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연꽃은 청정함을 상징한다. 유학자들도 군자의 풍모라고 하여 애완했으며 시의 소재로 삼았다. 부처나 관음, 미륵은 빠짐없이 연화좌에 서거나 앉는다. 보살들은 화려하고 아름다운 여성의 모습으로 표현되는데 연꽃 줄기를 잡고 있으면 자비의 상징인 보현(普賢)이다.

왕궁이나 사찰 건축물의 막새기와(와당)는 연꽃이 제일 많은 소재로 이용됐다. 화려하게 보이려는 뜻도 있지만 왕이나 부처가 상주하는 곳임을 나타낸 것이다.

불교전래 이전의 막새기와에는 볼품이 없는 초문(草紋)을 새겼다. 그것이 4세기 불교 전래 이후 급속도로 발전한다. 고구려는 연꽃보다는 독특하게도 귀면(도깨비, 혹은 龍面이라고 함)이 유행했지만 백제는 중국의 영향을 받아 웅진(공주), 부여 시기 가장 완숙한 연꽃 막새문화를 완성했다.

성왕(聖王)은 부여로 천도하기 전부터 중국의 양(梁)나라에 사신을 보내 기술자들을 초빙했다. 무제(武帝)는 성왕의 불교에 대한 깊은 통찰에 감동, 와박사(瓦博士)들을 파견한다. 공주시 반죽동 중심에 있었던 대통사(大通寺)는 이 시기 완성된 대가람이었다. 양나라 무제의 연호가 ‘대통(大通)’이었기 때문에 양국 교류의 기념비적 산물이란 주장도 있다.

그런데 백제는 양나라 기술을 전수받아 더 훌륭한 기와 기술을 발전시킨다. 아름답고 우아한 백제식 막새들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연꽃은 살이 찌고 우아하며 정교했다.

성왕은 또 일본에 불교를 전래하고 건축 기술을 가르쳤다. 일본에서 처음 절이 지어진 것은 성왕의 배려 때문이다. 아스카 문화의 중심인 나라(奈良)에 백제왕사(百濟王寺)가 지어졌다. 이곳에서 출토된 초창기 막새는 모두 백제식이다.

그런데 신라와 백제는 이 시기를 전후하여 피 터지는 국경분쟁이 발생했다. 진흥왕 때 신라는 소백산을 넘어 고구려 영토를 잠식하면서 단양 영동 보은 괴산 진천 등지의 백제 땅을 공략한다. 성왕은 구 가야세력과 연합해 신라의 침공에 대비했다. 전쟁은 본격화됐으며 5세기 말 동성왕대 이뤄진 우호적인 동맹은 깨지고 말았다.

성왕은 구천(충북 옥천)을 순행하다 어이없게도 신라 복병에 의해 포로가 됐다. 보은 삼년산성에서 출전한 도도(高干, 외방 군조직의 셋째 등급)가 잠복 중 왕을 사로잡은 것이다. 도도는 예를 갖춰 성왕을 참수, 왕의 목을 백제로 보낸다.

그런데 백제, 신라는 전쟁의 와중에서도 불사(佛事)만큼은 협력을 했다. 선덕여왕은 황룡사 구층탑을 지으면서 적국인 백제 건축전문가들을 초빙했다. 백제는 기꺼이 기술자들을 보내 신라 최대의 대역사에 힘을 보탰다. 재미있게도 신라 왕궁인 월성을 위시 황룡사지 황복사지 등 유구에서 출토되는 삼국시기의 막새기와들은 모두 백제식이다.

전북 익산 미륵사지는 백제 최대 규모의 절터이며 가장 완숙한 모양의 막새들이 수만점이나 출토된 곳이다. 이 절은 무왕(武王) 때 시집을 온 신라 선화공주의 발원이라는 설화가 전해 내려온다. 그런데 2009년 석탑 사리공을 발굴했을 당시 출토된 금판경에는 ‘사택(沙宅)’의 따님이 발원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익산에서는 무왕과 선화공주의 로망설화가 산산이 깨졌다고 한탄하는 소리까지 들렸다.

백제 사(沙)씨는 부여박물관에 보존된 사택지적비(沙宅智積碑)와 일본서기에도 등장하는 명문이다. 그런데 백제 ‘사택’은 신라 ‘사탁’과 음이 비슷하다. 미륵사를 창건한 백제 귀족 사택이 혹 동성왕 당시 백제로 시집을 온 아찬 비지 따님을 조상으로 하는 신라 ‘사탁부(沙啄部)’의 후예들은 아니었을까.

이런 상상을 해 보면 백제에 귀화한 사탁부 귀족세력은 황룡사에 버금가는 백제 최대의 절을 창건하고 백제 와박사들은 적국 신라에 파견돼 궁전의 기와를 만들어 준 셈이다. 백제 와박사들은 신라 궁전 처마에 자국의 연꽃을 새겨 넣었다. 전쟁의 고통을 해결해 줄 미륵의 출현과 자비를 염원했던 것은 아닌가.

‘6∼7세기 백제·신라 기와의 대외교류’에 관한 세미나가 얼마 전 부여박물관에서 열렸다. 백제의 문화적 위상을 입증하는 막새와 건축물의 지붕 끝에 놓는 치미(鴟尾) 등이 새롭게 조명됐다. 기와 한 조각에서도 가슴에 와 닿는 백제의 예술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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