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한국의 전통적 양조 기술은 자연의 향을 담아낸 것이 특별하다. 이른 봄 진달래를 따 담은 것이 두견주, 가을날 이슬 맞은 국화잎을 띄운 것이 국화주다. 봄, 여름, 가을 자연의 향초를 찾아 발효시켰으니 이처럼 자연 친화적 술들을 세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고려 사람들은 술을 매우 사랑하여 많은 종류를 만들었다. 이규보의 시 속에는 이화주(梨花酒), 자주(煮酒), 화주(花酒), 초화주(椒花酒), 파파주(波把酒), 방문주(方文酒), 춘주(春酒), 천일주(千日酒), 천금주(千金酒), 녹파주(綠波酒) 등이 나온다. 고려가요인 한림별곡에도 황금주(黃金酒), 백자주(柏子酒), 송주(松酒), 예주(禮酒), 죽엽주(竹葉酒), 이화주(梨花酒)가 등장한다. 그 밖에 부의주(浮蟻酒), 창포주(菖蒲酒), 유하주(流霞酒)도 있었다니 지금은 모두 생소한 술 이름이다.

국화주는 최자(崔滋)의 ‘파한집’을 비롯 동의보감, 규합총서 등의 문헌에도 기록돼 있다. ‘따뜻한 국화주를 하루에 세 번 마시면 뼈와 근육이 튼튼해지고 장수한다’는 속설이 있어 고려인이 건강을 위해서도 즐겨 마신 술이 아닌가 싶다.

조선시대 3대 명주 대접을 받은 술은 관서 ‘감홍로’, 전주의 ‘이강고’, 정읍의 ‘죽력고’다. 이는 일제강점기 육당(六堂) 최남선이 ‘조선상식문답’에서 언급한 것이다. 감홍로라는 이름은 맛이 달며 붉은 빛을 띠는 이슬 같은 술이란 뜻에서 붙여진 것이다. 다른 술과 달리 좁쌀 누룩으로 만들어진다. 이강고는 배와 생강이 주원료이며 죽력고는 푸른 대나무에서 뽑아낸 진액을 섞어 만든다.

감홍로주는 조선시대 평양 기생들과 한량들이 최고로 쳤다는 일화가 있다. 고전 삼선기(三仙記)에 나오는 평양감사 선상유람 잔치에도 제일먼저 거명된 명주다. 애주가였던 명기 황진이도 연인이었던 소세양(蘇世讓) 판서가 떠나는 날 밤새 말술을 마셨다. 그리고는 아픈 마음을 시로 남겼다. 그녀는 당시 명주로 손꼽혔던 감홍로를 애음하지 않았을까.

송강(松江) 정철도 술을 무척이나 사랑했다. 바르지 못한 일에는 절대 고개를 숙이지 않는 성품이었지만 자연을 사랑하고 친구들과 어울려 술잔을 나누는 것을 좋아했다. 그런 풍류가 관동별곡이란 불후의 명작을 탄생시킨 것인가. 송강이 즐겨 마신 술은 사대부가 즐긴 맑은 술이 아니라 텁텁한 농주, 막걸리였다.

“재 너머 성 권농(成勸農) 집의 술 익단 말 어제 듣고/ 누운 소 발로 박차 언치 놓아 지즐타고/ 아이야 네 권농 계시냐 정 좌수(鄭座首) 왔다 하여라”

관방 기생들이 사또와의 연회 때는 합환주(合歡酒)를 돌렸다. 이 술은 합환수라는 나무를 넣어 발효시킨 것이다. 합환수는 야합수(夜合樹), 융화수(絨花樹), 부용수(芙蓉樹)라고도 불리는 콩과 식물로 6월에서 7월 사이에 꽃이 핀다. 꽃이 낮에는 벌어지고 밤에는 오므라드는 특징이 있어 이 같은 이름을 얻었다.

월매집 담을 넘은 이도령은 춘향과 첫날밤 합환주를 마셨다. 춘향을 등에 업고 사랑가로 유희한 것을 보면 풍속에 이 술이 기방이나 시정에서 인기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한양으로 떠나는 이도령을 전송하기 위해 춘향이 오리정에서 통곡하며 내놓은 술상은 ‘이별주’였다. 이별주는 또 어떤 술이었을까. 우리의 전통술은 삶 속에서 기쁨을 나누고 한을 삭이는 애환의 반려이기도 했다.

일제가 한국을 강점한 직후 조세 수탈 수단으로 시행했던 ‘주세령’ 공포가 100주년을 넘었다고 한다. 얼마 전 국회에서 열린 우리술문화원의 전통주산업진흥을 위한 심포지엄에서는 한국의 ‘전통주’ 정책이 지금까지 일제의 주세령 한계를 뛰어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지 못하여 과거 풍부하고 다양했던 한국의 술 맥락을 부활시키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심포지엄에서는 전통주라는 이름 대신 ‘한주(韓酒)’라는 명칭으로 대체하자는 주장도 나왔다. 세계에서 가장 다양한 술을 빚은 지혜를 한류(韓流)로 부활시키는 방안을 만들어야 할 시점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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