리를 사랑한 것 같다. 그런데 어리는 이루어 질 수 없는 사랑을 한탄하여 자결하고 말았다.

양녕은 애통한 마음을 삭이지 못하고 태종에게 반항적인 상소를 올린다. “아버지는 군왕이라고 수많은 처첩을 거느렸는데 세자인 나는 왜 여자를 탐하면 안 되는 것입니까?”라는 내용이었다. 분노한 태종은 양녕을 결국 폐세자로 삼았다. 어리가 자결하지 않고 살았다면 양녕과 해로하지 않았을까.

영국 에드워드8세는 1936년 43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그런데 한 중년부인을 사랑한 나머지 왕위까지 내던졌다. 왕이 사랑한 여인은 미국여자로 이혼 경력이 있는 심슨 부인이었다. 왕은 이 여인을 만나자마자 열렬한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그러나 왕실은 물론 국민들까지 뼈대 없는 미국여자이며 이혼 전력을 이유로 극구 반대했다.

에드워드 8세는 의회에서 결혼 승인이 부결되자 결심을 했다. “사랑하는 여인의 도움과 뒷받침 없이는 막중한 책무를 수행하기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며…”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퇴위했다. 심슨 부인과 함께 프랑스로 넘어 온 에드워드는 10여명의 고객들이 참석한 단출한 결혼식을 올렸지만 웃음을 잃지 않았다. 퇴임한 후에는 윈저공으로 불렸으며 이들은 35년간 행복한 삶을 살았다.

국민들로부터 신임이 두터웠던 존키 뉴질랜드 총리가 갑자기 총리직에서 물러나겠다고 선언했다. 사퇴 이유는 사랑하는 아내와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라고 한다. “총리직은 내게 있어 가장 소중한 이들의 희생을 요구한다”며 “아내 브로나는 많은 밤과 주말을 홀로 보내야 했고, 그녀에게 중요한 많은 행사에 나는 참석할 수 없었다”고 퇴임 이유를 밝혔다.

아내의 일상과 취미까지도 배려, 권력을 포기할 만큼 가정을 최우선하는 한국의 정치 지도자들이 얼마나 될까. 권력은 뜬구름 같지만 가족은 영원하다. 가족과 함께하는 행복이 진정한 행복이라는 것을 존키 총리는 알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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